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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839~1868년 3대 순교자 김익례 · 김면호 가족의 행적과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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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8-14 ㅣ No.1232

1839~1868년 3대 순교자 김익례 · 김면호 가족의 행적과 가계도

 

 

국문 초록

 

이 글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 사제들의 서한과 신자들의 증언, 관찬 자료, 『벽위편』, 족보 자료를 정리·분석하여 김익례 가족의 생애와 순교 과정을 재구성한 것이다. 1839년부터 1868년까지 김익례 가족 중 10명이 순교했으나 현재까지 관련 자료가 정리되고 약전이 저술된 것은 김면호가 유일하다. 따라서 김면호를 포함한 김익례 가족의 역사를 정리하고 가계도를 작성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김익례 가족은 영평에 대대로 살던 안동 김씨 가문이며 김익례의 외가는 연안 이씨 가문으로 둘 다 남인 당파에 속해 있었다. 김익례의 외당숙 이명호는 1801년 순교자이다. 김씨 가족은 김익례를 통해 1834년경 천주교에 입교했다. 1839년 장남 김익례(안토니오)와 3남 김응례 형제, 모친 이희연(가타리나)이 붙잡혀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다가 순교했다. 김익례의 나머지 형제들은 흩어져 살았지만 계속 신앙생활을 했다. 1866년에 5남 김면호(토마스)가 새남터에서 순교했으며, 1868년에는 4남 김 베드로와 그 가족(아들 김 마태오 부부와 형수)이 서울에서, 김 베드로의 누나와 여종점이가 충주에서 순교했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김면호의 큰아들도 잡혀서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해 순교했다.

 

김씨 가족 순교자 10명과 관련 순교자 이명호와 점이를 포함한 김익례 가족의 가계도(외가 연안 이씨 포함)를 작성하여 제시했다.

 

 

1. 머리말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신자 개인의 생애와 신앙, 특히 천주교 금압기에 시련과 고난을 극복하면서 순교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자료 수집과 정리, 분석은 가장 기초적인 연구 분야이다. 개인뿐 아니라 신앙공동체에 대한 연구도 중요한데 교계제도(교구, 주교-신부-신자), 지역 공동체(교우촌, 공소, 본당)와 함께 가족 공동체에 대한 기초 연구도 필수적 요소이다.

 

천주교 금압기에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한국천주교회에서는 시복시성 추진과 맞물려 개별 순교자에 대한 자료 수집과 자료집 간행, 약전 서술이 이루어져 왔다.1) 동시에 천주교 신앙 전파와 신앙생활 유지의 기초공동체이자 선조를 본받아 순교의 길을 걸었던 신자 가족의 관계를 밝히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가계도(가계표)도 작성되었다.2)

 

순교자 약전과 가계도는 작성 당시 파악 가능한 자료들을 종합하여 서술함으로써 교회사 연구자와 교회사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으나 새로 자료가 발굴되거나 이전 자료의 오류가 확인되면 그 정확성과 효용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약전과 가계도가 주로 시복시성 대상자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관련 순교자나 가족 구성원에 대해서는 내용이 소략되거나 누락된 경우가 있었다. 따라서 기초 자료의 수집과 정리, 분석과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약전을 수정 · 증보해야 하며, 정밀하게 가족관계를 추적하여 가계도를 작성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3대에 걸쳐 순교자들을 배출한 김익례 가족에 주목하고자 한다. 기해년(1839)부터 무진년(1868)까지 김익례의 모친, 김익례 형제(5남 1녀), 김익례 형제의 자식 중 10명이 천주교 신앙을 지키다가 목숨을 바쳐 순교자가 되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이들 가족 중 관련 자료가 정리되고 약전이 저술된 것은 김익례 형제의 막내 김면호3) 토마스(2020년 현재 ‘하느님의 종’)가 유일하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작성한 김면호의 약전4)에는 1839년 순교한 김익례 · 김응례 형제와 모친 이씨만 언급될 뿐 다른 형제나 가족에 대한 내용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또한 1980년대에 작성된 ‘초기 교회 신자 가계표’와 ‘병인박해 순교자 가계표’에도 김익례-김면호 가족에 대한 내용이 빠져 있다.

