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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 그들은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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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1-11 ㅣ No.1332

[특별기고]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 그들은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 (1)


“젊은 조선의 첫 사제는 한분이신 하느님 위해 목숨을 바쳤다”

 

 

네덜란드어로 인쇄된 교황청 전교기구 베드로 사도회 소식지. 1922년 4호, 이돈수 가밀로 소장.

 

 

그들은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는 1846년 9월 2일 편지로 김대건 신부의 ‘체포 소식’을, 11월 3일 편지로 그의 ‘순교 소식’을 전했다. 이후 김대건 신부에 대한 소식은 유럽 전역에 빠르게 전파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이야기와 한국 천주교회의 박해사와 순교사는 신문과 잡지는 물론 당시 출판된 여러 단행본의 매력적인 소재가 되었다. 세계인들에게 한국인 첫 사제이며 순교자인 김대건 신부는 어떻게 소개되었을까.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19세기에는 새로운 선교회들이 많이 창설되었다. 특히 1817년 교황청 포교성성의 기능과 활동이 활성화되면서 근대 선교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될 선교회들이 복구되거나 새롭게 생겨났다. 이러한 선교회들의 활동을 돕기 위한 정책과 예산을 후원하기 위한 단체들도 잇따라 설립되었는데, 교황청 전교회, 교황청 어린이 전교회, 교황청 베드로 사도회, 교황청 전교 연맹 등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교회의 사명인 선교에 헌신하고 선교를 증진시키기 위해, 즉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파하기 위해 설립된 여러 선교회에 선교지의 현지인 사제의 탄생과 죽음은 극적인 사건이었다. 더욱이 사제 없이 평신도들이 서학을 공부하여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젊은이가 자신의 동료와 함께 신자 공동체를 결성하고 성사의 은총을 완성하기 위해 북경 주교에게 또 교황에게 사제를 보내달라고 청하는 편지를 수차례 썼다는 한국 교회의 역사는 여러 나라의 선교 소식지에 흥미롭게 등장했다.

 

가톨릭평화신문은 성 김대건 신부 희년을 맞아 ‘그들은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를 제목으로 총 5회에 걸쳐 세계인에게 소개된 김대건 신부 관련 자료를 연재한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사문화부장 송란희 선생의 특별 기고이다. 프랑스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등 여러 유럽 언어로 출판된 이들 자료는 신문, 잡지, 리플릿, 소책자 등 형식도 다양하다.

 

 

1922년 베드로 사도회 소식지 표지 장식

 

“누구도 성소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모토 아래 각 선교 지역의 현지인 사제 양성을 후원하는 교황청 전교기구 베드로 사도회의 네덜란드 지부에서 발행한 선교 소식지이다. 1922년 11월 발행된 4호에 김대건 신부의 초상화가 표지로 실렸으며, 2면에 걸쳐 김대건 신부의 일생과 순교 장면이 소개되었다. 표지는 우석 장발(루도비코, 1901~2001)이 1920년에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기낭 교장 신부의 은경축 기념 선물로 그린 초상화로 김대건 신부의 초상화 아래에는 “가경자 김 안드레아 1845년 8월 17일에 사제품을 받은 한국의 첫 현지인 신부로, 1846년 9월 16일에 신앙을 위해 순교했다”는 사진 설명이 달려 있다.

 

1921년 5월에 창간된 이 소식지는 중철 제본의 소책자 형태로 앞뒤 표지를 제외하고 총 16쪽으로 되어 있으며, 크기는 가로 10.3cm, 세로 22.9cm이다. 유가지로 판매가는 20센트이며, 베드로 사도회에 가입된 회원의 가정에는 무료로 제공되었다. 당시 발행인인 얀 슈미트(Mgr. Dr. Jan Olav Smit, 1883~1972) 주교는 파라루스(Paralus)의 명의 주교이자 노르웨이와 스핏츠버겐(Spitzbergen)의 교구장이었다.

