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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진리를 찾아서: 삶의 원천인 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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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2-24 ㅣ No.1736

[진리를 찾아서] 삶의 원천인 전례

 

 

삶에서

 

제대한 지 3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겨울이면 자주 떠오르는 곳이 군 복무를 했던 곳이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다던 노래 가사에 등장하는 곳으로 눈 치우는 넉가래를 적어도 몇 개 부러뜨려야 제대할 수 있다는 강원도 오지였다.

 

보직이 통신병이었던 나는 몇 달 동안은 최전방에서 근무하였다. 한번은 주일날 부대장의 허락으로 민통선 밖에 있는 군인 성당에 다녀올 수 있는 외출증을 받았다. 부대에서 성당까지는 차로 40분, 걸어서는 두 시간 정도 소요되는 먼 거리였다.

 

성당에는 가고 싶었지만 그날따라 외부로 나갈 병사가 없어서인지 차량을 운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무작정 부대를 나섰다. 한겨울이라 밤새 눈을 치웠지만 어느새 발목까지 수북이 쌓여버린 눈을 헤치며 성당으로 향했다.

 

영하 40도의 기온에도 아랑곳없이 긴장감 때문인지 땀범벅이 되었지만 그때는 왜 그렇게도 성당에 가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마치 예수님께서 꼭 나를 보고 싶어 하시는 것만 같았다. 온갖 고생을 하며 두 시간 남짓 걸어 성당에 도착하였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 성호를 긋고 십자가에 계신 예수님의 얼굴을 보았다. 그때에 내 인생에 다시는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없을 것 같은 예수님을 뵈었다. 그분께서 정말 나를 그렇게 보셨던 건지, 아니면 내 마음이 그렇게 보아주기를 바랐던 건지….

 

‘잘 왔구나, 얼마나 고생했니?’라며 반겨주셨던 그분, 측은히 보시면서도 자상한 미소를 머금으신 그분의 얼굴을 30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주일미사를 드리고 산 정상에 있는 부대로 돌아가려고 또다시 두 시간을 걸었지만 그때는 결코 힘들게 느껴지지 않은 하루였다.

 

 

다가가기

 

교회는 전례를 “삶의 원천”(가톨릭교회 교리서, 1071항)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전례는 하느님과 인간이 이루는 친교를 통해 신자들을 새로운 공동체 생활로 이끌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 신자들은 형식적인 전례에 길들여져 있다.

 

미사에 참석해도 감동이 없다. 고해성사를 봐도 돌아서서 같은 죄를 짓는 자신에게 다시 실망한다. 견진성사만 받으면 성령의 은총을 다 받을 것처럼 생각했는데 별 느낌이 없다. 조당(혼인장애)은 죄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관면혼인을 받는다.

 

거룩한 삼위일체의 행위인 전례가 우리에게 아무런 느낌 없는 일상적 예식으로 전락한 이유가 무엇일까? 전례가 교회생활의 정점이며 원천임에도 아직도 많은 신자는 파스카 성사로 힘을 얻지 못하는 것 같다. 전례는 거룩한 삼위의 행위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077항 참조).

 

성부와 성자, 성령께서 전례 안에서 활동하신다. 전례를 통해 강복을 줄 때 성부 하느님께서 활동하신다. 사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모든 일이 강복이셨다. 태초부터 남자와 여자에게 강복하셨고, 구약의 놀라운 구원 사건 안에서 성부께서는 강복하시는 분으로 드러난다.

 

그분의 강복은 ‘말씀’ 안에서 완성되시며, 그 ‘말씀’을 통해 모든 선물을 포함하는 ‘선물’, 곧 성령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신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082항 참조). 성자께서는 당신의 은총을 나누어 주시고자 성사들을 통하여 일하신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마태 18,20) 있겠다고 약속하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성사들 안에 현존하시어, 누가 세례를 줄 때에 친히 세례를 주시고, 교회에서 성경을 읽을 때 당신 친히 말씀하신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088항 참조).

