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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6: 조선의 선교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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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1-22 ㅣ No.800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6) 조선의 선교사들


19세기 조선 선교의 주역은 프랑스의 가난한 농촌 출신들

 

 

- 파리외방전교회는 조선 선교의 책임을 맡은 1831년부터 병인박해가 일어나던 1866년까지 35년간 21명의 선교사를 조선에 파견했다. 사진은 파리외방전교회본부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조선 순교자들 사진. 가톨릭평화신문 DB.

 

 

프랑스 교회에는 1789년 대혁명 이후 안으로는 ‘재건’, 밖으로는 ‘외방 선교’라는 열풍이 불었다. 교구 사제들은 해외 선교를 지원해 파리외방전교회에 앞다퉈 입회했다. 신자들은 십시일반으로 선교 기금을 후원했다.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이 1822년부터 1922년까지 100년간 파견한 선교사 가운데 절반이 프랑스 출신이었다. 

 

오늘날 일부 인문학자와 역사학자들은 이 같은 선교 열풍 원인을 신앙적인 것으로만 단정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프랑스 교회의 해외 선교 운동이 결과적으로 프랑스 식민주의와 결부돼 있다고 꼬집는다. 세상의 시선이 어떻든 교회는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선교를 이어 갔다. 선교는 예수님의 명령이요 교회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이 구절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서 복음을 선포하도록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순간을 봅니다. 그리하여 당신에 대한 믿음이 온 세상 곳곳에 두루 퍼지게 하셨습니다.”(「복음의 기쁨」 19항)

 

-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정원에 있는 성모상. 선교사의 순교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파리외방전교회 모든 신학생과 성직자들은 이곳에서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찬미 기도를 바쳤다. 가톨릭평화신문 DB.

 

 

교황청 포교성성은 1831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조선 선교 책임을 맡겼다. 조선대목구가 설정된 1831년부터 병인박해가 시작된 1866년까지 35년간 파리외방전교회는 21명의 선교사를 조선에 파견했다. 이들 중 앵베르ㆍ다블뤼ㆍ베르뇌 주교와 모방ㆍ샤스탕ㆍ프티니콜라ㆍ푸르티에ㆍ오메트르ㆍ위앵ㆍ볼리외ㆍ도리ㆍ브르트니에르 신부 등 12명이 순교했다. 또 브뤼기에르ㆍ페레올 주교와 메스트르ㆍ장수ㆍ랑드르ㆍ조안노 신부 등 6명이 병사했다. 그리고 리델 주교와 칼레ㆍ페롱 신부는 조선 선교지를 떠나 다른 곳에서 사망했다. 

 

조선에 입국할 때 선교사들의 평균 나이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이들은 평균 7년간 사목을 하다 서른여섯 즈음 사망했다. 페레올 주교, 김대건 신부와 함께 1845년 조선에 입국한 다블뤼 주교는 21년간 조선에서 사목했다. 베르뇌 주교와 푸르티에ㆍ프티니콜라 신부도 10년간 선교사로 활동했다. 반면 장수 신부는 입국한 지 3개월 만에 뇌염으로 선종했다. 

 

조현범(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파리외방전교회가 1832년부터 1866년까지 아시아 전역에 파견한 선교사 수가 531명”이라며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가 같은 시기 전체 선교사 중 약 4%에 불과한 것으로 볼 때 당시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는 조선 선교지 비중을 그리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대부분은 농민의 자식이거나 지방 소도시 노동자 집안 출신이었다. 그들 중에는 파리나 리옹, 마르세유, 보르도와 같은 대도시 출신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프랑스의 도시를 중심으로 전개된 산업혁명의 흐름이나 새로운 사조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민감하기 어려운 자들이며 근대적인 변화가 종교적 신앙심을 저해한다고 생각하는 엄격한 도덕가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노길명, 「가톨릭과 조선 후기 사회 변동」 참조)

 

피카르디 지방 아미앵의 이름있는 부르조아 가문의 다블뤼 주교와 부르고뉴 지방의 귀족이었던 브르트니에르 신부, 브르타뉴 지방에서 선박업을 가업으로 하던 리델 주교만이 부유층 출신이었다. 액스교구 마리냔 출신 앵베르 주교와 앙굴렘 출신 오메트르 신부는 초등교육도 받지 못할 만큼 가난했다.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 대부분은 농민의 자녀이거나 지방 소도시 수공업자 집안 출신이었다. 사진은 프랑스 남부 액상프로방스 지역 액스 교구 마리얀에 있는 앵베르 주교 생가. 가톨릭평화신문 DB.

 

 

따라서 조선 선교사 대부분은 소ㆍ대신학교 교육 외에는 일반 교육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소신학교 교육을 대체할 초ㆍ중등 교육 체제가 제도적으로 마련돼 있지 않았다. 조선 선교사 중 프티니콜라 신부만이 오늘날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에콜을 다녔다. 오늘날 중등교육기관인 콜레주를 다닌 이도 베르뇌ㆍ리델 주교, 모방ㆍ메스트르 신부가 전부이다. 문학사 학위를 받은 후 대신학교에 입학한 이는 초대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가 유일하다. 이들 외 조선 선교사들은 교구 사제의 개인 교습이나 소신학교 교육을 이수한 다음 교구 대신학교에 입학해 신학교육을 마치고 사제품을 받았다. 

 

조현범 교수는 “이러한 사실은 조선 파견 선교사들이 서구 근대 문명에 대해 익숙하지 못했으며, 과거 절대 왕정 시대의 교육이 몸에 밴 사람들이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브뤼기에르ㆍ페레올ㆍ다블뤼ㆍ베르뇌ㆍ리델 주교와 모방ㆍ샤스탕ㆍ메스트르ㆍ프티니콜라ㆍ페롱ㆍ랑드르ㆍ위앵 신부는 교구에서 사제품을 받은 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했다. 또 앵베르 주교와 장수ㆍ조안노ㆍ칼레ㆍ오메트르ㆍ볼리외ㆍ도리ㆍ브르트니에르 등 8명의 선교사는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해 신학 교육을 마치고 사제품을 받았다.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신학생들은 자주 선교사들의 순교 소식을 들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신학교 정원 한쪽에 있는 성모상 앞에 모여 기도하면서 순교자들의 행적을 찬양하고 찬미의 노래를 불렀다. 

 

“먼 곳에서 하느님께서 자신에 대한 봉사로서 선교사의 피를 받으셨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신학교의 모든 성직자는 정원의 나무 아래에 모여서 성모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느님의 증거자가 되고자 준비하는 모든 지망생은 자신들의 선배가 하느님 곁에 받아들여진 것에 감사하면서 테 데움의 찬미가를 약식이지만 설득력 있게 불렀다.”(조현범, 「조선의 선교사, 선교사의 조선」 115쪽 참조)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1월 22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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