 

김익례 · 김응례 형제와 모친 이씨는 1839년 순교자이지만 1839년 관련 핵심 자료인 『기해일기』(1840년대 작성)와 페레올(J. Ferréol) 주교의 「1839년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1846년 작성), 다블뤼(A. Daveluy)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1859년 저술)과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1860년 저술)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5) 다만 김면호의 포도청 진술(1866년)과 『병인치명사적』(1876~1923년 수집·정리)의 김면호에 대한 증언, 칼레(A. Calais) 신부의 ‘병인박해로 희생된 조선인 순교자들’ 보고서(1867년 작성)에 간략하게 언급될 뿐이다. 이러한 내용은 달레(Ch. Dallet)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1979~1980년 역주서 간행)6)와 『한국가톨릭대사전』7)(1985년[구판]과 1994~2006년 간행)에 실리게 되었고, 김면호의 약전과 인터넷을 통해 일반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주교회의의 약전(2018년 간행)에서는 김면호가 5남 1녀 중 5남으로 태어났다고 명기하면서도 그의 형인 김익례, 김응례, 모친 이씨 외에 다른 형제자매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1839년 당시 천주교 탄압 과정을 현장에서 기록했던 앵베르(L. Imbert) 주교와 모방(P. Maubant) 신부의 서한, 이만채(李晩采)의 『벽위편(闢衛編)』(1931년 편찬) 중에 김익례와 김응례, 모친 이씨, 다른 가족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또한 『병인치명사적』의 기록에는 김면호의 다른 형제자매(김면호의 형 김 베드로와 누나)는 물론 김면호의 아들과 조카 부부(김 베드로의 아들 김 마태오 부부)까지 1868년 시기에 순교했음이 확인된다. 또한 위에 언급된 칼레 신부의 보고서에는 칼레 신부가 직접 김면호의 형제들을 만났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현재의 ‘김면호 약전’에는 그 가족에 대한 자료가 누락되어 있거나 활용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1839년부터 1868년까지 김익례 가족 관련 자료들을 다시 검토하여 김익례 가족의 생애와 순교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2장에서는 1839년 시기에 순교한 김익례 · 김응례 형제와 그 모친 이씨에 대해 정리하고 김씨 집안의 내력을 자세히 밝힐 것이다. 3장에서는 1866년과 1868년 시기에 순교했던 김면호 형제와 그 자식들에 대해 정리하고, 4장에서는 2~3장의 내용을 바탕으로 김익례 가족의 관계를 종합하여 가계도를 작성할 것이다. 이를 통해 3대에 걸쳐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의 길을 걸었던 김익례 가족의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2. 1839년 순교자 김익례 · 김응례 형제와 그 모친 이희연

 

앞서 언급했듯이 현재까지 김익례와 김응례 형제, 모친 이씨는 김면호8) 토마스 관련 기록에서만 확인되었다. 관련 사료를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A) 병인(1866) 7월 18일 죄인 김면호 사호(邪號, 세례명) 도마(道馬, 토마스) 47세

[심문] 너는 곧 기해사옥(己亥邪獄) (죄인) 익례(翼禮), 응례(應禮)의 아우이다.…[답변] 저는 본래 안동 김씨(安東金氏) 반명(班名, 양반)으로서 큰형과 중형[伯仲], (저까지) 삼 형제가 모친을 모시고 주동(鑄洞)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기해년(1839)에 큰형과 중형이 갑자기 사학(邪學)(이라고 하여)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 나이는 19세였습니다. (저는) 스스로 큰형과 중형에게 물들어 (사학을) 배웠고 큰형에게서 사호(邪號) 도마(토마스)를 받았습니다. 제 형들과 제 모친 세 모자가 기해년 이후 3년 안에 (모두) 화를 당했습니다.9)

 

(B) 김 토마스, 김계호 金季好, 나이 46세

김계호 토마스는 매우 지체 높고 상당한 재력을 지닌 양반 가문 출신이다. 그의 가족은 신앙에서 있어서도 매우 유명하였는데, 1839년 박해 때 그의 모친과 첫째 형제가 순교하였고 또 다른 형제는 옥사하였으며… 김씨 가족 여섯 자녀들은 모두 독실한 신자였다. 그들은 김계호 토마스가 15세 때에 신앙을 받아들였고, 신앙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고향인 경기 영평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10)

 

