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강론자료

요한복음 11,1-45 라자로의 부활 (2017. 4. 2. 사순 5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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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충희 [korangpo] 쪽지 캡슐

2017-03-29 ㅣ No.2169

베타니아에 사는 라자로라는 사람이 병이 들었다. 베타니아는 마리아와 마르타가 사는 고을이었다. (이 마리아가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씻었던 사람이다. 병이 든 것은 그녀의 오빠인 라자로였다.) 자매들이 예수에게 소식을 보냈다. “주님, 당신이 아끼는 친구가 병들었습니다.” 예수가 그 소식을 듣고 말하였다. “라자로는 병들었지만 결국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일이 일어난 것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한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는 마르타와 그녀의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였다. 그러나 라자로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있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물렀다. 그제야 그는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유대아로 돌아갑시다.”

 

베타니아가난한 자들의 집’, ‘라자로하느님께서 도우시다’, ‘마리아귀부인’, ‘마르타여주인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네 개의 명사는 각각 회개, 애덕, 신덕, 망덕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은 기사는 나중에 12:1-8에서 소개되는데 복음저자는 마리아를 미리 그 일과 관련하여 소개한다. 향유 사건은 요한복음 집필 당시에 꽤 널리 잘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라자로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을 미리 대비하여 사람의 생사는, 그것이 육신의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하느님의 권능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암시한다.

 

당신이 아끼는 친구라는 표현에서 세 남매와 예수는 개인적으로도 돈독한 우정을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때때로 병이 들고 늙어서 죽는다. ‘은 죽음의 전조이다. 라자로가 죽지 않을 것이라는 예수의 말은 그의 영적 생명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리킨 것이다. 이 말은 또한 라자로가 이 병으로 결국 죽게 될 것을 암시한다. ‘영광이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권능이 성령의 업적을 통하여 세상으로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주체는 예수와 그를 믿는 제자들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 영광을 드리는 사람을 아들로 삼아 영광스럽게 하신다. 이를 풀어서 말하면, 예수의 제자는 성령을 통하여 늘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예수는 마르타 자매를 사랑하는데도 그들에게 서둘러 가지는 않는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믿음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들이 큰 시련을 겪고 난 후 믿음이 더 견고해지기를 기대한다. 병보다는 죽음이 더 큰 고통이다. 예수는 친구들에게 죽음을 이기는 믿음을 주려고 한다. ‘이틀오늘-내일-모레3일이다. 3망덕-애덕-부활의 세 단계로 이루어지는 믿음의 쇄신을 상징한다.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고을이다. 성서독자는 구원의 때가 멀지 않았음을 예감한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선생님, 바로 전에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였는데 당신은 돌아갈 작정이십니까?” 예수가 말하였다. “하루는 열두 시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 환한 대낮에 걷는 사람들은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빛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밤 동안에 걸으면 넘어집니다. 그들에게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이렇게 말하고 덧붙였다.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서 그를 깨울 것입니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주님, 그가 잠들었다면 나을 것입니다.” 예수는 라자로가 죽었다는 뜻으로 말하였지만 그들은 그냥 잠이 들었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그래서 예수는 그들에게 분명하게 말하였다. “라자로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와 함께 있지 않아서 여러분이 믿을 수 있게 되었으니 마침 잘 되었습니다. 그에게 갑시다.”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가 동료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그와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모두 선생님과 함께 갑시다!”

 

베타니아는 예루살렘 근교에 있는 고을이므로 그곳으로 가면 유대의 지도자들에게 체포될 우려가 있다. 제자들은 친구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위험에 빠뜨리는 예수를 만류한다. ‘열둘모든 민족을 상징한다. ‘하루는 열두 시간은 예수의 삶은 늘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당시의 관습으로는 하루가 열두 시간이다.) ‘대낮은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일이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밤과 낮이 각각 여섯 시간씩으로 행복과 불행을 넘나들지만 결국 죽음을 맞아 소멸하고 만다. 사실상 그들은 열두 시간 내내 보이지 않는 밤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에게는 열두 시간 내내 늘 대낮이다.

