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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교회사 속 여성 – 기해박해(헌종 시대): 천주교 신자들의 이상한 식구 이매임 가(家)와 홍재영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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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9-16 ㅣ No.1291

[한국 교회사 속 여성 – 기해박해(헌종 시대)] 천주교 신자들의 이상한 식구 이매임 가(家)와 홍재영 가

 

 

1834년, 11세로 왕이 되었던 순조의 34년 통치가 끝나자 이번에는 8세의 헌종이 왕위에 올랐다. 헌종 초기에 조선에는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원왕후 김씨의 섭정이 한창일 때 기해박해가 일어났다.

 

110여 명의 순교자 가운데 「기해일기」에 적힌 순교자는 78명인데, 여성이 50명으로 전체의 2/3이다. 그런데 여성 순교자 중에 과부가 22명, 동정녀가 14명(10대 2명, 궁녀 3명 포함)으로, 합하면 그 비율이 전체 신자의 45.6%이며 여성 신자의 72%나 된다. 게다가 내시와 혼인했던 이경이와 비록 혼인은 했지만 혼인 생활을 하지 않았던 권진이까지 포함하면 여성 신자의 76%가 혼자 살았다.

 

동정녀, 남편이 순교한 이, 신앙 때문에 소박 맞거나 가정 박해를 못 견뎌 도망친 여성들, 이들은 철저한 혈연 중심의 가부장 사회에서 어떻게 생활했을까? 그들이 ‘출가외인’, ‘남녀유별’이라는 굴레 속에서 여성의 일자리라고는 따로 없는 조선 사회를 살아낸 힘은 무엇이었을까?

 

 

“외롭고 고단한 이 함께 살자.”

 

기해박해 때 포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식구’로 구성된 집을 다수 덮치게 되었다. 1839년 4월 11일 남명혁이 체포되고 포졸들의 출장소가 된 그의 집에, 한식구인 여성 여섯 명이 자수하러 나타났다. 이들은 서울 이매임의 집에 사는 여성들이었다.

 

이매임의 올케 허계임과 두 딸 이정희와 이영희는 봉천 시골 마을에서 천주교를 봉행하며 살았다.

 

아버지가 외교인이어서 동정으로 살려던 두 자매는 시련에 맞부딪쳤다. 언니 이정희는 아버지가 외교인과 결혼시키려 하자 3년간이나 다리 병으로 일어서지 못하는 체했고, 약혼자는 다른 데로 장가들었다. 나중에 신자와 혼인했으나 2년 만에 과부가 되어 고모 이매임의 집으로 갔다. 동생 이영희도 동정을 지키려고 고모의 집으로 도망쳤다. 뒤이어 자매들의 모친 허계임은 성사를 받으려고 시누이 집으로 갔다가 눌러 앉게 되었다.

 

이매임은 또 김성임과 김 루치아도 받아들였다. 김성임은 첫 남편과 불화로 헤어지고 서울에 올라와서 점쟁이의 장남과 재혼했다. 그때 천주교를 알게 되었는데 남편이 죽자, 미신 행위에 가담했던 과거를 보속하고자 집을 나와 신자들 집으로 전전하며 잔심부름을 했다. 한편 반물집(옷이나 피륙 따위에 짙은 남색 물을 들여 주는 집)의 딸 김 루치아는 열네 살 때 스스로 동정을 서원하고 신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자신을 받아 주는 집에서 살았다.

 

사연도 각각인 이들 신앙 동거인 여섯 명은 박해가 시작되고 남명혁과 이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고문을 용감하게 이겨냈다는 소식을 듣고 용기를 내었다. 그들은 함께 남명혁의 집으로 가서 거기 있던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들은 10일가량 옥에 갇혔다가 형조로 이송되었다.

