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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교회사실록과 평신도열전 - 이윤일 성인 친인척 신앙의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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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2-10 ㅣ No.792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교회사실록』과 『평신도열전』 - 이윤일 성인의 친인척 신앙의 씨앗을 온 나라에 뿌리고

 

 

경상도 상주 멍에목이 하루아침에 충청도 음성 멍에목으로 바뀌어 성지로 선포되었다. 어느 교회 신문 2016년 8월 21일자에는 청주교구에서 ‘멍에목’교우촌을 성지로 지정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그런데 이 기사에는 ‘복자 박경화·박사의 부자와 순교자 5위의 거주지이자 체포 현장으로 의미 지녀’라는 부제가 달려 있고 기사도 그렇게 시작했다. 하지만 박경화 가족은 충청도 홍주 땅 구교우의 집안인데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살다가 상주 멍에목에서 1827년 예수승천첨례 때 체포되었다. 그들은 상주감영으로 끌려갔다가 대구에 와서 순교했다. 현재 주교회의 시성시복위원회 자료에서도 그렇게 소개하고 있다. 다블뤼 주교는 이들의 순교사실은 기록하면서 그들이 상주에서 체포되었다고 했다. 여기에 멍에목이라는 정확한 장소를 제시한 사람은 마백락이다. 그런데 이제 멍에목이란 이름으로 그 장소를 충청도로 비정하는 것이다. 순교자들은 행정권에 의해 단죄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 행정의 중심지에서 처형되었다. 복자 박경화 등은 경상도 상주의 멍에목에서 체포되어 감영이 있던 대구에서 순교했다.

 

 

이윤일의 인척, 복자 박경화 · 박사의 부자

 

복자 박경화, 박사의 부자는 모범적인 신앙생활로 잘 알려져 있다. 박경화는 원님이 스님과 논쟁시키자 천주교 교리를 시원하게 밝혔던 사람이다. 그리고 박사의는 연로한 아버지와 함께 심문을 받겠다고 자청하여 늘 그 어려움을 덜어드렸던 일로 유명하다. 박사의는 1827년 정해박해 때 체포되어 12년을 옥살이하고 1839년 기해박해 때 치명했다. 그는 그렇게 경상도 북부지역에 천주교를 알렸다. 박사의는 아들 박양여와 딸 셋을 두었다. 이윤일은 그 딸 중 마르타하고 결혼했다. 즉 박양여는 이윤일과 처남매부지간이다. 이윤일의 처남 박양여는 정해박해 당시 열일곱 남짓이었다. 박양여는 모친과 세 누이와 함께 신 장사를 하여 생계를 보존했다. 그는 수계를 착실히 했다. 그는 부친이 치명할 때 자신이 관가에서 에둘러 말한 것이 있다 하여 평생 보속하기로 결심하고, 소금으로만 반찬을 했으며, 행위가 단정해서 원근에 소문이 자자했다. 박양여는 10년 넘게 옥살이를 하는 아버지의 옥바라지를 하며 지냈다. 그는 주교에 의해 영남지방 회장으로 뽑혔다.

 

박양여는 여우목에 살다가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교우들과 산골로 옮겨가 충청도 황간 상촌에 새로 집을 짓고 피신했다. 그는 평생 동정으로 살았고, 또 여동생 막달레나가 그의 곁에서 동정의 삶을 살았다. 그들은 피신하는 일가친척들을 거두어 주었다. 당질 박주현 남매는 부친을 잃고 고모와 모친을 따라 박양여 집에서 함께 생활했다. 그러다가 이들은 더 깊은 산골을 찾아서 이윤일이 살고 있는 여우목으로 옮겼다. 박주현은 장래 이윤일에 대해 증언할 인물이었다. 박양여가 박해를 피해 황간에 있을 때는 그의 생질 이 타대오와 장 안토니오도 피신해 왔다. 이윤일은 좀 나이든 아들 타대오를 피신시키고, 어린 아들 마티아만 데리고 있었다. 장 안토니오는 상주 태생인데 부친이 일찍 죽어 외삼촌 댁에 와서 살고 있었다.