 

은 믿음의 지혜이며, ‘넘어짐은 육정의 유혹에 굴복하는 것이다. 육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면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게 된다. 하늘나라의 제자는 늘 기도함으로써 믿음을 잃지 않는다. 믿음을 잃으면 반드시 육정의 유혹에 굴복한다. 하느님께서는 하늘나라의 제자를 통하여 세상 사람들을 도우신다. 그래서 예수는 라자로를 우리의친구라고 부른다. 예수는 라자로와의 개인적인 친분 때문에 그를 돕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라자로를 통하여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고자 한다.

 

은 하느님과의 깊은 친교를 상징한다.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깊이 잠들게 하신 다음, 그가 자는 동안에, 그의 갈빗대 하나를 꺼내시고 그 자리를 메우셨다.”(창세기 2:21) 하느님께서는 남자가 잠을 자는 동안에 여자를 만드시는데 여기에서 남자와 여자는 각각 망덕과 신덕을 상징한다. ‘깨움은 하느님의 생명이 사람에게 드러나는 일이니, 곧 애덕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육신의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을 준다. 만일 라자로가 죽기 전에 예수가 거기에 있었다면 예수는 그의 병을 고쳐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도착하기 전에 라자로가 죽었으므로 예수는 죽은 사람을 살려야만 한다. 병든 사람을 고치는 것보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더 큰 권능이다. 예수는 육신의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진리를 만천하에 드러낼 것이다. 이번 기회에 제자들은 더 큰 믿음을 지닐 수 있게 되었으므로 예수가 없는 동안에 라자로가 죽은 것이 오히려 잘 된 것이다. ‘갑시다.’라는 말은 제자들과의 동료애를 나타낸다. 제자들도 스승을 믿음으로써 그와 똑같이 죽은 사람을 살리는 권능을 지닐 것이다.

 

도마는 인간적인 의리를 앞세워 예수를 따라 위험에 뛰어들자고 선동한다. 그는 예수라는 위대한 인물에게 충성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지만 아직 자신의 위대함을 깨닫지는 못하고 있다. ‘쌍둥이라는 별명은 의심과 믿음을 동시에 지니고 있음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도마는 유독 예수에 대한 의심을 솔직하게 드러내는데, 소박한 의심이야말로 참된 믿음으로 가는 발판이다. 사람은 의심하기 때문에, , 스스로 믿음이 부족함을 느끼기 때문에 성령을 청한다. 믿음은 맹종이 아니라 성령의 지혜이다. 도마의 발언은 예수에 대한 믿음과 의심이 교차하고 있는 마음 상태를 보여준다.

 

 

예수가 도착하였을 때에 그는 라자로가 나흘 전부터 묻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열다섯 스타디온이 못 미치는 곳이어서 많은 유대인들이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빠가 죽은 것을 위로하러 왔다. 마르타는 예수가 오고 있다는 말을 듣고 마중을 나갔지만 마리아는 집에 머물렀다. 마르타가 예수에게 말하였다. “주님, 당신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지금이라도 하느님께 청하면 그분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압니다.” 예수가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의 오빠는 생명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그녀가 말하였다. “나도 그가 마지막 날에 생명으로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예수가 그녀에게 말하였다. “나는 부활이며 생명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들은 죽더라도 살 것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이것을 믿습니까?” 그녀가 대답하였다. “, 주님! 나는 당신이 세상에 오기로 된 메시아이며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압니다.”

