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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신앙]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복음 선포자로 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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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8-03 ㅣ No.1846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복음 선포자로 살기 위해서

 

 

성령을 청함, 기도와 영성

 

신앙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영혼 없이 습관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당 가서 미사하고, 레지오 하고, 신자들과 어울리며 친교(친목)를 다지며, 본당 행사에 참여합니다. 물론 때때로 신앙의 일들에 집중하며 열정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앙생활은 그저 몸에 밴 습관처럼 이루어집니다. 신앙생활의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만큼 신앙의 깊이도 더해져야 하는데, 정작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저 관행처럼 신앙생활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합니다.

 

또한, 이처럼 습관적인 신앙생활은 복음을 선포할 열정을 불러일으키지도 못합니다. 복음 선포는 신앙인의 의무와 책임이지만, 우리의 생이 늘 그렇듯이, 의무와 책임에 대한 인식과 소명의식만으로 복음화 활동에 대한 열정이 충만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당연히 복음을 선포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라는 명제는 오히려 부담감으로만 다가올 확률이 높습니다.

 

“활동에 자극과 동기와 용기와 의미를 주는 어떤 내적인 힘”(‘복음의 기쁨’, 261항)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힘, 기도의 힘, 영성의 힘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당위적 명제를 아무리 말한다고 해도 별다른 힘을 갖지 못합니다. 자신 안에 어떤 영적인 동기와 열정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들의 복음화 활동은 형식적 수준에 머물거나 더 멀리 퍼져 나갈 힘을 갖지 못합니다.

 

복음화를 향한 영적 동기와 열정은 성령께서 불어넣어 주십니다. 또한 “우리의 선교 노력을 시들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성령께서 치유해 주실 수 있습니다.”(280항) 복음화 활동을 위해서 성령을 청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성령께서 머무실 수 있는, 우리 안에 어떤 내적인 공간을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허파가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262항) “오늘날 우리는 기도를 토대로 삼고, 성령께 간청합시다. 기도가 없으면 우리의 모든 활동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우리의 선포는 공허해질 위험이 있습니다.”(259항)

 

복음화를 향한 투신과 활동은 기도와 영성을 토대로 이루어질 때 진정한 것이 됩니다. 복음화의 여정에서 투신과 활동은 기도와 영성과 언제나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투신과 활동이 없는 기도와 영성이 형식과 위선에 빠질 위험이 있는 것처럼, 기도와 영성이 없는 투신과 활동은 세속적 이데올로기화의 위험이 있습니다. 복음을 진정으로 선포하기 위해서, 기도와 영성을 수련하고 성령을 청하고 성령께 의탁하는 자세와 태도가 절실히 요청됩니다.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과 체험

 

복음 선포의 내용이며 동시에 복음 선포의 동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즉, 복음 선포란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선포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만남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받은 예수님의 사랑, 그분께 구원받은 우리의 경험”(264항)이 우리를 복음화의 길로 이끈다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이에 대하여 말하고 그를 보여 주며 그를 알리고자 하는 욕구를 느끼지 못하는 사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사랑을 나누려는 강렬한 열망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다시 한 번 사로잡아 주시도록 꾸준히 기도하여야 합니다.”(264항)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는 이유는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삶이 더 풍요로워지고, 예수님과 함께 할 때 모든 것에서 의미를 찾기가 더 쉽다는 것을 우리가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266항 참조)

 

“이 확신은 그리스도의 우정과 그분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새롭게 맛보는 개인적 체험으로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개인적 체험을 통한 확신이 없으면 열정적인 복음화를 꾸준히 수행할 수 없습니다. 곧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을 모르는 것과 같지 않고, 그분과 함께 걷는 것은 맹목적으로 걷는 것과 같지 않으며,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은 그분 말씀을 모르는 것과 같지 않고, 그분을 관상하고 경배하고 그분 안에서 평화를 찾는 것은 그러지 않는 것과 같지 않다는 확신을 개인적인 체험을 통하여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266항)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과 열정과 신념과 사랑과 체험이 없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선포할 수 없습니다.(266항 참조)

 

“예수님과 하나 된 우리는 예수님께서 추구하시는 것을 추구하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합니다.”(267항)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체험하고 하나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한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며 재현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추구하신 것은 하느님의 영광이며, 예수께서 사랑하신 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복음화의 목적과 지향은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데에 있으며 동시에 사람들을 사랑하는 데에 있습니다.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를 하느님과 일치시켜 주는 영적인 힘입니다.”(272항) 모든 사람은 그들의 외양, 능력, 언어, 사고방식을 넘어 모두 하느님의 모상이며 피조물입니다. 당연히 “모든 사람은 지극히 거룩하고 우리 사랑과 헌신을 받아 마땅합니다.”(274항) 따라서 복음화는 모든 사람이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일이기도 합니다.(274항 참조)

 

 

희망, 전구 기도

 

희망을 갖기 어려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미래에 대한 전망과 희망을 찾아보기가 점점 힘들어집니다. 거대한 물질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의 승리와 과학 기술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세상 안에 희망은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양극화된 계층 격차, 자연 파괴, 기후 위기, 팬데믹의 현상들은 미래에 대한 전망을 어둡게 합니다. 사람들은 현재의 욕망 충족과 실현에 몰두합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담보로 현재를 견디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시절에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이 무척 막막해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고 노력해 보았자 소용없다는 생각으로 선교에 투신하지 않습니다.”(275항) 하지만 “상황이 바뀌지 않으리라 생각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을 물리치셨고 전능하신 분이심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275항) “하느님께서는 모든 상황에서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활동하실 수 있다”(279항)는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또한 “성령께서 빛을 밝히시고 안내하시고 지도하시어 당신께서 바라시는 대로 우리를 이끄신다”(280항)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확신합니다. 신앙한다는 것은 희망한다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의 열정은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희망에서 발생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희망에서 출발하는 복음화의 여정은 “다른 이들의 선익을 추구하도록 이끄는 기도의 한 형태인”(281항) 전구(轉求) 기도에서 그 꽃을 피웁니다. 누군가를 위해, 누군가를 향해 기도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복음 선포의 과정입니다. “하느님의 위대한 사람들은 위대한 전구자들이었습니다.”(283항)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때 이미 복음화의 여정은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웃을 위한 기도가 복음 선포의 작은 시작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전구 기도의 전문가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8월호, 정희완 사도요한 신부(안동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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