 

한편 이윤일은 충청도 내포지방 홍주 태생이다. 그의 집안은 병인박해 때까지 4대 이상 내려오는 구교우 집안이었다. 이윤일은 고향을 떠나 상주 갈골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 1850년 무렵이었다. 이윤일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처남 박양여가 생활하고 있는 여우목(경북 문경 증평마을)으로 이사했다. 며느리 박 아녜스는 상주출신이었다. 그의 가족은 박해시대 떠돌이 생활을 하던 신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윤일은 직계로 아들 네 명 이상과 한 명 이상의 딸을 둔 대가족이었다. 아들은 이 시몬과 이 타대오와 박 아녜스의 남편, 이의서 마티아 등이다. 또 그는 부인 박 마르타, 며느리 박 아녜스, 타대오의 가족, 이의서의 부인 이 마리아, 또 다른 아들 시몬의 부인인 며느리, 손녀, 그리고 딸 등이 함께 살고 있었다. 이외 이윤일의 사위와 그 사위의 삼촌이 같은 마을에 살고 있음을 보면 시집간 딸이 더 있을 수 있다.

 

시복재판기록들을 살펴보면 이윤일 가족은 박양여와 다리로 부산 오륜대순교성지에 묻혀 있는 이정식 일가와 연결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이정식은 동래 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선달직에 있으면서 동래 병영의 장교로도 있었고, 또한 무술이 비범하여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무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박양여의 또 다른 누이와 혼인했다. 박양여는 누이가 세 명 있었는데, 그중 막달레나는 동정생활, 마르타는 이윤일과 혼인했고, 또 한 명은 이정식과 결혼했다. 그러니까 이윤일과 이정식은 동서지간이었다. 이정식이 입교하게 된 동기는 처가 및 이들 충청도 교인들의 감화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정식은 말년에 천주교에 입교했는데, 입교 후로는 무관직을 사임하고 오로지 전교에만 전력하였으며 회장으로도 일했다. 이정식과 아들 이월주, 며느리 박조이 등이 신자인 것을 보면 집안 전체가 천주교를 받아들인 듯하다.

 

한편, 지금까지 잘못 알려진 부분을 짚고 가고자 한다. 혹자는 이 타대오를 이정식의 아들로 간주했다. 이 타대오는 『치명일기』 743번에 “통영에서 치명한 이 사도요한 회장의 아들이요, 서울에서 치명한 박 사도요한의 생질이니, 장 안토니오와 함께 치명하니라.”라는 자료를 근거로 타대오를 이정식의 아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는 두 가지의 오류에서 기인한다. 먼저 사도요한과 세례자요한을 구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이윤일은 사도 요한으로서 ‘이 요왕’이라 했고, 이정식은 세례자 요한으로서 ‘이 요안’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치명일기』 745년에는 이 요왕 회장의 아들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므로 그가 이정식의 아들은 아니다. 더구나 박양여의 당질이며 이윤일 처의 종질이고, 여우목에서 박해 때까지 함께 살았던 박주현은 시복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이 타대오의 부친은 통영이 아니라 대구에서 치명한 이 사도요한이라는 수정요청 서한을 올렸다. 특히 함께 치명한 인척들이 있기 때문에 박주현이 이윤일의 순교지나 가족관계를 혼동할 우려는 없다. 더욱이 박주현 남매는 부친을 잃고 고모와 모친을 따라 박양여 집에서 함께 생활했다. 그러므로 이 타대오가 이윤일의 또 다른 아들임은 확실하다. 또한 『병인치명사적』에 나타나는 이선오도 그렇게 증언하고 있다. 한편, 박 아녜스가 이윤일의 유해를 안장했던 사람들을 증언하면서 이의서와 또 다른 ‘요왕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그 아들이 타대오일 수 있다.

 

 

이윤일 성인 친인척 곳곳에서 흩어져 순교

 

이윤일은 여우목에서 회장으로서 마을사람들의 신앙생활을 이끌고 있었다. 이윤일의 아들 이 시몬은 병인년 한 해 앞서 공주에서 치명했다. 그는 1865년 11월 충청도 청풍 부럭이 처가 동네에 가짜 포교가 들어왔다고 해서 장정 10여 명을 데리고 그들을 쫓으러 갔다가 체포됐다. 이윤일은 아들 시몬이 치명하자 그의 시신을 찾아다 장사지내고 일상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때 병인년이 다가왔다. 이윤일은 식구와 마을 사람들과 더불어 30여 명이 함께 체포되었다. 병인박해 당시 문경일대에서 70여 명의 신자가 체포되었다. 상주옥에서는 이들을 세 그룹으로 나누어 매일 3명씩 지명하여 처형해 나갔다. 즉 당시 감옥에 있던 신자들은 죽음의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20여 명이 죽었다. 이윤일의 손녀, 아녜스의 두 살 된 딸은 옥에서 죽었다. 그리고 이윤일은 한실공소 회장 김인기 형제와 감영이 있던 대구로 이송되어 12월 중순 장날에 대구 관덕당에서 처형되었다. 또 자신이 피신시켰던 아들 타대오도 치명했다. 이 타대오는 1868년 영남회장을 맡고 있던 외삼촌 박양여와 함께 체포되어 박양여는 서울에서 치명하고, 이 타대오와 그의 또 다른 생질 장 안토니오는 충주에서 치명했다.