 

나흘 전에서 오늘까지는 5일에 해당한다. 5는 육신을 상징하는 숫자로서 몸이 완전히 죽었음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다. 열다섯 스타디온 은 약 3km 정도 되는 거리이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예수의 친구가 죽은 것을 애도하러 왔으므로 대체로 예수에 대하여 호의적이라고 볼 수 있다. 활동적인 성격의 마르타는 예수를 마중 나가고 마리아는 죽음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느라 집에 머물러 있다. 두 사람은 각각 망덕과 신덕을 상징하는 행동을 보여준다. ‘은 자아의 내면을 상징한다.

 

마르타는 예수가 죽을병에 걸린 사람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믿지만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다. ‘지금이라도는 그녀가 아직 절망하지 않고 있음을 드러낸다. 아마 예수가 하느님께 라자로를 특별히 잘 보아달라고 청하기를 기대하는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하느님께서 어떤 특별한 사람의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예수는 라자로가 믿음을 지니고 죽었으므로 영적으로 살아 있음을 알고 있다. ‘생명으로 일어날 것이라는 미래형은 예수가 라자로의 육신을 되살리는 사건과 라자로가 영적 생명으로 이미 부활한 사건을 동시에 가리키는 표현이다. 육신을 되살리는 기적은 영적 부활의 표징에 지나지 않는다.

 

마르타가 말한 마지막 날, 유대인들이 흔히 상상하는바, 하느님께서 언젠가 모든 민족을 심판하시는 날을 의중에 두고 있는 표현이다. 성서에는 심판의 날에 대한 구절들이 많다. 예를 들어,

 

악인은 의인을 노려보며 그를 죽이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적의 손에 넘겨주지 않으시고

심판 때에 그를 벌주지도 않으시리라.(시편 37:32-33)

 

이러한 문투는 악인이 스스로를 심판하고 있음을 표현하는 관용적 수법이다. 하느님께서는 그 누구도 심판하지 않으신다. 예수는 마르타의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아 부활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사건임을 강조한다. 육정의 껍데기가 죽고 나서 부활한 는 죽지 않는 생명이다. ‘부활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가는 사건이다. 헛된 욕망으로 이루어진 거짓 생명은 죽고 의 참된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두려움 없이 육정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로 인하여 부활한다. 그는 죽더라도 산다.’ 또 부활한 사람은 예수를 믿고 끊임없이 자신을 부정하며 영적으로 쇄신함으로써 스스로 살아있음을 안다. 그러므로 살아서 믿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예수는 와 함께 일하며 를 생명으로 이끄는 주님이다.

 

마르타는 아직 예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예수를 굳게 신뢰하며 그가 이끄는 대로 따를 것을 결심한다. ‘주님’, ‘메시아’,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들은 각각 아버지와 성령과 아들에 대한 사랑, 곧 애덕과 신덕과 망덕을 드러낸다.

 

 

마르타가 이 말을 한 후 그녀는 돌아가서 남몰래 동생 마리아를 불러서 일러주었다. “선생님께서 여기에 오셨는데 너를 찾으신다.” 마리아는 이 말을 듣자 일어나 서둘러 예수를 만나러 갔다. (예수는 아직 마을에 도착하지 않고 아직 마르타가 그를 만났던 곳에 있었다.) 집에서 마리아를 위로하며 함께 머물던 사람들은 그녀가 일어나 서둘러 나가는 것을 보고 그녀를 따라갔다. 마리아는 예수가 있는 곳에 도착하여 그를 보자마자 그의 발치에 쓰러졌다. 그녀가 말하였다. “주님, 당신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는 그녀가 우는 것을 보았고 또한 그녀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우는 것도 보았다. 그는 감동을 받아 마음이 크게 북받쳤다. 그가 그들에게 물었다. “그를 어디에 묻었습니까?” 그들이 대답하였다. “와서 보십시오, 주님.” 예수는 울었다. 사람들이 말하였다. “그가 죽은 사람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보시오!” 그러나 그들 중 몇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눈 먼 사람에게 시력을 주지 않았습니까? 그런 사람이 라자로가 죽지 않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요?”

