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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교회사 속 여성: 24시간의 바늘 순교 - 집안 박해와 이 에메렌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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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1-24 ㅣ No.1319

[한국 교회사 속 여성] 24시간의 바늘 순교


집안 박해와 이 에메렌시아

 

 

우리 교회에는 하느님만이 그 이름을 아시는 순교자가 많다. 대표 사례 중 하나가 가족으로부터 박해를 당한 이들이다. 그들은 박해를 받은 것으로 조사되지도 않았고, 또 죽더라도 순교로 기록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집안 박해는 가까운 사람이 생활 속에서 24시간 얼굴 맞대고 퍼붓는 핍박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가족을 신자로 만드는 데 성공했기나 조정에 의한 순교자로 남았을 때만 그 삶이 기억되었다.

 

 

성사를 갈망하는 여인들

 

박해 시대 천주교 신자들은 일반 사회의 제례와 무속적 풍습 앞에 애를 먹었다. ‘외짝 교우’ 여성은 가정 안에서조차 이런 어려움을 견뎌 내야 했다. 그들은 성사 준비나 교리공부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최양업(1821-1861년) 신부는 외인 집안으로 출가한 뒤 성사 보기를 갈망하며 지내는 여교우의 사연을 전해 들었다. 신부는 사목 방문길에 그집 앞을 지나게 되자 냇가 정자에서 쉬는 척하면서 그 여교우에게 사람을 보냈다. 마침 집에는 어린 딸 한 명만 있었다. 신부의 전갈을 받은 여교우는 천만뜻밖의 반가운 말씀에, 그동안 적어 둔 성찰록을 신부께 전했다. 성찰록을 받은 신부는 곧장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 집에 들어가 성사를 주고 나올 수 있었다.

 

한편, 당시 양반집 부인들은 상민 계급의 여인으로 변장하고 밤중에 몰래 빠져나와 미사에 참여하고는 아직 모두가 잠들어 있는 동안에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성사 생활의 기회를 전혀 잡을 수 없는 여성들도 있었다. 신유박해 이후 외교인과 혼인한 한 여성은 어릴 때 집에서 미신 행위를 하지 않고, “예수! 마리아!”를 뇌던 것을 기억했다. 그는 그 기억으로 44년 동안 일상적인 미신 행위에 참여하지 않느라 남편과 시부모 등과 끊임없는 전쟁을 치뤘다. 그가 신자를 찾아내어 세례를 준비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기억력이 쇠해서 문답을 해낼 수가 없었다.

 

 

여인들이 견딘 박해는 선교가 되고

 

부인들의 질긴 신앙 실천은 남편이 지쳐서 학대를 포기하게 하고, 전교로 이어지기도 했다. 남편 몰래 천주교를 봉행하다 보니 교리문답을 잘 외울 수 없는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자기의 처지를 하소연했지만, 다블뤼(Daveluy, 1818-1866년, 安敦伊) 주교는 성사를 거절했다. 마침내 그는 남편을 신자로 입교케 하여 편히 공부하게 되었다.

 

한 집안에 여성 비밀 공동체가 생기기도 했다. 한 처녀가 부모의 명으로 외교인과 혼인을 했다. 여인은 날마다 기도문을 외웠는데, 갖은 조심을 했지만 한밤중 무릎을 꿇는 것을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여러 번 보았다. 무엇보다도 여인은 그지없이 온순하고 참을성 있으며 아주 하찮은 일에도 공손하게 복종하는 이였다.

 

하루는 시누이가 올케에게 그 비밀을 물었다. 결국 여인은 참 천주를 알고 공경한다고 설명했다. 시누이는 그날부터 올케와 함께 기도문을 배웠고, 둘은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얼마지 않아 시어머니는 올케와 시누이가 친해졌음을 눈치챘고, 특히 딸의 성격이 변했음을 알았다. 이번에는 시어머니가 이 내력을 듣게 되었고, 드디어 시할머니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네 여인은 자기들이 발견한 보물을 기뻐하며, 남편과 아버지 모르게 그들이 할 수 있는 데까지 신앙의 본분을 실천했다. 그들은 의논하여, 제사상 준비 등에서 노인 두 사람은 빠지고 시누이와 올케만이 천주께 면할 도리를 빌면서 참여했다.

 

 

명동성당 지하 순교자 묘의 이 에메렌시아

 

이 에메렌시아(1800-1839년)는 기해박해 때 수리산에서 잡혀 온 신자 가운데 최양업 신부의 부모인 최경환, 이성례와 함께 끝까지 신앙을 지킨 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성례 쪽의 인척으로 최양업 신부와 외척 사이였다. 에메렌시아는 예산 고을의 양가 출신으로 외교인에게 시집을 갔다.

 

그녀는 20세가량 되었을 때 오빠 이순빈에게서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믿기 시작했다. 그는 모든 미신 행위를 끊고 대소재(大小齋)를 지켰다. 그러자 남편의 학대가 극심해졌다. 남편이 몹시 때려 손발을 쓰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남편은 그의 옷을 벗겨 추운 겨울 눈 속에 여러 시간 매달아 두기도 했다. 이런 시련이 5-6년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나 에메렌시아는 모든 것을 조용히 인종(忍從)했다. 그는 시부모에게 효성을 다하여 아는 사람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했다. 에메렌시아는 끝내 남편을 입교시킬 수 있었다. 그뒤 부부는 천주교를 더 자유로이 봉행하기 위해 함께 산으로 들어갔다. 남편은 임종 때 세례를 받아, 신덕을 지니고 숨을 거두었다.

 

에메렌시아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오라비들의 집이 있는 수리산 뒤뜸이로 갔다. 이곳은 최경환을 중심으로 연고가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살던 교우촌이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면서 에메렌시아도 다른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서울로 오는 도중에 아들을 탈주시킨 에메렌시아는 관청에서 여러 차례 가혹한 형벌을 당했다. 한여름에 체포된 그는 옥 안에서 살이 썩고 목이 타들어갔다. 그는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언했다. 그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에메렌시아의 유해는 지금 명동성당 지하에 모셔서 있다. 박해기 에메렌시아의 유해는 최경환의 유해와 같이 거두어졌다. 최경환은 1839년 9월 12일 포청 옥에서 옥사했고 그의 형 최영겸 부자가 수리산에 안장했다. 그때 이들은 에메렌시아의 시신도 수리산으로 옮겨 묘를 썼다. 최양업 신부는 입국한 뒤, 최경환의 묘에 성묘했다. 1930년 5월 29일 최경환의 묘가 수리산에서 명동성당 지하로 옮겨질 때 에메렌시아의 묘는 명동본당 묘지인 중곡동 묘지로 이장되었다. 이후 1970년 5월 19일 명동본당에서는 중곡동 묘지에서 에메렌시아와 무명 순교자의 묘를 발굴하여 5월 28일 지하 묘역에 안치했다.

 

에메렌시아는 현재 ‘하느님의 종’이다. 그를 시성하는 과정에서 박해 시기 집안 박해를 버텨낸 많은 이의 이야기가 발굴되기를 기대한다. 그 과정에서 남편의 입교를 원하며 가족 공동체를 신앙 공동체로 변화시키고자 했던 당시 여성 신도들의 소망을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24시간도 매 순간이 박해의 현장일 수 있음을 깨닫게 할 것이다.

 

*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 영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 교수. 대구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 위원, 대구가톨릭학술원 회원, 대구대교구와 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위원이며, 안동교회사연구소 객원 연구원이다.

 

[경향잡지, 2020년 11월호,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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