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7일 (수)
(백)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가톨릭 교리

프란치스코 교황의 십계명 교리: 간음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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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10-26 ㅣ No.2062

십계명에 관한 교리 : “간음하지 마라”


“단순히 이익 때문에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 일반알현 교리 교육의 주제는 십계명의 여섯 번째 계명인 “간음하지 마라”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의, 혼인 생활 안에서의 충실성에 대한 중요성과 (혼인에 대한) 적절한 준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십계명에 관한 우리의 교리 교육 여정은 (인간의) 정서적, 성적 차원에 관한 여섯 번째 말씀인 “간음하지 마라”에 이르렀습니다.

즉각적으로 주의를 요하는 것은 바로 충실함(fedeltà)입니다. 실제로, 충실함과 정직함 없이는 진정한 인간 관계란 없습니다.

 

단지 “이익이 되기” 때문에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줄 때, 자신의 이익의 문턱 너머에서 드러납니다. 이에 대해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랑은 본래 결정적인 것이어야 한다. 사랑은 ‘다른 새 결합을 내릴 때까지만’이라는 한정적인 것일 수는 없다”(1664항). 충실함은 자유롭고 성숙하며 책임 있는 인간 관계의 특징입니다. 한 친구가 참되다는 것은 그가 그 어떤 경우에도 신의를 지키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친구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사랑을 보여주시며, 하느님 아버지의 끝없는 사랑을 사시는 분이십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실수할 때 조차도 우리를 받아 주시고, 우리가 자격이 없을 때에도 항상 우리의 선을 원하시는, 충실한 친구이십니다.

 

인간은 조건없이 사랑 받아야 합니다. 이러한 환대를 받지 못한 사람은, 종종 이 사실을 모른 채, 자신 안에 하나의 불완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사랑이 단지 막연한 맛만 가지고 있다는 타협과 우유부단함을 받아들이면서, 이 공허함을 다른 것들로 채우려고 합니다. 위험은, 많은 경우에 단지 반사되는 어떤 것 안에서 삶의 빛을 찾을 수 있다는 착각을 가지고, 미숙하고 미성숙한 관계를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를 들자면, 육체적인 매력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선물이며 다른 사람과의 진실하고 충실한 관계를 위한 길을 준비하는데 목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과대평가하는 일이 생깁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인간은 “자기 마음의 충동들을 식별함이 맺는 단계적 열매인”, “충만하고 성숙한 인간 관계의 자발성을 향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인내력과 일관성을 가지고 몸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배워야 하는” 순간부터 얻을 수 있는 그 무엇입니다(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일반알현 교리교육, 1980.11.12.).

 

그러므로, 혼인 생활로의 부르심은 관계의 질에 대한 신중한 식별과 그것을 확인하기 위한 약혼 기간을 필요로 합니다. 혼인 성사를 하기 위해 약혼자들은 그들의 관계 안에, 그들을 이끄시고 동행하시며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항상 당신에게 충실할 것을 약속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하느님의 손이 있다는 확신을 성숙시켜야 합니다. 그들은 “기쁨과 고통, 건강과 질병 중에” 그리고 삶의 매 순간 단순히 “잘 돌아 가고 있다”는 선의나 희망에 기초하여,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에만 충실성을 약속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충실한 사랑의 견고한 기반 위에 서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혼인 성사를 받기 전에는 신중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저는 그 준비를 ‘예비자 기간’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전체 삶이 사랑 안에서 영향을 받기 때문이며, 사랑은 농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당에서 행하는 서너 번의 강의가 “혼인 준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준비가 아닙니다. 그것은 가짜 준비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는 사람의 책임은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는 주임 신부나 주교의 몫입니다. 준비는 잘되어 있어야 합니다. 충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혼인은) 형식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성사입니다. 진정한 ‘예비 기간’ 동안 준비해야 합니다.

 

사실, 충실성은 존재의 방법이며, 삶의 방식입니다. 정직함과 함께 행하고, 진실되게 말하며, 자기 자신의 생각과 행동들의 진리에 충실하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충실함으로 짜인 삶은 모든 차원에서 표현되며, 모든 상황 안에서 충실하고 믿을 만한 남자와 여자가 되게 합니다.