 

교황청 베드로 사도회는 네덜란드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1920년 포교성성 장관 반 로숨(Van Rossum, 1854~1932) 추기경이 얀 슈미트 주교를 교황청 베드로 사도회의 네덜란드 지부장으로 임명하면서 크게 성장하게 된다. 이후 얀 슈미트 주교는 네덜란드 선교 사업의 중심인물로, 교황청과 일치를 이루며 네덜란드의 선교 사업에 크게 기여했다.

 

소책자의 주요 내용은 네덜란드 각 교구에서 모은 후원금이 전 세계 현지인 신학교에서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에 대한 소식 전달이다. 당시 네덜란드는 아프리카, 인도,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토크, 베트남의 통킹, 말라카 해협의 폴로 피낭, 중국 동몽골과 귀주, 일본 삿포로와 나가사키 등에 있는 신학교를 지원하고 있었다. 한국 교회 소개에서는 원산의 덕원 신학교 신학생 3명을 후원하고 있으며 그들이 김대건 신부의 뒤를 이어 진정한 사제가 되기를 바란다는 희망도 담았다.

 

- 교황청 전교기구 베드로 사도회의 네덜란드 지부 선교 소식지 4호의 10~13쪽.소식지는 당시 네덜란드 각 교구에서 모은 후원금이 전 세계 현지인 신학교에서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에 대한 소식을 전했다. 그 가운데 2개 면에 걸쳐 김대건 신부의 일생과 순교를 자세히 담았다.

 

 

몇 번의 고문 끝에 여덞 번 칼 맞고 순교

 

김대건 신부에 대한 소개는 “한국은 100년 전에 이미 사제 순교자를 배출한 나라이며 그 장본인은 가경자 김 안드레아로, 한 젊은 한국인 신자가 그린 그의 초상화가 본 팸플릿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사제 양성을 위해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가 1831년(1836년의 오기)에 선택한 3명의 젊은 한국인 중에는 1821년생인 김 안드레아도 있었다. 그는 학업을 마치기 위해 중국으로 보내졌고 1842년까지 마카오 신학교에서 수학했다. 그해 중국과 유럽 사이에 소위 아편전쟁이 발발해 프랑스가 두 척의 군함을 보냈다. 그중 한 척은 조선과의 무역 관계를 시작할 의도를 가졌고, 그 선장은 신학교장에게 통역관을 주선해 주라고 부탁했다.… 위험한 여정 끝에 김 안드레아는 1845년 8월 17일 한국인 최초로 사제 품을 받는다. 8일 후 그는 주교와 다른 선교사와 함께 다시 뱃길을 나선다. 또 한 번의 위험천만한 여정 끝에 세 선교사는 조선에 도착해 아주 조용히 그들의 임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한다. 다시 안드레아 신부는 [조선] 밖으로 보내지는데, 이번에는 중국과 동료 선교사들과의 연락을 시작하라는 임무였다. …성공했다고 생각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천주교 신자로 발각된다.

 

그는 투옥되어 외국인들에게 협조한 죄로 고문당하지만, 심문관들에게 천주교 신앙에 대해 설득하였다. 판관은 황제(왕의 오기)에게 그의 면죄부를 청하지만 프랑스 해군으로부터 실종된 선교사들에 대해 설명하지 않으면 보복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협박 편지를 받는다. 이것은 끝을 불러온다. 놀란 황제는 김 신부를 참수형에 처할 것을 명령한다. 몇 번의 고문 끝에, 젊은 조선의 첫 사제는 8번 칼을 맞고 1846년 9월 16일에 한 분이시며 참되신 하느님과 하나이며 참된 교회를 위해 그의 목숨을 바쳤다.

 

한국 원산에 있는 신학교에는 네덜란드가 후원하는 세 명의 신학생이 있다. 이 대목구에는 파리외방전교회의 프랑스인 선교사들 외에 상트 오틸리엔 베네딕도 수도회의 독일인 선교사들만 활동 중이다. 가경자 김 안드레아를 본받아 우리의 세 학생이 그들 고국의 진정한 사도가 될 수 있기 바란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월 10일, 송란희(가밀라,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사문화부장)]

 

 

[특별기고]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 그들은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 (2)


 20세기 초 프랑스 교회 주간지에 김대건 신부의 순교 장면 삽화 실려

 

 

「르 펠르항」 제2519호 표지.

