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6일 (화)
(백) 부활 제3주간 화요일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교의신학ㅣ교부학

[교부] 교부들의 사회교리43: 자비와 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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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11-05 ㅣ No.562

[교부들의 사회교리] (43) 자비와 자선


하느님처럼 측은지심으로 베풀어야

 

 

“형제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행하는 모든 선행은 자비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예컨대 그대가 굶주린 이에게 빵을 줄 때 마음으로부터 자비를 베푸십시오. 경멸하는 마음으로 하지도 말고, 그대를 닮은 인간을 개 다루듯 하지 마십시오. 자비를 베풀어 빵을 나누어 줄 때에는 굶주린 이의 배고픔을 아파하십시오. 마실 것을 줄 때에는 목마른 이의 갈증을 아파하십시오. 입을 것을 줄 때에는 헐벗은 이의 고통을 아파하십시오. 그대가 길손을 맞아들일 때에는 떠돌이의 고통을 아파하십시오. 그대가 환자를 방문할 때에는 앓는 이의 고통을 아파하십시오. 그대가 세상을 떠난 이를 묻어줄 때에는 죽은 사람을 위해 아파하십시오. 그대가 다투는 이들을 화해시킬 때 싸움꾼을 위해 아파하십시오.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면 이런 모든 일을 마음의 고통 없이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하는 선행입니다.”(아우구스티누스, 「설교」 358/A,1)

 

 

아프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자비’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설은 명쾌하고 탁월하다. “자비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타인의 비참을 마음으로 아파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비는 비참한 사람의 고통에 관한 말입니다. 자비(misericordia)라는 라틴어 단어에는 비참(miseria)이라는 말과 마음(cor)이라는 말이 둘 다 나옵니다. 타인의 비참에 그대의 마음이 아프고 미어지는 것, 그것을 자비라 일컫습니다.”(「설교」 358/A,1)

 

자비로운 사람은 비참한 이들과 함께 아파하고 함께 고통을 겪는다. 남이 굶주리고 목말라하면 나도 애가 타고, 타인이 헐벗은 채 떨고 있으면 내 마음도 시린 것이 자비다. 타인이 고통에 몸부림칠 때 내 가슴도 무너져 내리고, 타인이 서럽게 울고 있으면 나도 함께 울어주는 것이 자비라는 것이다. 아프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고, 고통 없는 자비는 자비가 아니다. 다른 사람의 비참 앞에서도 나 홀로 행복하고, 괴로워 울부짖는 사람 앞에서도 아무렇지 않다면 인간성을 잃어버린 자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잘라 말한다.(「신국론」 19,7)

 

 

자비심이 동반되어야 하는 자선

 

그러나 자비의 원천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울부짖는 인간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고통받는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마음이 미어지신다. 비참한 이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측은지심을 지니고 계신 그분의 이름은 ‘자비로운’(misericors)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워지는 것, 이것은 예수님의 명령이며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자비의 사회적 특성을 꿰뚫어 본 아우구스티누스는 ‘자비’(misericordia)와 ‘자선’(eleemosyna)은 동의어라고 강조한다.(「설교」 207,1)

 

그러므로 자선은 돈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심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착취와 폭리의 열매는 자선기금으로 받지 않았다. 이 시대의 교부 프란치스코 교황도 이렇게 외친다. “그것은 착취당하고 학대받고 노예가 된 수많은 이들과 열악한 임금을 받은 노동자들이 흘린 피의 열매입니다. 제발, 그대의 수표를 들고 가서 태워 버리세요. 하느님 백성인 교회에 더러운 돈은 필요치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2016년 3월 2일 수요 일반 알현 교리교육)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11월 3일, 최원오(빈첸시오, 대구가톨릭대 유스티노자유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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