 

그러나 그처럼 아름다운 삶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의 본성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충실함이 우리 존재 안에 들어와서 우리를 전염시켜야 합니다. 십계명의 이 여섯 번째 말씀은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께 돌리도록 우리를 부르며, 그리스도의 충실함으로 우리에게서 불륜의 마음을 없앨 수 있으며, 우리에게 충실한 마음을 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오직 그분 안에서만 아낌없고 변함없는 사랑이 있으며, 아무런 이유 없는 완전한 봉헌과 끝까지 받아 들여지는 견고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부터 우리의 충실함이 나옵니다. 그분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부터 관계의 지속성이 나옵니다. 그분과의 친교로부터, 성부와 성령과의 친교로부터 우리 사이의 친교가 나오며, 충실성 안에서 우리 사이의 유대를 살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바티칸 뉴스, 2018년 10월 24일, 번역 김호열 신부]

 

 

십계명에 관한 교리 : 교황 “혼인은 결혼식이 아니라, ‘나’에서 ‘우리’로 가는 여정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0월 31일 수요 일반알현을 통해 사제 성소나 수도자 성소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 성소는 ‘부부애적 사랑’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11월 1일에는 모든 성인 대축일을 지내고, 11월 2일에는 세상을 떠난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이라고 말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그리스도의 충실한 사랑이 인간 감성의 아름다움을 살 수 있는 빛임을 강조하면서 십계명의 여섯 번째 말씀인 “간음하지 마라”에 대한 교리 교육을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사실, 우리의 감성적 차원은 충실함과 환대와 자비 안에서 표현되는 사랑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랑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충실함과 환대와 자비 안에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계명이 결혼의 충실성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부부애적 사랑’의 의미에 대해 더 심도 있게 생각해보는 게 바람직할 것입니다. (조금 전에 들은) 성경 대목, 곧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5,21-33 참조)의 내용은 혁명적입니다! 그 당시의 인문학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남편도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혁명(rivoluzione)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당시, 결혼에 대해 말한 것 중에 가장 혁명적인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항상 사랑을 행하는 것에 있어서, 우리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자문할 수 있습니다. 이 계명은 단지 부부들에게만 해당되는가? 사실 이 계명은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이 계명은 모든 남녀들을 향한 하느님의 부성애적 말씀입니다.

 

인간 성숙의 여정은 생명을 받는 것에서부터 생명을 주는 능력에 이르기까지, 돌봄을 받는 것에서 돌봄을 제공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길 자체라는 점을 기억합시다. 성숙한 남자와 여자가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삶의 무게를 자신의 무게로 받아 들이고, 모호함 없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같은 삶의 여러 상황 안에서 나타나는 ‘부부애적 사랑’과 ‘부모애적 사랑’을 사는 것에 도달하는 걸 의미 합니다. 그러므로, 이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는 방법을 아는 사람의 전체적인 태도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간음하는 자이고, 음탕한 자이며, 불충실한 사람입니까? 자신의 삶을 자신만을 위해 유지하고, 자신의 행복과 만족을 기반으로 상황을 해석하는 미성숙한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혼인하기 위해 결혼식만 치르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나’에서 ‘우리’로의 여정이 필요합니다. 혼자 생각하는 것에서 함께 생각하고, 혼자 사는 것에서 둘이 함께 사는 여정이 필요합니다. 이는 아름다운 여정입니다. 이 여정은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경지에 도달했을 때, 모든 행동은 ‘부부애적 사랑’이 됩니다. 비로소 우리는 환대하고 희생하는 태도로 일하고 말하고 결정하고 다른 사람들을 만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이제 조금 더 넓힐 수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부르심은 ‘부부애적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제직도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제직은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서 주님께서 주신 모든 애정과 구체적 보살핌과 지혜를 갖고 공동체에 봉사하라는 부르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제의 역할만을 수행하는 사제 지망자들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대신,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위해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마음을 감동시킨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사제는 자신의 직무 안에서 신랑과 아버지의 부성애와 부드러움과 힘을 가지고 하느님의 백성을 사랑합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봉헌 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봉헌 생활도 ‘부부애적 사랑’의 관계처럼 충실성과 기쁨으로 살고 모성애와 부성애로 풍성해집니다.

 

다시 말씀 드리자면, 모든 그리스도인의 성소는 ‘부부애적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를 새로 태어나게 하는 사랑의 유대의 결실이기 때문이며, 조금 전에 읽었던 바오로 사도의 서간이 우리에게 상기시킨 것처럼,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유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충실성과 부드러움과 관용에 기인하여 믿음을 가지고 혼인과 모든 성소를 바라봅시다. 그리고 성의 온전한 의미를 이해합시다.

 

창조된 인간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할 수 없는 일치와 남성성과 여성성의 이중성 안에서 매우 좋은 현실이며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운명 지워졌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쾌감의 도구가 아니라 사랑으로 부름 받은 우리 성소의 장소입니다. 진정한 사랑 안에는 정욕과 피상적인 사랑을 위한 여지가 없습니다. 남자들과 여자들은 이러한 것보다 더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간음하지 마라”는 계명은, 비록 부정문으로 표현되었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원래의 우리의 부르심 곧, 충만하고 충실한 ‘부부애적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로마 12,1 참조). [바티칸 뉴스, 2018년 10월 31일, 번역 김호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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