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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이겨 나왔어요, 경북 상주 성심원과 경도범 엘리지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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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1-11 ㅣ No.1493

“이겨 나왔어요” 경북 상주 성심원과 경도범 엘리지오 신부

 

 

중부내륙고속도로 북상주 나들목을 빠져나오면, 도로가 평지를 달리기 시작한다. 그 평지에 도로 양쪽으로 나뉘어 있는 마을이 있다. 31가구 45명이 사는 조용하고 예쁜 마을이다. 양계나 양돈도 없다. 더욱이 2015년 역곡리로 분동되어 일반 행정 지역으로 편입되었고, 주민들이 이장을 직접 선출하고 있다. 성심마을에는 왜관 수도원의 흔적이 없다. 오로지 마을 가운데 있는 작은 공소 경당이 교우촌임을 드러낸다. 매주 토요일 7시 이 경당에서 미사가 봉헌된다.

 

왜관 수도원에서는 4와 1/2개소의 한센인 정착 마을을 조성했다. 삼청공소, 용봉공소, 성심공소, 상신공소와 1/2이라고 하는 칠곡의 애생원이다. 1963년 말, 디오메데스 수녀의 보고서에는 정묵덕(鄭黙德) 엑베르토 되르플러 수사신부가 사목하는 ‘성주 용봉 성신원’, 남도광(南道光) 호노라토 밀레만 수사신부가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왜관 삼청동 베타니아원’, 노도주(盧道柱) 아르놀도 렌하르트 수사신부의 ‘문경 농암 상신원’ 등을 적었는데, ‘상주 성심원’만 따로 신부가 표기되어 있지 않다. 이때가 경도범(景道範) 엘리지오 콜러(Eligius Kohler, 1899~1963) 수사신부가 선종한 해다.

 

 

상주본당, 함창본당, 공검본당으로 관할이 옮겨지고

 

상주 성심원은 상주본당의 경도범 엘리지오 수사신부와 함창본당의 왕묵도(王黙道) 레지날도 에그너(Reginaldus Egner, 1906~1975) 수사신부가 특별히 애정을 쏟은 마을이다. 이 마을은 상주본당 관할로 시작하여 함창본당으로, 그리고 2010년부터는 새로 설립된 공검본당에 소속되었다. 이곳은 상주본당(현 서문동본당)에서 15km, 함창본당에서 약 5-6km, 공검본당에서 4km쯤 떨어져 있다. 상주 성심원은 그 관할이 자주 변경되었고, 규모가 작아서인지 마을의 역사적 맥락이 잘 연결되지 않는다.

 

1956년 상주본당의 경 엘리지오 신부가 상주 화장터 근처인 화산리에 초가 두 채를 사서 집 없이 떠도는 음성 한센인들을 정착시켰다. 이들을 쫓아내려는 주위의 행패가 심했다. 대부분의 한센인 정착 마을이 초기 자리 잡을 때 환우들은 낮에는 산으로 피하고 밤에만 돌아와 자야만 했다. 사람들에게 잡힌 환우들은 매 맞고 모욕을 당했다. 경 엘리지오 신부는 함창본당 왕 레지날도 신부와 이 문제를 의논했다. 왕 신부의 도움으로 현재의 위치로 이주하게 되었다. 함창본당에 좀 더 가까운 지역이다.

 

경 엘리지오 신부는 1959년 6월 19일 이곳 경북 상주시 공검면 역곡리 620번지 일대의 토지를 매입하여 상주 성심원을 개원했다. 집을 지으면서 이웃 주민들의 심한 반대도 겪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주택 네 동을 짓고 15명이 입주했다. 신부는 후에 농지 1만 평을 분양했다. 마을은 초기에는 ‘성 분도원’이라고 불렀다.

 

1963년 엘리지오 신부 선종 이후부터는 왕 레지날도 신부가 이 마을을 본격적으로 돌보았다. 왕 신부는 토지 5필지 1만 5000평을 매입했고, 30여 평의 현 공소를 신축했다. 왕 신부는 1950년대 함창본당 구역 내에 한센인 정착촌을 조성하려고 독일 구라협회에 지원요청을 했다가 왜관 수도원의 반대에 부딪혔었다. 그리하여 이전부터 상주 성심원에 관심을 기울여 왔는지도 모른다. 상주 성심원은 1969년 안동교구 설립 이후 함창본당 소속 공소가 되었고, 안동교구로 이전한 다음에도 1973년까지 왕 레지날도 신부는 함창본당 주임신부로 일했다.

 

왜관 수도원은 마을이 자립할 수 있도록 힘을 쏟았다. 1970년에는 수도원에서 한센인 개인이 주도적 책임을 지는 양계조합을 설립도록 하고, 각 마을에 닭 5만 마리씩 주었다. 양계와 축산을 시작하면서 생계가 안정되자 주민 대다수가 입교하여 교우촌을 이루었다. 1972년에는 농암에 거주하던 11세대가 입주하여 정착촌 근처의 토지 이안리 107-2, 502번지 4정보를 매입하였고, 이안면 증촌리에 답 2정보를 다시 매입하여 농사를 지었다. 왕 신부는 새로 이주한 주민들과 함께 주택과 축사를 짓고 가구당 병아리를 50마리씩 구매하여 사육하게 했다. 양계가 주였던 상주 성심원은 2018년 마을 내 모든 생산 활동을 접었다. 마을 주민들이 연로해짐에 따라 힘에 부치고 또 축산법도 강화되어 이 마을처럼 개방된 지역에서는 축산을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현재 마을 주민들은 외부 직장을 다니고 있다.

