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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26: 드 뇌빌의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의 뺨을 때리는 샤라 콜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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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2-07 ㅣ No.1322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26) 드 뇌빌의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의 뺨을 때리는 샤라 콜론나’


뺨 맞은 교황, 무너진 권위

 

 

드 뇌빌,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의 뺨을 때리는 샤라 콜론나’, 프랑수아 기조의 저서 「초기부터 1789년까지 프랑스사」(1883), 597쪽 삽화.

 

 

보니파시오 8세가 제193대 교황으로 선출되던 1294년, 훨씬 이전부터 추기경들은 극심한 분열을 보였다. 그것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 복자 그레고리오 10세 교황을 선출할 때인 1268~1271년, 비테르보 콘클라베이다. 3년이 지나도록 교황을 선출하지 못하자 비테르보 시민들이 추기경들을 교황궁에 가두고 선출하면 나오라며 문을 잠가버렸다.

 

오늘날 교황 선출을 뜻하는 ‘콘클라베’(Conclave, 열쇠로 ‘잠금’ 또는 ‘감금하다’는 뜻)라는 말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그레고리오 10세는 교황 선출에 관한 사도 헌법, 흔히 ‘교황 선거법’이라고 하는 「위험이 있는 곳(Ubi Periculum)」을 제정했다.

 

추기경들의 분열은 교황에게는 적지 않은 위협이었다. 베네딕토 카에타니(훗날 보니파시오 8세 교황)가 추기경으로 있던 시절, 그는 4차례나 콘클라베에 참여했다. 1292년 성 첼레스티노 5세는 교황으로 선출되자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의 영지인 교황령 밖에서 교황직을 수행했고, 선출된 지 2년 만에 돌연 은퇴를 선언하기까지 했다. 교황이 생전에 은퇴한 경우는 최근의 베네딕토 16세 교황(2013년) 이전에는 첼레스티노 5세가 유일했다. 베네딕토 카에타니 추기경이 부추겼다는 말도 있었다.

 

성 첼레스티노 5세 교황이 물러난 지 열흘 만에 나폴리 누오보성(城)에서 콘클라베가 있었고, 1294년 12월 24일 카에타니 추기경이 보니파시오 8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단테는 「신곡」에서 반복해서 보니파시오 8세가 부정투표로 선출되었다고 했다.(‘지옥편’ 19장과 27장 참조) 단테를 배반하고, 피렌체에서 영구 추방한 사람이 바로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이다. 그래서 단테는 「신곡」에서 배신을 가장 나쁜 죄로 간주했고,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을 지옥의 극단으로 보냈다.

 

 

교황과 콜론나 가문의 싸움

 

보니파시오 8세 교황과 적대 관계에 있었던 사람은 단테뿐이 아니었다. 로마의 명문가 콜론나 가문의 두 추기경 자코모와 피에트로도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의 카에타니 가문과 콜론나 가문의 불편한 관계도 작용했을 것이다. 미남 왕(le Bel)으로 알려진 프랑스의 필리프 4세도 반대했다. 작은형제회 출신의 시인 다 토디는 시집 「라우데」에서 교황을 가리켜 ‘적(敵) 그리스도’라고 표현했다.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이 볼 때 이런 일련의 주장은 모두 이단이 아닐 수 없었다. 충돌은 1297년 5월 절정에 달했다. 그때 교황은 리에티에서 교황직을 수행하고 있었고, 콜론나 가문 출신의 두 추기경과 친척들, 세 명의 프란치스코회 영성가들이 “교황이 부정투표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신자들은 그에게 복종할 의무가 없다”며 “교황직을 몰수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교황의 반응은 격렬했다. 칙서 「잘려진 돌」을 통해 두 추기경을 파문하고 가문의 재산을 몰수했다. 교황과 콜론나 가문의 전쟁이 시작되자, 콜론나 가문은 프랑스 왕의 지원을 기대했으나, 필리프 왕은 교회 분담금 문제를 마무리하느라 교황과 더 이상의 갈등이나 불편한 관계를 원치 않았다. 결국, 콜론나 가문의 두 추기경은 무릎을 꿇었고, 조반니 보카마차 추기경의 중재로 겨우 사면되었다. 콜론나 가문의 식구들은 모두 티볼리로 강제 이주하였다.

 

그 과정에서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은 콜론나 가문의 영지 중 천혜의 요새라고 할 수 있는 팔레스트리나 지역을 차지할 줄 알았다. 그러나 여전히 콜론나 가문 소유라는 것을 알자, 교황은 그 도시를 아예 없애버렸다.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땅에 소금을 뿌려 농사를 짓지 못하도록 했다. 또 볼로냐 법원에 명해 자코모 콜론나 추기경의 궁을 압수하도록 했다. 교황과 콜론나 가문 간 갈등은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1299년 콜론나 가문은 프랑스로 망명했다.