 

 

「Le Plerin」(르 펠르항)의 제호는 ‘순례자’라는 뜻으로 프랑스 3대 가톨릭 출판사 가운데 하나인 바야르 프레스(Bayard Press)에서 1872년 창간했다. 창간 당시에는 뉴스레터 형식이었으나 1877년에 기사와 삽화를 게재하는 주간지로 체제를 바꿔 발행하기 시작했다. 주간지의 크기는 가로 18.3cm, 세로 25.5cm이다. 「Le Plerin」은 교회 소식 외에도 조선에 대한 다양한 소식을 원색 삽화와 함께 실었다.

 

19세기에 발행된 삽화 중심의 신문이나 잡지는 독자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시각적 자극과 환상을 주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경향은 1839년 최초의 사진이 만들어지고, 1844년 카메라가 상용화되어 아시아를 여행한 서양인들이 직접 촬영한 사진들로 대체되기 전까지 글을 읽지 못하는 일반 대중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했다.

 

이번에 소개하는 「Le Plerin」은 흥미로운 삽화 때문에 근현대 역사를 주제로 다루는 전시에 자주 활용되고 있다. 당시 해외에서 출판된 자료들은 연도나 날짜, 호칭 등에 다소 오류가 있는데 여러 언어로 번역되고 편집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실수일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 독자들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본토인 첫 순교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이야기를 읽으며 선교지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했을 것이다.

 

「르 펠르항」 1528호 1906년 4월 5일 자. 김대건 신부의 순교 장면을 묘사한 삽화가 크게 그려져 있다. 이돈수(가밀로) 소장.

 

 

Le Plerin 제1528호(1906년 4월 15일 자)

 

김대건 신부의 순교 60주년을 기념하는 해인 1906년 4월 15일에 발행된 「Le Plerin」에는 김대건 신부의 순교 장면을 묘사한 삽화와 함께 그의 일대기가 실려 있다. 삽화 아래는 “가경자 김대건 신부 첫 한국인 사제 순교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참수, 순교자의 머리는 칼을 8번 내리치고 나서야 떨어졌다”라는 다소 긴 설명이 달려 있다.

 

삽화의 처형장 모습이나 처형에 참여한 등장인물을 볼 때 조선인이라 보기 어렵다. 아마 삽화가가 아시아 각 나라의 전통 복장이나 생김새를 구분하지 못해 조선인, 일본인, 중국인을 섞어 그렸을 것이다. 실제로 1968년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식 때 성 베드로 대성전 외벽에 내건 한국인 순교 복자화를 그린 이탈리아 화가는 한국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순교 복자를 일본인처럼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참수를 앞둔 순교자 김대건 신부의 자세는 압도적이며 하늘을 향한 그의 눈빛은 형형하다.

 

「Le Plerin」은 김대건 신부를 총 4면(21~24쪽)에 걸쳐 소개하면서 ‘순교자 집안’, ‘조선으로 입국’, ‘갑자기 뱃사람이 된 첫 한국인 신부’, ‘체포’, ‘처형’ 등 5개의 소제목을 두어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했다. 그리고 기사의 마지막에는 1846~1847년 전교회 연보(Annales de la Propagation de la Foi)에 실린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의 편지를 인용했음을 밝히고 있다.

 

“순교자 집안 : 김대건은 1821년 8월 한국의 충청도 지방에서 태어났다. 왕족 혈통인 그의 가족은 천주교 순교자를 여러 명 배출하는 영광을 가졌다.…모방 신부는 1836년에 김대건을 다른 두 한국인 젊은이들과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신학생 김대건의 발전은 그의 덕성만큼이나 학문에서도 빨랐다. 그는 곧 3개 외국어를 구사했는데 중국어는 원어민만큼, 라틴어는 수월하게, 그리고 프랑스어는 곧잘 했다. 아편전쟁 끝 무렵(1842)에 영국(프랑스의 오기)의 세실 장군은 청나라와 조선과 이야기할 때 그를 통역으로 고용했다. 조선대목구장인 페레올 주교는 ‘통역가로 일하는 동안 그의 사고가 성장하고 용기가 생겼다. 차츰 그의 영혼은 대담해졌고 주님께서 그의 앞날에 주신 뜻을 이루도록 인도하셨다. 이후의 위험한 원정들은 그를 두렵게 하기는커녕 더 큰 용기를 가져다주었다’고 기록했다.”

