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강론자료

2016-07-24.....연중 제17주일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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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6-07-23 ㅣ No.2111

 

연중 제17주일 (다해)

창세기 18,20-32         콜로사이 2,12-14       루카 11,1-13

2016. 7. 24. 이태원.

주제 : 세상의 구원을 위한 나의 역할

사람에게는 누구나 꿈이 있습니다. 꿈이라는 말의 뜻은 공동체를 대하면서 아직 현실로 바뀌지 않은 바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여러분은 삶에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으로, 어떤 꿈을 생각하고 삽니까?

 

마므레의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에 살던 아브라함에게, 하느님의 천사가 찾아왔습니다. 지난주일 독서에서 우리가 들은 얘기입니다. 그렇게 찾아온 손님을 잘 대접한 아브라함은 세상을 대하시는 하느님께서 세우신 계획에 대한 한 가지 내용을 알게 됩니다. 사람의 행동들이 모여서 멸망의 도시가 돼 있던 운명이었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예정계획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계획을 알게 되면 어떻게 움직여야 하겠습니까?

 

사람이 하느님의 계획을 알게 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런 사람의 하나가 된 것은 그가 바랐기에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이었습니다. 선택이 하느님에게 있다는 것은 행동의 모습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긍정적인 질문은 아닙니다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얼마나 더 오랫동안 이 모습대로 계속될까요? 사실 저도 대답은 모릅니다. 대답을 모른다고 해서, 아직은 괜찮다(!)고 말할 이 세상의 삶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렇게 하는 질문과 대답에 따라서 우리의 행동방식이 달라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15년이 넘는 시간 전에 20세기말의 위협을 얘기하던 때가 있었고, 25년이 넘는 시간 전에 휴거를 얘기하면서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보다 더 오랜 시간 전에도 그와 비슷한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때마다 어김없이 세상의 종말이나 요한묵시록의 환시가 우리 삶에 실현된다는 어지럽고도 대하기가 두려운 얘기도 있었습니다. 그런 소리들 때문에 사람들의 삶이 조금씩은 변했겠지만, 세상에는 아직도 위태로운 그대로 남아있고, 우리는 그 상황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천사와 얘기를 나눴고,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만, 천사와 대화를 나눈 아브라함이 한 일은 멸망할 운명에 처해있던 소돔과 고모라가 구원되도록 바꾼 일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알게 되는 지식으로 하느님의 계획에서 무엇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안다고 한들 하느님의 계획을 바꿀 수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소리를 사람이 하는 행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포기하라는 소리로 들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한 도시가 살아남는데, 의인이 50명이나 45, 40명이나 30, 20명이나 10명쯤 필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독서에는 몇 명이나 되는 의인이 있어야 도시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지 나오지 않습니다만, 오늘 얘기를 통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세상의 모습이 이뤄지는 일에 나는 얼마나 협조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인류를 창조하시고, 그 인류가 세상에서 당신의 뜻을 따르기를 원하셨을 하느님께서 세상을 향해서 견딜 수 있는 임계<(臨界>점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바라시는 것과 사람의 행동을 서로 비교하다면, 내가 가진 것은 내가 마련한 것이니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할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 하고, 하느님의 자비가 세상에 실현되는 일에 내가 협조할 일은 아무 것도 없지만 누군가가 좋은 세상을 만든다면 나는 그 세상에서 즐기며 살 생각은 있다는 모습을 보이곤 합니다. 세상의 구원은 다른 사람이 만들고 나는 그저 누리기만 해도 좋은 것이 아니라, 나의 협조가 있어야 하고, 나의 도움으로 만들어지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한참이나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알려주시는 주님의 기도를 들었습니다. 이 기도는 우리가 세상을 대해야 하는 기본자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우리가 기도만 많이 말하면,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아도 좋다고 여기지는 않을까요? 주님의 기도는 가장 완벽한 기도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 기도가 세상에 실현되어야 할 하느님의 뜻을 가장 완벽하게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알려주신 것을 내가 받아들이는 자세는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바라시는 것은 세상이 구원으로 가는 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는 참여이지, 남들만 하고 나는 구경해도 좋은 무임승차는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사는 세상에 하느님의 구원이 실현되는 데에 내가 협조할 수 있는 삶의 모양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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