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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반예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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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0-22 ㅣ No.960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반예문 신부 (상)


가톨릭 접목한 대중문화… 매스컴 활용해 알린 사제

 

 

반예문 신부(1927~2015).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푸른 하늘 꿈꿉니다 / 파란 바다 꿈꿉니다 / 맑은 샘물 마시며 / 푸른 꿈을 안고서 / 깨끗한 곳에서 살고 싶어요 … 우리 함께 손잡고 / 우리 함께 노래해요 / 기쁜 노래 부르며 / 메아리도 들으며 / 평화로운 곳에서 / 살고 싶어요

- ‘내가 살고 싶은 곳’, 반예문 작사 · 작곡

 

1973년 제1회 대한민국방송가요대상 여자가수부문상을 수상했었던 가수 김상희씨가 불러 더욱 잘 알려진 곡으로 어린이 성가집에도 실렸었다. 반예문 신부(메리놀외방선교회, Raymond F. Sullivan, 1927~2015)는 “어른 중엔 나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고, 돈밖에 모르니 어른이 되기 싫다”는 어린이들의 설문조사 결과를 보고, 어린이들의 꿈과 소망을 담은 노래를 작사·작곡했다. 노랫말이 어린이를 위해 지은 동요 같지만, 사실 처음엔 어른들에게 띄우는 노래로 만들었다고 했다. 오염되지 않은 곳에서 살고 싶어 하는 어린이들의 소망을 어른들에게 노래로 전해주려 한 것이었다.

 

반예문 신부는 장애인 교육사업과 다양한 사회봉사 사업 등에 헌신했던 선교사제였다. 또한 그는 가톨릭매스컴 분야에서 두드러지는 활동 모습을 보이며 투신했었다. 대중가요를 작사·작곡한 보기 드문 이력을 갖고 있었고, 한국의 유명 대중가요를 영어로 번역해 음반도 냈다. 틈틈이 지은 노래들을 모아 만든 음반의 수익금은 ‘사랑의 보청기 보내기 운동’을 비롯해 장애인들의 재활을 위해 썼다.

 

그가 작사 · 작곡해 가수 이광조씨가 부른 노래 ‘한국의 마돈나’는 1978년 MBC 서울국제가요제에서 선보이기도 했다. 동지섣달 피난길에 한 어머니가 길가에서 얼어 죽었는데, 자신의 옷을 모두 벗어 갓난아기를 꼭 감싸 품고 있어 아기만 살았다는 실화를 배경으로 한 노래였다. 그 아기는 선교사가 키웠고, 12살이 되었을 때 엄마의 희생적인 사랑 이야기를 전해들은 아이는 꽃을 한 아름 안고 엄마의 묘지를 찾아가 한없이 울었다는 이야기가 영문 잡지에 실린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아 만들었다. 가수 최희준씨가 부른 ‘아버지’라는 노래는 가정을 다복하게 이끌어주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지은 노래였다. 또 그가 작사·작곡에 나선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Christ, Our Peace)는 1989년 서울에서 열린 제44차 세계성체대회 영어 테마송으로 불렸다. 이러한 활동 덕분에 반예문 신부는 교회 안에서는 물론 일반 사회에서도 ‘가요 신부’, ‘노래하는 신부’ 등으로 잘 알려지기도 했다. 특히 그는 ‘가톨릭 가요 대상’을 제정하는 등 가톨릭과 대중문화의 접목을 시도하면서 건전한 문화 향상에 큰 힘을 기울인 사제였다.

 

 

하버드 졸업 후 메리놀회 입회

 

반예문 신부는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하버드대 수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좋은 나라, 좋은 도시, 좋은 가정에서 태어났고, 좋은 부모,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라면서 감사했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은총을 나누면서 가난한 나라에서 봉사하기 위해 메리놀회에 입회했다. 구체적으로 사제가 되고자 결심한 것은 대학시절이었지만 이미 어린 시절부터 가톨릭계 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수도자들의 좋은 표양을 마음 깊이 새겨왔었다고 했다. 고등학생 시절 성소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하느님을 위해 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이어서 젊은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미래에 무엇을 하겠다는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었다. 반 신부는 잘 아는 수도자, 사제들과 상의를 하고 고민하다 메리놀회 입회를 결심했다고 했다.

 

그는 미국 메리놀 신학대학을 졸업한 후 1954년 사제품을 받았다. 당시 동창 사제가 모두 40명이었는데, 각각 남미와 아프리카, 아시아 중에서는 일본, 대만, 필리핀, 한국에 파견됐다. 당시 한국에는 반 신부를 포함해 4명의 사제가 파견됐다.