 

“갑자기 뱃사람이 된 첫 한국인 신부 : 서울에서 김대건은 자신의 입국을 철저히 비밀로 하기 위해 심지어 그의 어머니에게까지 귀국을 알리지 않았다. 9년 만에 만났을 것인데도! 그는 비밀리에 120피아스터(piastres)에 배를 하나 샀는데 고틀랑 신부가 말하길 그것은 그저 쇳덩어리(목선의 오기)로, 바다를 항해하기 위해 만든 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어느 화창한 날, 그는 가장 신실한 교우들을 불러 그들에게 어디로 가는지 언질도 없이 배에 태웠다. 급조된 선장인 그는 마찬가지로 급조된 선원들과 함께 망망대해로 떠났다. 조잡한 나침반 하나로 중국을 향해 전혀 모르는 바다를 항해했다. 김대건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제작한 성모 상본을 지니고 왔다. 용감한 항해사들은 모두 순교자의 가족이었기에 하느님의 가호를 믿었다.”

 

“체포 : 김대건의 원정은 거의 다 성공했지만, 동료들의 파렴치한 배반으로 체포되었다. 순교자가 직접 쓴 참수되기 전까지 견뎌낸 고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페레올 주교에게 자신의 체포 상황을 이야기하고 아래와 같이 덧붙였다. ‘포졸들이 사납게 제게로 달려들어 제 머리채를 잡아 쥐어뜯더니, 밧줄로 저를 묶고 세차게 발길질하고, 주먹질하고, 막대기로 때렸습니다. 이후 그들은 제 옷가지를 벗기고 다시 나를 조롱하며 묶고 때리더니 저를 재판관 앞에 끌고 갔습니다. 그 관리가 제게 말하길, ‘당신은 그리스도교인인가?’ 제가 그에게 답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르 펠르항」 제2519호 7월 5일 자. 순교 장면 삽화에 무릎 꿇고 있는 김대건 신부 뒤로 지켜보는 대신들과 태극기가 살짝 보인다.

 

 

Le Plerin 제2519호(1925년 7월 5일 자)

 

김대건 신부를 포함한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 79위의 시복식 당일인 1925년 7월 5일 자 「Le Plerin」에는 김대건 신부의 순교 장면을 그린 흑백 삽화가 실렸다(3면). 삽화 속에서 희광이는 큰 칼을 들고 서 있고 두 손을 모아 십자가를 든 김대건 신부가 무릎을 꿇고 있다. 참수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왕과 대신들 뒤로 반쯤 보이는 태극기가 눈길을 끈다.

 

‘한국의 순교자들’이라는 제목 아래 김대건 신부를 소개했다. “불과 1784년에서야 시작된 한국 교회의 역사는 하나의 긴 순교록이라 하겠다. 7월 5일에 이들 순교자 중 세 명의 파리외방전교회 성직자와 한 명의 한국인 사제가 시복될 것이다.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 그리고 ‘김’이 바로 그들이다. 한국인 사제 안드레아 김은 앵베르 주교의 뒤를 이은 페레올 주교의 오른팔이었다. 그는 메스트르 신부의 입국을 준비하다가 1845년(1846년의 오기)에 체포되었다.

 

그의 위대한 영혼과 지혜는 정부 대신들조차 매료시켰다. 그들은 왕에게 김대건 신부를 죽이지 말도록 청했으나 집행할 준비가 된 왕은 버텼다. 형벌이 준비되는 동안 안드레아는 자신의 사형 집행자들과 대화하며 ‘이렇게 해서 나는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겁니다’라고 말하고 ‘편안하게 마음껏 치시오. 나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젊은 신부의 머리는 땅 위로 뒹굴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월 17일, 송란희(가밀라,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사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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