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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프란치스칸 영성6: 인노첸시오 3세 교황, 1209년 작은 형제들 회칙 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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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8-23 ㅣ No.1467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6) 인노첸시오 3세 교황, 1209년 작은 형제들 회칙 인준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1209년 작은 형제들의 수도회 회칙과 생활을 구두로 인준했다.

 

 

첫 번째 추종자들과 수도회 인준

 

프란치스코가 포르치운쿨라에서 첫 번째 형제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바로 몇 주 후의 일이었다. 그들 중 첫 번째 사람은 아시시의 부유한 젊은이인 퀸타발레(Quintavalle)의 베르나르도였다.

 

그는 프란치스코를 자기 집에 초대하여 (우연히도 그의 집은 아직 아시시에 남아 있다) 저녁 식사를 함께하였다. 밤에 프란치스코는 그 친구의 집에서 묵었는데, 베르나르도는 프란치스코가 밤새도록 기도하고 있었던 것을 알아차렸다. 그다음 날 아침 베르나르도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프란치스코와 함께 그는 아시시 광장에 있는 성 니콜라오 성당으로 가서, 함께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복음서를 들춰보았다.

 

세 번이나 성경을 펼쳤는데 다음의 구절들이 나왔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태 19.21);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루카 9,3);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이 성경 말씀들은 프란치스코가 시작한 복음 운동에 있어서 삶과 회칙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같은 해인 1208년 4월에 두 명의 형제가 더 프란치스코와 베르나르도의 삶에 가담하였는데, 그들은 대성당 참사위원이었던 베드로 카타니(Pietro Cattani)와 에지디오(Egidio 혹은 Giles)였다. 이날은 4월 23일이었다. 그들이 합류하자마자 그들은 둘씩 짝지어 설교 여행을 떠났다. 프란치스코와 에지디오는 안코나(Ancona)의 마르키아(혹은 마르케-Marches)로 갔다.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의 수도회 인준

 

1209년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을 위해 간단한 회칙을 써 주었다. 이것은 주로 앞에서 인용한 복음 내용과 비슷한 복음 구절들로 구성되었다. 그는 대담히도 동료들을 데리고 로마에 가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을 만나 자신들의 생활양식을 인준해줄 것을 청하기로 결심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용감한 행동이었다.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그런 평신도 설교자 그룹에 대해서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사실 교황은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왜냐하면, 이런 그룹의 사람들 대부분은 이단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복음을 설교하였고, 제도 교회의 성직자에 대해 직접적으로 반대되는 측면에서 복음적 가치들을 살았다. 교회의 성직자들은 비윤리적으로 복음을 설교하는 것에 대해서와 추문이 될 만한 그들의 예식들에 대해서 비난하였다. 당시 많은 이단 그룹이 있었는데, 특히 프랑스 남부 지방과 이탈리아 북부 지방에 많이 있었다. 이들 중 카타리파 이단이 가장 위험한 그룹이었다. 마치 평신도가 교회의 제도에 대항하여 치솟아 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통찰력이 뛰어난 정치가였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머리였다. 그는 성 바오로의 요한(Giovanni Colonna de San Paolo)추기경이 데리고 온 이 거지 그룹에 대해서 많은 의구심을 품었지만, 그 후 프란치스코가 이단에 빠지지 않고 평신도들과 성직자들 사이에서 순수한 개혁을 시도하는 데 있어서 도구가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전통에 의하면 교황이 꿈에서 교회를 어깨로 떠받치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프란치스코이다.)

 

그래서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작은 형제들의 수도회의 회칙과 생활을 구두로 인준해 주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형제들을 작은 형제들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형제들이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 진정한 형제들로서,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미천한 이들(minores)로서 살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12명의 형제로 구성된 이들은 기쁨에 넘쳐 아시시로 되돌아왔다. 그들은 오르테(Orte)에서 잠시 머문 후, 포르치운쿨라에서 약간 떨어진 리보 토르토(Rivo Torto)에 정착하였다. 이곳에서 그들은 나환우들을 돌보는 일을 하며 몇 달간 극도의 가난 속에서 살았다.

 

 

성녀 클라라의 합류와 클라라회의 시작

 

포르치운쿨라 성당에서 있었던 또 다른 중요한 역사적 사건 하나는 1211년에 일어났다. 3월 18일에서 19일로 이어지는 밤에 클라라가 아시시의 자기 집에서 뛰쳐나와 그 도시 성문을 열어내고는 포르치운쿨라로 향하였다. 이 계획은 귀도 주교의 허락 하에, 클라라와 프란치스코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꾸며졌던 것 같다.

 

그날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이어서, 클라라는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예루살렘 입성 기념 미사에 참여하였다. 클라라는 모든 사람이 잠든 틈을 타, 집을 나올 계획을 실행하였던 것이다. 몇 달 동안 클라라는 프란치스코를 비밀리에 만나 자기도 이 운동에 가담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그들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8월 23일,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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