 

교황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듬해인 1300년, 첫 희년을 선포하는 칙서 「옛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과 함께 칙서를 하나 더 선포했는데, 그것은 오로지 교황의 정치적 견해를 담은 것이었다. 물론 같은 날 발표했다. 「최근에 더욱」이라는 이 회칙에는 앞서 선포한 희년 전대사 규정에서 제외되는 사람들을 명시했다. 사라센인, 콜론나 가문, 필리프 4세 프랑스 국왕과 시칠리아의 왕 아라곤 등을 언급하며, 이들을 환대해 준 사람까지 과거는 물론, 오늘도 내일도 교회의 적으로 간주한다고 천명한 것이다.

 

필리프 4세는 삼부회 총회(1302년 4월)를 열고 기욤 드 노가레를 내세워 적극적인 반(反) 교황 정책을 주도했고, 그 사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군주제 국가로 탄생했다. 같은 해 교황은 칙서 「하나이고 거룩한 교회」를 통해 세속 권력은 영적 권력 밑에 있고, 교황의 권위는 세상의 모든 권력에 우선한다고 선포했다. 필리프 4세는 분노했다. 열 받은 필리프 4세는 교황의 오랜 숙적 콜론나 가문의 샤라 콜론나(피에트로 콜론나 추기경의 동생 자코모 콜론나. 흔히 ‘샤라, Sciarra’라고 불린다)를 교황이 거주하는 아나니로 보내 교황을 체포하도록 했다. 그는 교황을 체포하는 자리에서 교황의 뺨을 세차게 후려치고야 말았다.

 

 

삽화가 드 뇌빌

 

소개하는 작품은 19세기 프랑스의 색판화다. 프랑수아 기조(1787~1874)의 저서 「초기부터 1789년까지 프랑스사」(1883)에 들어 있는 알퐁스 마리 아돌프 드 뇌빌(1835~1885)의 삽화다.

 

드 뇌빌은 프랑스 노르망디의 생토메르라 지방의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찌감치 군인이 되고 싶었으나 가족들의 반대로 법학을 공부했고, 결국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로리앙에 있는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거기서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발견했다. 법률가며 군인이자 화가가 된 드 뇌빌은 신고전주의 역사화가 피코의 화실로 들어가 공부하지만, 얼마 못 가서 나와 들라크루아 밑에서 그림 공부를 했다.

 

그가 직업화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삽화를 그리면서부터다. 헷젤의 「해저 2만리」 삽화에 참여했고, 기저의 「세계 여행」과 「프랑스사(史)」 삽화를 그렸다. 같은 시기에 잘 알려진 우수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마젠타 거리에서 주아브와 경비병들의 공격’(1864), ‘주아브병의 보초’(1865), ‘성 로렌조의 전투’(1867), ‘쵸르나야를 통해 하산하는 기병’(1869)이 그것이다. 그는 자신이 군인이었기 때문에 전장에서의 경험을 생생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드 뇌빌 덕분에 우리는 프랑스와 프러시아 전쟁, 이탈리아 독립 전쟁, 영국의 줄루 전쟁 등 당대의 여러 전쟁의 양상을 알 수 있다. 그는 1885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그림 속으로

 

양쪽 진영의 분위기는 살벌하다. 교황은 권위의 상징인 삼중관에 목장(牧杖)까지 들었지만, 군인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맨 앞줄에 선 샤라는 그런 교황을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그 순간 교황 뒤에 서 있던 수도자와 성직자들은 차마 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렸다. 역사상 처음 있는 굴욕이었다. 그러나 드 뇌빌은 그림 속에서라도 샤라의 장갑을 벗겼다.

 

 

아나니의 모욕

 

흔히 ‘아나니(Anagni)의 모욕’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과격한 성격의 샤라 콜론나가 철장갑을 낀 채 교황에게 귀싸대기를 때렸다고 역사에는 기록되어 있다. 일각에서는 도덕적인 능욕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물리적인 싸대기였다. 그리고 교황을 체포하여 교황궁에 가택 연금을 시켰다. 교황은 그 충격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바로 그해에 사망했다.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의 불관용적인 태도와 콜론나 가문에 대한 지나친 적대감, 권력에 대한 집착과 그 과정에서 행한 각종 배신이 화를 불렀다는 평가다. 이에 서방 국가들은 민족주의를 앞세워 신흥 군주들의 등장을 환호했고, 교황의 세속 지배권을 배척했다. 군주들은 교황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문서 위조, 중상모략, 교황 폭행 등 각종 비리를 저질렀지만, 그런 환경과 분위기를 자초한 사람은 바로 교황 자신이었다. 이후 교황들은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의 꼭두각시가 되었고, 1305년 프랑스인 베르트랑 추기경이 클레멘스 5세 교황으로 즉위하자 필리프 4세의 요청에 따라, 1308년 교황청을 프랑스 남부로 옮겼고, 이듬해 아비뇽 궁으로 들어갔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2월 6일, 김혜경(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이탈리아 피렌체 거주)]

 

* 그림 파일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것입니다.

원본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9/9d/ColonnaSlappingBoniface.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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