 

마을에 아이들을 위한 분교는 따로 없었다. 자녀들이 학교에 입학할 때면 주민들의 반대가 심했지만, 학생들은 숭덕초등학교, 공검중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는 상주에 나가 교육을 받기도 하면서 잘 성장했다. 마을의 연중 행사는 다른 한센인 정착촌과 비슷하다. 자녀들 교리교육과 산간학교, 왜관 피정의 집에서 4개 정착촌 단체 피정 등을 했다. 자녀들이 다 성장한 요즘은 ‘가톨릭 자조회’ 주도로 매년 여러 마을이 함께 모이는 한마음 잔치, 성지순례 등을 하고, 가끔 피정 특강도 있다.

 

성심마을에도 마을 회장과 공소 회장이 있다. 공소 회장은 이영복, 채홍은, 김복상, 이경숙, 박태배, 김복기, 이규남을 이어 현재 8대 오경수 미카엘라가 맡고 있다. 마을 회장으로는 이영

복, 최태수, 제갈병, 김복상, 이경숙, 차종섭, 함용국, 최진만에 이어 김창일로 이어졌는데, 김창일은 이장으로 선임되어 면행정도 보고 있다.

 

김창일은 1982년 30대 후반에 신용조합이나 판로 과정을 찾는 등 마을 사무를 맡게 되면서 마을로 들어왔다. 그가 주도하여 1984년 마을진입로 및 한길을 포장했고, 이후 공동창고와 냉동창고를 지었다. 1986년에는 마을회관을, 2001년에는 성심요양원을 신축했다. 2005년에는 운동기구를 갖춘 소공원을 조성했다. 마을회관, 요양원, 소공원은 모두 마을 입구에 있다. 사실 마을의 모든 공사는 안동교구의 허락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추진이 쉽지 않다고 한다.

 

 

덮이는 역사, 지워지지 않는 얼굴

 

경 엘리지오 신부는 독일 로텐부르크 출생으로 1921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서원했고, 1926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1930년 북한 덕원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해방 이후 북한 공산 정권의 강압으로 4년 6개월 동안 옥사덕 강제수용소에서 수인 생활을 했다. 1954년 독일로 귀환했다가 1965년 동료 수도자 6명과 함께 왜관 수도원으로 다시 파견되었다.

 

경 엘리지오 신부는 가장 힘든 본당으로 발령받았다. 상주본당은 1936년 퇴강본당의 부원공소가 승격된 본당이었다가 1955년 함창본당 공소로 다시 격하되었고, 왜관 수도원에서 ‘왜관감목대리구’를 맡으면서 본당으로 다시 승격된 참이었다. 1956년 7월 26일 성당에 도착한 그는 놀랐다. 환경은 너무나 열악했다. 자신이 겪었던 북한 수용소가 생각났다.

 

더 큰 문제는 공동체의 실상이었다. 1년여 동안 본당을 공소로 만든 사건, 이른바 ‘황 데레사 사건’이 있었다. 외교인 남편과 별거 중이던 부인에게 성모 마리아와 천주 성삼위가 현현하여 바위에서 물이 솟게 하고 예언을 했다는 것이다. 성직자와 영향력 있는 평신도 등 많은 신봉자가 있었다. 한국의 루르드나 파티마를 소망하던 이들은 신부가 ‘예언하는 여자’를 공경하지 않는다고 떠나갔다. 본당신부가 신자들을 알기도 전이었다. 한편 1957년 대구대교구 주교가 상주의 계시들은 하느님의 계시가 아니므로 전파를 금한다고 선포했다. 상주본당은 4대 주임이 대구교구 서정길 신부, 5대 주임이 대구교구 정행만 신부였다. 정행만 신부는 황 데레사의 사적 계시를 신봉하는 사제였고, 서정길 신부는 후에 대구대교구 주교가 되어 위와 같은 조처를 한 주교이니 그 첨예한 대립을 볼 수 있다. 영성의 높은 경지에 도달한 경 엘리지오 신부는 이를 슬기롭게 이겨냈다.

 

본당신부가 정작 우려한 건 빈곤이었다. 흉작으로 수천 명이 굶주렸다. 이후 신자들이 증가해 성당이 비좁았다. 사람들 무게 때문에 낡은 건물이 무너질까 걱정이었다. 신부는 주일미사를 3대까지 늘렸다. 그는 평일에도 미사를 3대 드리고 강론했다. 예비신자 교리도 저녁에 한 차례 더 했다. 그는 진리를 구하러 온 사람과 빵을 얻으러 온 사람을 구별하기 위해 사람들과 꾸준히 대화했다. 지난 학습 내용의 확인도 철저히 했다.