 

마르타가 마리아에게 남몰래예수의 소식을 전하는 행위는 망덕과 신덕의 내밀한 결합을 상징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자녀들을 찾으시고그분을 믿는 사람은 서둘러그분께 나아간다. 마리아가 예수를 만난 장소는 무덤과 집의 중간쯤이다. ‘-예수-무덤으로 연결되는 마리아의 동선은 망덕-신덕-죽음과 부활(애덕)’의 영적 운동에 상응한다. 마리아를 위로하던 사람들은 그녀가 서둘러 나가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인지 궁금하다. 그들은 마리아를 따라가고 있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그녀의 내적 활동에 동참하는 것은 아니다.

 

발치에 쓰러지는 행위는 자아의 완전한 포기와 예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표현한다. 마리아는 오빠가 살릴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한 아쉬움과 예수가 늦은 것에 대한 섭섭한 마음을 표현한다. 예수는 죽을병에 걸린 사람을 낫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다가 그들은 예수와 개인적인 친분까지 있다. 그런데도 예수가 늦게 왔기 때문에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울음은 슬픔의 표현이며, 슬픔은 귀중한 것을 상실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가까운 가족의 죽음은 큰 상실감을 준다. 또 그 상실감은 주위 사람들에게 전염된다. 사람은 타인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자신의 죽음이 가장 슬픈 일이다. 자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 앞에서 어쩔 줄을 모른다. 예수는 이들의 슬픔에 대하여 깊은 동정과 연민을 일으킨다. ‘어디에 묻었느냐는 예수의 물음은 그들이 겪는 슬픔의 근원을 직면하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와서 보라는 그들의 대답은 죽음을 앞두고 있는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호소하는 것이다. 슬픔의 원인은 죽음이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를 애써 피해 다니지만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이에 예수는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며 운다.’ 사람들이 우는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고 예수가 우는 것은 생명의 길을 외면하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 때문이다. 예수의 울음은 자녀를 잃고 슬퍼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낸다. 그는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예수가 라자로와 친한 친구이기 때문에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으로 오해한다. 사람은 자신의 잣대로 남을 판단한다. 그러나 사람의 잣대로 하느님의 사랑을 가늠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다. ‘몇 사람은예수의 능력이 부족함을 아쉬워한다. 소경은 예수가 우연히 만난 사람이지만 라자로는 예수의 친구이다. 그런데도 예수가 라자로를 살리지 못한 것을 보면 그의 능력이 못 미치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예수가 모든 사람의 친구이며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을 부활시키는 메시아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다.

 

 

예수는 다시 마음이 크게 북받쳐서 무덤으로 갔다. 그것은 돌로 입구를 막아 놓은 동굴이었다. 예수가 명령하였다. “그 돌을 치우시오.” 죽은 사람의 누이인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나쁜 냄새가 날 겁니다, 주님. 그는 나흘 동안이나 묻혀 있었습니다.” 예수가 그녀에게 말하였다. “당신이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돌을 치웠다. 예수는 위를 쳐다보고 말하였다. “아버지, 제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당신께서 늘 제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당신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 다음 큰 목소리로 외쳤다. “라자로, 나오시오!” 그는 손과 발이 수의에 감싸이고 얼굴은 천으로 덮인 채 밖으로 나왔다. 예수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시오.”

 

예수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동정과 연민을 느꼈으므로 마음이 크게 북받쳤다. 그는 앞장서서 죽음을 직면하고 그 허상을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 무덤으로 간다. ‘무덤은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자아를, ‘은 육정에 대한 고집스러운 집착을 상징한다. 세상 사람들은 쾌락, 재물, 명예, 권력에 탐닉하면서 죽음을 잊으려고 한다. 말하자면, 무덤을 무거운 돌로 막아서 산 자들의 세상과 죽은 자들의 세상을 갈라놓는다. 그들은 어리석게도 욕망의 활동 여부에 따라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별한다.