 

성령께서는 신자들이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준비시키시고, 그리스도를 상기시키고 나타내주시며, 당신의 변화시키시는 능력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비를 현존하게 하고 실현시키시어 교회를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명에 결합시키신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092항 참조).

 

성령 청원기도는 모든 성사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며, 성령께서는 전례를 통해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친교를 이루신다. 성부와 성자, 성령께서 이처럼 전례 안에서 활동하시기에 우리는 전례를 삼위일체의 활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살펴보기

 

이러한 성삼위의 활동이신 전례가 우리의 삶 안에서 은총의 열매를 맺으려면 간절한 체험이 있어야 한다. 사제품을 받고 처음 유학생활을 시작했을 때, 언어장벽과 음식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아무리 열심히 준비해서 수업에 참석해도 이해되는 단어 몇 개를 제외하고는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밤새워 공부한다는 핑계로 새벽 일찍 봉헌되는 기숙사 수도원 미사에 빠지기 일쑤였고, 생활이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하였다.

 

하루는 원장 신부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그동안의 불성실한(?) 전례생활 때문에 잔뜩 긴장하고 그분 앞에 앉았다. ‘올 것이 왔구나. 어렵게 들어온 기숙사인데 이제 나갈 때가 되었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 앞에 봉투를 하나 내놓으셨다. 그것은 누군가가 당신께 미사를 부탁하면서 드린 예물이었다.

 

신부님은 당신이 받은 미사예물을 나에게 주시면서 내가 그분을 위해 미사를 드려주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야단맞을 것을 예상하고 긴장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분에게서 미사 부탁을 받고 보니 갑자기 멍해졌다.

 

방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분의 가르침이 참 지혜로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에 보이는 행동의 결과를 두고 나무라기보다 스스로 필요성을 느끼도록 이끌어주어 전례에 참여케 하시는 그분의 슬기가 인상적이었다.

 

전례에도 간절함과 필요성을 갖고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형식적인 전례에 길들여지는 이유는 경험과 신앙이 분리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의 일곱 성사가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을 기념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태어나면서 세례성사를 받고, 어느 정도 성숙하면 견진성사를 받는다. 매일매일 성체성사를 통해 밥을 먹고, 일상에서 죄를 지으면 고해성사를 본다. 혼인성사를 통해 혼인 당사자들이 축복받고, 몸이 아프거나 세상을 떠날 때가 되면 병자성사를 받는다. 전례의 형식주의에서 벗어나려면 우리의 경험을 신앙의 지식으로 해석하고 조명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결심하기

 

“신앙의 지식으로 경험을 해석하고 조명하는 일은 어려울지라도 교리교육의 변함없는 임무이다. 그러한 임무를 간과할 경우, 교리교육은 진리에 대한 인위적 나열이나 편협한 이해에 빠지기 쉽다”(「교리교육 총지침」, 153항).

 

우리는 인생에서 경험하는 여러 가지 사건, 관심, 희망, 불안, 의문을 신앙의 빛으로 비출 수 있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경험을 통해 당신께로 이끄신다. 단지 성사 안에 존재하는 표징과 상징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이 표징과 상징이 되기를 원하신다.

 

일상의 경험들이 신앙의 빛으로 조명되어 표징이 되었을 때, 비로소 전례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삶의 한 부분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에서 신앙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회칙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신앙은 그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시듯이 그분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세상을 바라보시는 방식에 참여하는 것입니다”(「신앙의 빛」, 18항).

 

이렇게 성부와 성자,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의 경험을 신앙의 빛으로 해석하여 거행되는 전례야말로 참된 삶의 원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박종주 베드로 - 부산교구 신부. 오랫동안 신학교에서 교리교육을 가르쳤고 지금은 부산 가톨릭대학교 평생교육원장으로 일하며 차별화된 가톨릭 평생교육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7년 2월호, 박종주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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