 

1957년 경 엘리지오 신부는 새로운 상주성당을 지었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콘라도 핵겔스 뮐러 신부가 설계했다. 1963년에는 남성동에 두 번째 본당을 건립했다. 이번에는 왜관 수도원의 안 알빈 신부의 걸작품이었다. 남성동본당을 분리하면서 상주본당은 서문동본당으로 개칭되었다.

 

모든 재정은 경 신부가 유럽 은인들의 도움으로 해결했다. 당시는 왜관 수도원 자체도 곤궁한 때였다. 경 신부는 성당 짓는 것은 물론, 학교 · 병원 · 정착 마을처럼 국가의 손길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복지사업을 위해 유럽에 손을 내밀었다. 물론 유럽인들도 돈을 쌓아놓은 것이 아니라, 1마르크, 2마르크씩 정성을 모아 보내주었다. 수도원과 본당에서 얼마나 많은 돈과 옷과 의약품들을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들에게 제공했는지는 계산할 수도 없고 계산해서도 안 된다. 마찬가지로 선교사들이 보낸 감사 편지의 수도 셀 수 없다. 경 신부는 1963년 11월 28일에 열린 남성동성당 봉헌식을 보지 못했다. 성당 완공을 눈앞에 둔 1963년 6월 11일 반려 고양이에 물린 세균 감염으로 선종했다. 그렇지만 그는 고양이 독이 퍼져 끝마디가 검푸르게 변한 손가락으로까지 은인들께 보내는 수천 통의 편지를 타자했다.

 

그는 이런 감사 편지로 서문동본당과 남성동본당, 교육관 · 수녀원 · 병원 · 정착 마을 등을 세웠고, 성당묘지도 마련했고, 낙서공소 등 8개 마을에 공소를 세웠다. 엘리지오파와 성삼발현파로 분열된 본당에서 엄청난 일을 해냈다. 부임 당시 700명이던 신자가 4000명으로 늘어났었다. 신부의 사후에도 엄청나게 신자들이 증가했다.

 

 

한반도 동쪽의 남북에 역사를 심은 경도범 엘리지오 신부

 

경 엘리지오 신부의 역사는 이보다 앞서 북한에서 그의 젊은 힘을 쏟았다. 1931년 덕원 수도원에 도착한 그는 1933년 고원본당이 설립되면서 초대 주임으로 부임해서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했다. 여기서도 그는 학교를 세웠고, 천내리 공소에 새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했다. 그는 이 무렵 덕원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강의했고, 「성세성사」도 저술했다.

 

1940년 원산대목구가 함흥대목구와 덕원면속구로 나뉘었다. 경 신부는 새 교구 중심지를 설립할 소명을 받고 함흥성당과 함흥 주교관을 건축했다. 특히 부임 직후 수녀들을 초청하여 ‘예수 성심의원’을 개원했다. 성심의원의 원장 디오메데스 수녀는 남한으로 다시 파견되어서는 왜관 수도원이 세운 1개의 한센인 정착 마을 환우들을 돌보았다. 경 신부와 디오메데스 수녀는 일본 제국의 폭압, 북한 공산당의 학대를 함께 겪은 사람들이었다.

 

경 신부는 한반도 동부를 개척한 용사였다. 일제강점기의 통치자는 일본인이고 사목 대상은 가난한 한국인이었던 덕원 수도원의 새 선교사는 해방 이후 북한 공산 정권에 핍박을 받았으며, 후에는 한국전쟁에서 폐허가 된 남한을 보듬었다. 그는 남북을 오가며 동쪽 산야에 가난을 물리치고 황금 같은 성당을 지으며 한국교회 초석을 다져놓았다. 그것이 특히 오늘날 안동교구의 기틀이 되었다.

 

사람의 정성을 얻어 좋은 곳에 사용하는 일을 한다는 수도원 방침은 그렇게 일하고 끝난다. 그렇지만 그가 이룬 업적들은 좌절하지 않고 삶을 갈망했던 이들과 이를 함께 아파하고 동행한 사람들의 순간순간 느꼈던 숨겨진 사랑이 한땀 한땀이 된 것이다. 이 마을에서도 한참 서 있으면 그 자취가 보인다.

 

(자료 도움 : 김창일, 권영우, 김진국)

 

* 김정숙 소화 데레사 - 프랑스 파리 Ecole des Hautes Etudes en sciences sociales에서 역사인류학으로 박사학위 취득하였다. 영남대 국사학과 명예교수로 현재 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위원, 대구가톨릭학술원 회원, 대구대교구와 수원교구 시복시성위원, 안동교회사연구소 객원연구원, 「교회와역사」 편집위원, 대구문화재위원,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에세이작가연대와 가톨릭문인회 회원으로 역사서 「대구 천주교인들 어떻게 살았을까」 외 다수의 공저와 수필집 「대신 생각해 드립니다」 등이 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21년 겨울(Vol. 56), 김정숙 소화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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