 

예수는 그 돌을 치우라고 명령한다. 죽음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회개하여 육정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만 한다. 영적 생명은 육신의 생사를 넘어선다. 썩은 시체에서는 나쁜 냄새가 난다. 이것이 바로 육정의 집착이 가져오는 결말, 곧 죽음이다. 사람은 죽음을 미리 두려워할 줄 알아야만 한다. 회개는 육정을 거스르므로 당장에는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 그러나 영적 죽음은 시체의 냄새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더 고약하다. ‘나흘 동안이라는 표현은 마르타가 아직 육정의 시각에 머물러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나흘은 날 수로 5일에 해당하며, 5는 육정을 상징하는 수) 예수는 그녀에게 믿음을 촉구한다. 그녀는 예수가 말하는 하느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예수를 믿고 기다린다. 사람들은 예수의 명령에 따라 돌을 치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생명과 죽음을 그들과는 다르게 판단하신다.

 

를 쳐다본 것은 예수가 하느님과 소통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행위이다. 사람은 맑고 고요한 마음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과 소통한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청을 들어주신다. 아들은 늘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대로 일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사람들이 듣는 가운데 이 말을 함으로써 그가 하는 일이 아버지의 권능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로써 예수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하느님이 아닌 다른 어떤 존재도 썩어서 냄새나는 시체를 되살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큰 목소리는 하느님의 입에서 온 세상으로 울려 퍼지는 사랑의 음성이다. ‘나오시오!’는 육정의 집착에서 해방되었음을 알려주는 깨달음을 상징한다. 이 순간 죽음의 공포가 사라진다. 예수는 죽음의 공포를 없애는 주님이다. ‘예수하느님께서 구원하시다’, ‘라자로하느님께서 도우시다라는 뜻이다. 하느님의 권능(은총)과 사람의 회개가 결합하여 죽음을 이기는 영원한 생명을 낳는다. ‘손과 발은 겸손과 절제, ‘얼굴은 참된 자아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수의는 욕정(재물)과 욕망(명예), ‘얼굴을 덮은 천은 죽음에 대한 공포이다. 이것들은 사람의 자유로운 본성을 억압하여 개성이 사라진 양적인 존재로 전락시킨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자신을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 사람은 육정의 집착에서 풀려나야만 비로소 자유로운 개성을 지닌 참된 자아를 찾아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게 된다.

 

예수가 사람들에게 라자로를 풀어주어 가게한 것은 그들이 남을 도움으로써 자신의 능력에 자신감을 갖도록 하려는 것이다. 내가 남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면 능히 나 자신도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그들 개개인도 수의와 천을 벗어버린 참된 로 부활해야만 할 것이다. 라자로의 육신이 부활한 것보다 그가 영적으로 살아있다는 것이 훨씬 더 큰 사건이다. 예수는 보이는 기적을 통하여 사람들을 보이지 않는 기적, 곧 영적인 부활로 초대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끊임없이 이 기적을 일으킨다.

 

 

마리아를 방문하였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한 일을 보고 그를 믿었다. 그러나 그들 중 몇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돌아가서 예수가 한 일을 그들에게 일러바쳤다.

 

예수는 썩은 냄새가 나는 시체를 살려내는 엄청난 기적을 일으켰는데 사람들은 이에 대하여 지극히 상반된 반응을 보인다. 예수를 믿은사람들은 예수의 능력을 믿은 것이고 아직 자신이 영적으로 부활할 능력이 있음을 믿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믿고 참된 믿음의 여정을 시작할 것이다. 그런데 다른 몇 사람은 예수를 지도자들에게 고발한다. 그들은 예수의 기적을 스스로 판단할 수가 없어서 지도자들의 권위에 의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지혜로운 스승도 를 대신해서 하느님을 알아볼 수는 없다. 하느님께서는 늘 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자아를 상실한 사람은 자신을 믿지 않고 다른 사람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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