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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 공소 이야기: 안동교구 쌍호공소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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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5-20 ㅣ No.1160

[공소 이야기] 세 번째 - 안동교구 쌍호공소를 가다


200년 이어온 신앙, 농민운동과 생명농업 원동력 되다

 

 

공소예절을 바치고 있는 쌍호공소 신자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경북 예천, 안동과 인접한 의성군 한쪽 끝자락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 쌍호리. 이곳에 일찌감치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박해시대부터 지금까지 200년 넘게 이어온 유서 깊은 신앙공동체가 있다. 

 

안동교구 안계본당 쌍호공소다. 

 

세 번째 ‘공소이야기’ 장소로 이곳을 찾았다. 쌍호공소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처럼 튼튼히 뿌리내리며, 시대 변화에 따라 그에 부응하는 가톨릭 정신을 세상 속에서 몸소 실천하며 신앙을 이어오고 있다.

 

 

박해시대부터 이어온 신앙

 

쌍호공소가 설립된 것은 1891년경이지만 이곳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그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간다. 1801년 신유박해 때 강성철이 의성지방에 귀양 와서 죽었다는 「사학징의」 기록과, 4대 공소회장을 지낸 박근하(요한)씨의 7대조 박수광(1770∼1837)이 당시 박해를 피해 쌍호리로 와서 살았다는 증언 등에 근거해 이곳이 200년이 넘는 교우촌의 전통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러 교우촌이 그랬듯, 이곳 쌍호에서도 신자들이 옹기를 구우며 살았다고 한다.

 

올해 5월 5일 공소예절을 바치고 있는 신자들의 모습에서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는 믿음을 볼 수 있다.

 

 

“예전엔 여기를 점마(점마을)라고 불렀어. 옹기점이 있었거든. 박해 때 신자들이 숨어 들어와서 옹기를 구우며 살았다고.”

 

박해시대 교우촌 신앙을 이어받은 쌍호공소는 그만큼 신앙열정도 대단했다. 한 어르신은 “옛날엔 일 년에 두 차례, 판공 때만 신부님을 뵐 수 있었다”며 “대축일이 되면 산 넘고 물 건너 25리가 넘는 길을 걸어서 본당미사에 참례했다”고 전했다.

 

쌍호공소는 유구한 신앙의 역사만큼이나 성직자와 수도자도 많이 배출했다. 안동교구장 권혁주 주교를 비롯해 조종율·정희욱·권혁시·김종필 신부 등 14명의 성직자와 15명의 수도자가 쌍호공소 출신이다. 이에 쌍호공소는 지난 2003년 8월 신앙전래 200년을 기념하면서 ‘뿌리찾기운동’을 펼쳐 「쌍호공소 200년 신앙의 뿌리」를 출판하고, 신앙고백비를 세웠다.

 

공소 출신인 조상래 신부(안동교구 예천본당 주임)는 「쌍호공소 200년 신앙의 뿌리」에서 “아침에 눈을 뜨면 의례히 조과를 바쳤고 저녁을 먹으면 밥상을 물리고 저녁기도와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이 몸에 배인 생활이었다”면서 “주일이면 공소에서 어른들과 공소예절을 바치고, 묵주기도를 드리며, 사순에는 성로신공을 바치며 첨례를 드려야 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1985년 7월 정부의 무분별한 외국산 소 수입에 따른 소 값 폭락 피해보상을 요구하며 ‘소몰이 시위’에 나서는 농민들. 출처 「쌍호공소 200년 신앙의 뿌리」.

 

 

농민들의 권익을 위해

 

견고하게 이어온 신앙은 공소 공동체의 삶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마을 자체가 신앙으로 인해 형성된 만큼, 신앙 문제뿐만 아니라 생계를 비롯한 마을의 모든 문제를 함께 풀어나갔다. 신앙과 삶이 따로 있지 않았던 쌍호공소 공동체는 1970~1980년대 열악했던 농민들의 삶을 지켜내기 위해 앞장섰던 산 증인들이다. 

 

1978년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이하 안동가농)가 설립되고 그 이듬해인 1979년에 설립된 쌍호분회는 농민들의 생존과 권익을 위한 활동에 적극 뛰어들었다. 그 중에서도 1979년 발생한 일명 ‘오원춘 사건’과 1985년 무분별한 외국산 소 수입으로 소 값이 폭락해 벌인 ‘소몰이 시위’는 유명한 일화다.

 

안동가농 창립 당시 이사 중 한 명이었던 최재호(마르티노)씨는 오원춘 사건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정부에 시위하기 위해서 불교, 개신교 청년회 등 다른 단체들과 함께 안동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막상 가보니 우리(안동가농)만 나가고 아무도 없었어.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데서는 최루탄이 날아오고 하니 출발도 못하고 그대로 흩어졌더라고. 우리는 신부님과 수녀님들이 앞서고, 붙잡혀 가지 않으려고 대나무 하나를 4명이서 꼭 잡고 걸어갔지. 그랬던 것을 신문 보도에서는 죽창을 들고 나왔다고 하고 그랬지.”

 

다른 어르신이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그때 우리가 빨갱이 소리를 많이 들었지. 지금도 우리는 빨갱이 소리 듣는다카이.”

 

안동가농 쌍호분회 진상국(시리노) 분회장은 당시 신앙이 없었다면 아마 계속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우예 했는지 모르겠어, 그런 운동을. 교회라는 울타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어.”

 

2010년 쌍호공소에서 생태농활체험을 하고 있는 대학생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생명을 지키는 공동체

 

열악했던 시기 농민운동이라는 형태로 세상에서 신앙을 증거해 온 쌍호공소는 신자 수가 줄면서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1990년 ‘생명공동체’를 결성하면서 새 활력을 찾았다. 생명공동체는 유기농법을 실천하며 농민 살리기 운동과 환경 보존운동, 우리 농산물 직거래를 통한 생산자와 소비자 보호 운동에 적극 나섰다. 

 

생명농업으로 방향을 바꿀 당시 여러 분회들이 흔들리거나 없어지기도 했지만 쌍호분회는 탄탄하게 지속됐다. 여기에도 밑바탕에 깔려있는 뿌리 깊은 신앙이 큰 역할을 했다. 진상국 쌍호분회장은 “이곳 쌍호공동체는 설립 때부터 지금까지 한 차례도 빠짐없이 월례회의를 진행해 오면서 해야 할 일들을 함께 고민했다”며 “어떤 고난이 있어도 믿음 속에서 활동하면서 용기를 갖고 이어올 수 있었다”고 밝혔다.

 

쌍호분회는 서울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 목동본당 등과 결연을 맺고 직거래를 하면서 도시와 농촌이 함께 살아가기 위한 노력을 펼치고 있다. 직접 만들어 쓰는 공동퇴비와 송아지 입식도 대표적이다. 현재 쌍호분회 여섯 농가에서 대농이 아닌 ‘소농다품종’ 방식으로 양파·마늘·벼농사 등을 지으며 하느님이 주신 이 땅에서 먹거리를 만들어 오염되지 않은 식탁을 책임지고 있다. 도시 소비자들은 지속가능한 농업을 할 수 있도록 이를 뒷받침해주는 관계를 맺고 있다. 

 

신앙을 중심으로 결속된 서로에 대한 믿음과 하느님의 창조질서 보전이라는 가치는 쌍호공소가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이끌고 있다. 시대의 요청에 응답하며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신앙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쌍호공소 신자들에게서 참다운 신앙 공동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시편 1,2-3)

 

[가톨릭신문, 2019년 5월 19일, 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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