 

이윤일은 살아생전에 아끼는 사람들이 치명하는 광경을 여러 번 눈앞에 두었다. 그의 장인과 처의 조부가 순교했음은 물론, 병인박해에서 자신은 물론 자신의 두 아들 시몬과 타대오가 순교했고, 사위와 사위의 삼촌, 처의 사촌인 박 수산나 등이 순교한 집안이었다. 그뿐 아니라 두 살 난 손녀는 옥에서 죽었고, 또 자신과 함께 살던 수없는 사람들이 죽었다. 그의 동서도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순교는 그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집안 대대로 굳혀온 신앙이었음이 드러난다. 한 명의 순교자는 이처럼 수많은 신앙의 혈족들이 피를 흘린 토대 위에서 태어나고 있다.

 

 

기록은 신앙심의 뿌리, 역사연구는 주님이 인간사회에 내리는 메시지

 

이윤일의 친인척은 오늘날의 대전교구에서 태어났고, 안동교구 소속인 상주에서 체포되어 조카들은 청주교구, 삼촌은 서울대교구, 이윤일은 대구대교구에서 생을 마쳤다. 또 부산교구에서는 이윤일의 동서였던 이정식 일행의 순교가 있었다. 즉 그 일가는 나라 구석구석에 복음의 씨를 뿌리고 있었다. 그 활동범위도 충남, 영남, 호남을 잇는 광범위한 지역에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박해시대에는 전국이 하나의 교구였다. 일반적으로 한국 순교자들에 관한 자료는 시복시성을 대상으로 조사했기 때문에 순교사실 확인이 가장 중요한 관점이었고 그 내용은 주로 순교자의 덕성, 신앙, 순교 장면 등이었다. 그러므로 신자들의 생애가 다루어질 기회가 없었다. 또한 교회에서는 순교한 장소를 중심으로 순교자를 조사하고 기린다. 그러나 순교자 대부분은 자신들의 생활터전과는 다른 지역에서 순교했다. 이 때문에 순교지에서는 순교자들의 생활상이 잘 알려지지 않게 마련이었다. 또한 순교자들이 상당히 가까이 살던 사람들이었다 하더라도, 오늘날에 이르러 그 치명지의 교구가 다르면 현재의 사료에서는 각기 별개의 인물로 처리되는 경우가 많다. 자칫하면 각 성인들은 자신들의 친척과 전혀 관계없는 개인처럼 취급된다. 여기에 교회 자료들을 보다 더 철저히 분석하고 종합해야 할 이유가 있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교회사연구소가 약 15개쯤 된다. 그런데 이를 보면 전부 교구 소속 연구소 또는 수도단체 부설연구소이다. 교구가 분화하면 할수록 이윤일 요한 성인의 삶에서 보이는 예와 같이 서로 협력해서 종합적으로 그를 연구하려는 노력이 더욱 절실해진다. 그리고 역사연구는 살아온 모습을 정리하고 정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생활을 살핌으로써 종합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 또한 생활에 대한 기록이 미미하다고 하여 기존 기록의 중요성을 잊는 경우들이 많다. 그러나 누군가는 지속적으로 이 작업을 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처럼 변화속도가 빠른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성당을 짓거나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무엇인가를 봉헌한 신자들이 있다. 그들이 그것을 봉헌하는 동안 기뻤고 주님을 체험했음에는 틀림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봉헌자들 자신이 아직도 생존해 있는 동안 자신의 눈앞에서 모든 것이 송두리째 변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와 같은 사회에서 신앙인의 삶에 대한 기록은 연구만큼이나 중요하다. 특히 기록이 남지 않는 민초들의 노력이나 흔적을 제대로 담아내고 있어야 한다. 이런 작업은 우리 신앙의 불씨를 보존하는 일이며, 그리고 하느님의 메시지를 인간사회 안에서 읽어내는 작업이다. 앞으로 계속 기록되어야 할 『교회사실록』이나 『평신도열전』은 교회를 지키는 기둥이 될 것이다.(도움: 이찬우 신부, 백종희) 

 

●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는 이번 호로 끝맺습니다. 오랜 기간 글을 써주신 김정숙 교수님과 애독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월간빛, 2016년 12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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