 

2004년 금경축을 맞은 반예문 신부가 청주 내덕동 주교좌 성당에서 안젤루스 도미니 단원들과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반 신부는 이듬해 한국에 들어와 충주 아현(현 교현동)본당 보좌, 보은·청주 북문로(현 서운동) · 청주 내덕동본당 주임으로 사목을 했다. 동시에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과 장애인들을 위한 재활시설 등의 운영에도 헌신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자기 나라가 아닌 외국에 가서 사는 것은 쉬운 일만은 아니다. 걱정거리 중에는 그 나라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것도 포함돼 있다. 반예문 신부도 처음엔 그런 마음을 안고 한국에 들어왔지만, 청주교구에서 사목을 하면서 신자들이 ‘우리 신부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공동체 안에 자신을 받아들였다는 생각에 더욱 기뻐했다고 했다. 가끔 말도 잘 못하고 풍속 등도 모르는 게 많았지만 신자들은 그 자체로 인정해주고 따뜻하게 감싸 안아줬다는 것이다. 특히 반 신부는 청주교구에서 사목활동을 하면서 당시 라디오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를 유심히 살폈다. 전깃불조차 없던 마을 전체에 동네 스피커를 통해 들을 수 있는 음악이나 정보 등은 주민들의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반 신부는 라디오는 홍보, 계몽, 선도 등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 착안해 매스컴의 중요성을 다시금 인식하게 됐다. 그래서 반 신부는 당시 지부장 사제와 의논해 본당 사목을 그만두고 1971년 초부터 서울에 와서 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다. 아울러 반 신부는 외국의 매스컴 활동 관계자들과도 활발히 교류하면서, 본인부터 좀 더 깊이 있게 공부해야겠다는 필요성을 절감하고 1975~1977에는 미국으로 유학해 커뮤니케이션 석사 학위도 받았다. 보다 전문적인 역량을 갖추고 구체적인 활동에 나서기 위한 노력의 하나였다.

 

* 함제도 신부(메리놀회 한국지부장) - 1960년 한국으로 파견, 인천교구장 비서 겸 인천교구 관리국장과 청주대 영문과 교수, 청주교구 총대리 등을 역임했다. 현재 메리놀외방선교회 한국지부 지부장이자 메리놀 아시아 지역 총괄 부책임자로 사목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6년 10월 23일, 함제도 신부(메리놀회 한국지부장)]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반예문 신부 (하)

 

성직자 미디어 교육 주도하며 복음 선포에 매스컴 활용

 

 

- 1997년 반예문 신부가 제31회 가수의 날을 맞아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 위원장 김광진씨로부터 ‘특별공로상’을 받고 인사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미디어 교육과 인식 개선에 적극 나서

 

미디어를 통한 복음 선포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절감한 반예문 신부는 1971년부터 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 총무로서 13년간 헌신했었다.

 

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는 1967년에 매스컴 분야에서의 가톨릭 활동을 증진하는 등의 목적으로 설립됐다. 미디어를 활용한 사목 현황과 전망을 연구하고, 미디어 교육을 제공하고, 가톨릭 정신에 입각한 다양한 대중매체 콘텐츠를 발굴하는 구심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반 신부는 당시만 해도 여전히 기틀과 활동 인프라 등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던 매스컴위원회의 총무를 자발적으로 맡아, 인력도 예산도 인식도 부족한 가톨릭 매스컴 관련 활동의 디딤돌을 놓는 데 그 누구보다 열심히 힘썼다. 반 신부는 매스컴 관련 분야에서 역량을 펼칠 그리스도인 인재 양성과 기본적인 미디어 교육의 중요성을 늘 강조해왔지만, 당시엔 주교회의 지원금만으로는 위원회를 운영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메리놀회의 지원과 개인 기금 등으로 운영비를 충당하곤 했다. 게다가 해마다 영세자 수나 첫 영성체자 수 등을 헤아릴 수 있는 본당 사목 등에 비해 매스컴 관련 사목 활동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왜 하는 것인지 이해를 잘 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아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반 신부는 “어둠을 탓하기보다 한 자루의 촛불을 켜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으로, 먼저 자발적으로 나서 미디어를 통해 복음을 선포하는 데 꾸준히 힘을 실었다.

 

반 신부는 신자들도 대부분 주일미사 강론을 듣는 것 정도 외에는 일반 신문, 잡지, TV 등의 매체를 통해 세속적이고 반복음적인 가치를 주장하는 메시지를 매우 많이 듣는다고 지적하고 미디어 교육이 꼭 필요하다는 주장을 늘 해왔었다. 하지만 복음 선교의 일차적 직무를 지고 있는 사제 등 교회 지도자들조차 미디어 관련 소양이 부족한 현실을 보고, 매스 미디어에 대한 기본적인 교육과 활용 방안을 가르치는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데에도 힘썼다. 