 

 

이상한 구성원, 여성들의 집

 

기해박해 순교자 중에서 여성들끼리 사는 집 이야기는 숱하다. 가령, 양반 댁 부인 조 바르바라의 경우는, 남편이 딸을 외교인과 혼인시키려 하자 두 딸 이영덕과 이인덕을 데리고 서울로 도망왔다. 앵베르 주교는 초기에 그들 보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면 죽을 위험에 놓인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회장들에게 그들을 도와 달라 부탁했다. 그렇게 마련된 조 바르바라의 허름한 집에는, 외교인과 혼인했던 이 가타리나와 그의 딸 조 막달레나도 가정 박해를 피해 와서 머물렀다.

 

그밖에 궁녀였던 전경협과 박희순도 함께 살았고, 동서 관계의 과부들인 한 안나와 김 바르바라도 공동 생활자였다. 한영이와 그의 딸 권진이는 이경이와 같이 생활했다. 유 체칠리아와 정정혜 엘리사벳도 신자들 집을 돌았다.

 

집안 전체가 움직일 때는 교우촌을 찾아가는 것이 수월하다. 그러나 여성 혼자 박해를 피해야 할 때, 특히 도회지에서 박해를 만난 여성 신자들은 결국 신자들의 집을 떠돌게 된다. 천주교 신자가 체포될 때 그 집에 얹혀 살던 교우들이 함께 붙들리는 일이 허다했다. ‘꼽추 할머니’ 김 루치아도 천주교 본분을 막는 외교인 남편 밑에서 박대를 견디다 못해 신자 집안을 전전하며 살다가 71세에 옥사했다.

 

여성들은 신자들의 집을 떠돌다 비슷한 처지의 동료를 만나면 여성들끼리 모여 사는 ‘식구’를 형성했다. 이러는 사이에 혈연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조선 사회에서, 신앙을 위주로 한 공동체가 나타났다. 그리고 여성 신자들은 이 새 공동체를 통해서 조선의 전통적 가족 틀을 벗어나 개개인이 집안의 독립된 구성원임을 자각해 갔다.

 

 

유배지조차 순교자 가족의 피신처로

 

1839년 6월 14일에는 포졸들이 전라도 광주에 있는 한 집을 수색했다. 나이도 신분도 가지각색인 노인 한 명과 과부 두 명, 혼인한 부인 두 명, 젊은 동정녀와 어린이가 한 명씩 있는 집이었다.

 

집주인 홍재영(1779-1839년)은 신유박해 때 순교한 홍낙민의 셋째 아들이었다. 그는 신유박해 때 배교하고 유배되어 40년 가까이 철저한 기도 생활로 이를 보속했다. 1832년 내린 대사령이 배교를 전제로 했기 때문에 홍재영은 이를 거부하고 유배지에 계속 남았다. 그는 1839년 기해박해 때 피신하는 교우들에게 임시로 머물 곳을 제공하고, 갈 곳 없는 여인들을 식구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신자들은 다른 신자와 순교자 가족들의 어려움을 자기 일로 여기고, 있는 것을 갔다 주기를 넘어 자신들의 생활 공간을 열어 주었다. 그래서 아무리 어려운 때라도 서로 나눌 것이 있었다. 이러한 나눔이 있었기에 순교자들은 부인과 자녀들을 두고 순교할 수 있었다. 물론, 순교한 이들은 남은 신자를 위해 전구했다.

 

1839년 4월 27일 새벽, 아직 체포를 면한 앵베르 주교는 순교한 신자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지냈다. 주교는 시체를 묶어 거적으로 싸면서, 사는 동안 고단했던 순교자들에게 합당한 대우를 하고 싶었다. 귀한 옷을 입히고 비싼 향료를 발라 주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그는 너무 가난했고, 또 교우들에게 위험이 너무 컸다. 주교는 다만, “이제 우리는 하늘에 많은 보호자를 가지게 되었다.”라고 위로했다.

 

순교한 이와 남은 이는 살아서는 생활 공동체요, 죽어서는 기도 공동체가 되었다.(본고에서 속명으로 소개한 여성은 모두 시성되었다.)

 

*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 영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 교수. 대구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 위원, 대구가톨릭학술원 회원, 대구대교구와 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위원이며, 안동교회사연구소 객원 연구원이다.

 

[경향잡지, 2020년 8월호,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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