 

1972년 한국 주교단을 위해 서강대에서 매스컴 워크숍을 연 것은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후 교구 사제 등을 중심으로 해마다 워크숍을 마련한 결과, 글을 쓰거나 지방 방송국 프로그램 등에 참가하는 사제들도 많아졌다고 한다. ‘가톨릭 저널리스트 클럽’(현 가톨릭언론인협의회) 등의 회원들을 위한 피정 등도 다양하게 기획하고 지원했다. 아울러 시골마을에 울려 퍼지는 스피커 소리가 개개인의 삶과 생각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경험했던 반 신부는, 당시 대표적인 지상파 방송을 통해 ‘5분 명상 프로그램’도 기획, 방송을 내보냈다. 교회의 이름으로 청취자들에게 수준 높은 5분 명상 자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가톨릭가요대상 제정해 대중가요 더욱 격려

 

반예문 신부가 매스컴위원회 총무로 활동하면서 헌신, 봉사한 또 다른 부분은 한국 대중가요의 가치를 지키고 활성화하는 것이었다. 특히 반예문 신부는 ‘가톨릭가요대상’ 제정에 발 벗고 나섰다. 

 

1970년대는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소하고 무관한 이유로 수많은 가요들이 금지곡으로 지정되던 암울한 유신독재를 겪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가톨릭가요대상’은 매스컴위원회가 제정했지만, 교회가 좋은 가요를 만드는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 마련한 상이라고 알려지면서, 일반인들의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인기를 얻었던 상이었다. 또 당시 활동에 제약을 많이 받았던 많은 가수들은 반 신부의 그늘로 찾아들었다. 

 

‘가톨릭가요대상’은 반예문 신부의 누이동생이 한국을 방문해 매스컴 발전을 위해 써 달라고 매스컴위에 기금을 전달하면서 구체적으로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반 신부는 당시 ‘가톨릭가요대상’을 취재하러 온 기자들에게도 “일반 대중, 특히 젊은이들에게 가요가 미치는 영향이 막대하기 때문에 좋은 노래를 만들어 주십사 하는 의미로 이 상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또 매스컴위원회가 선정한 노래가 다른 지상파 방송국에서 뽑은 노래보다 더 좋은 작품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 더 좋은 노래들이 많이 나오길 바라는 염원에서 만든 상이라고 덧붙였다.

 

“현대 가요는 우리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 교회는 대중음악에 깊은 관심을 갖고 건전한 음악으로 육성시킬 책임을 통감한다. 가요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과 참다운 가치관을 심어 주고 있는 창작자들을 격려함으로써 보다 나은 세상을 건설하는 데 이바지하고자 이 상을 제정한다.” 

 

1981년 6월 20일, 이러한 목적을 기치로 내세우고 드디어 ‘가톨릭가요대상’이 제정됐다. 이듬해 열린 ‘가톨릭가요대상’ 제1회 시상식에서는 ‘가나다라’를 작사한 송창식씨와 ‘옛 시인의 노래’를 작곡한 이현섭씨가 이 상을 받았다. ‘가톨릭가요대상’은 한 해 동안 대중들의 인기를 얻은 노래 중에서 가사와 음률이 아름답고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메시지로 전해준 곡으로 선정했다.

 

김수환 추기경도 첫 회 시상식에서 가사와 곡이 우리 사회를 보다 풍요롭게 해주길 기원한다면서 삭막한 세상에서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노래가 필요한 때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반예문 신부는 한국의 대중가요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활성화하는 데 힘이 되어 줬을 뿐 아니라, 좋은 곡을 영어로 번역해 외국에 널리 알리는 등의 활동을 한 공로로 1997년 한국 대중가요협회로부터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반예문’. 존경하는 동료 신부의 성과 어느 주교가 레이몬드라는 본명에서 힌트를 얻어 지어 준 이름이다. 반 신부는 2000년까지 살게 된다면 처음 만났던 이들이 모두 어른이 된다면서, 그들 모두가 씩씩하고 훌륭하게 자란 모습을 보고 싶다는 바람을 품고 살았었다. 이후 2004년 사제서품 금경축을 맞아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신자들과 함께 환하게 웃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당시 금경축을 맞아 반예문 신부가 밝혔던 소감은 긴 여운을 남긴다.

 

“한국에서 생활한 시간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을 상을 다 받은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 함제도 신부(Gerard E. Hammond, 메리놀회 한국지부장) - 1960년 한국으로 파견돼 청주교구 초대교구장인 파야고보 주교 비서 겸 관리국장, 청주대 영문과 교수, 청주교구 총대리 등을 역임한 바 있다. 현재 메리놀외방선교회 한국지부 지부장이자 메리놀 아시아 지역 총괄 부책임자로 사목중이다. [가톨릭신문, 2016년 10월 30일, 함제도 신부(메리놀회 한국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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