(C) 김 도마(토마스) 계호는 경기 영평(永平) 사족(士族)이라. 그 부친은 외교(外敎, 비신자)로 죽고 그 모친과 형제 다섯이 갑오년간(1834)에 문교(聞敎)하고 고향을 떠나 서울 와서 모자 형제 다 열심 수계(守誡)하더니 기해년 군난(窘難, 박해)에 그 모친과 형은 잡혀 옥중에서 죽고…11)

 

(D) 김 도마(토마스)의 일기초―자(字)는 계호(啓浩), 김 토마스 열경(悅卿)(의) 삼촌(김면호) 도마는 본디 경기 영평 땅에서 여러 대(代)를 식록(食祿, 국가의 녹을 먹음)하는 집 자손이요, 또 참판(參判) 이승은의 외손(外孫)이요, 수령(守令, 고을 관장)(을) 지낸 이의 조카라. 당세(當世)에 번화함과 형세가 남에게(남보다) 낮지 아니하더니 (이)전 기해년에 그 모친 이씨(李氏)와 그 형들이 함께 치명하고…12)

 

사료 (A)는 김면호의 1866년 8월 27일(음력 7월 18일) 포도청 심문 내용13)이고 (B)는 칼레 신부가 1867년에 작성한 김계호(김면호) 순교 보고서이며, (C)와 (D)는 『병인치명사적』에 실린 신자들의 증언 내용이다.14)

 

위 내용을 종합해 보면, 김익례-김면호 가족은 안동 김씨로 경기 영평(永平)15)에 대대로 살던 사족(士族) 집안이었다.16) 형제는 모두 6명(5남 1녀)17)인데 수령을 지낸 이의 조카였고, 외조부는 참판 이승은이었다. 부친은 비신자로 죽었고 모친 이씨와 형제들이 1834년경에 천주교에 입교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향인 영평을 떠나 서울 주동(鑄洞, 현재 서울 중구 주자동)으로 이주했다가 1839년에 김면호의 맏형 김익례(金翼禮)와 중형 김응례(金應禮), 모친 이씨가 잡혀 1839년 이후 3년 안에 순교했다. 칼레 신부의 보고서에 따르면 모친 이씨와 김익례 · 김응례 형제 중 한 명이 먼저 순교하고 나머지 형제는 나중에 옥사한 것으로 보인다. 1820년생인 김면호는 큰형과 중형에게 천주교를 배웠고 큰형 김익례에게 세례명을 받았다. 즉 김면호가 김익례에게 대세(代洗)를 받았고 ‘토마스’라는 세례명도 김익례가 선택한 것이다.18) 이로 볼 때 김씨 집안이 천주교에 입교하는 데 김익례가 중추적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사료들에서는 김익례와 김응례, 모친 이씨, 다른 가족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김익례와 김응례의 세례명이라든가 모친 이씨의 이름과 세례명, 일찍 죽은 부친과 수령을 지낸 삼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또한 김익례와 김응례, 모친 이씨가 어느 시기에 체포되었고 어떤 심문을 받았으며, 어떻게 순교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앞서 언급한 주요한 교회 측 기록(기해일기, 페레올 주교의 순교자들의 행적, 다블뤼 주교의 약전과 비망기)은 물론 1839년 당시 『일성록』이나 『승정원일기』, 『포도청등록』 같은 관변 측 기록에도 해당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엽까지 천주교 배척(척사[斥邪])에 관한 여러 문헌을 모은 책인 이만채의 『벽위편』19) 7권 ‘기해치사(己亥治邪)’에 김익례와 그 가족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E) 포도청에서 물고(物故)한 등급, 이희연(여자) 등 남녀 38인

이희연(李姬燕, 김의공[金義恭]의 처, 교리 승운[升運]의 딸, 판서 익운[益運]의 조카딸. 명호[明鎬]의 종매[사촌누이]) 진술하기를, “영평(永平) 금수정(金水亭)의 김씨 집에 출가했는데, 저의 아들 익례(益禮)가 천주교 책을 권하여 가르치고, 또 사호(邪號, 가타리나[加多尼羅])도 지어주었으며, 둘째 아들 영례(永禮)의 처 성남(聖南)도 또한 배웠습니다.”

김익례(金益禮, 희연의 아들, 사호는 안당[安堂, 안토니오]) 진술하기를, “범세형(范世亨, 앵베르 주교)을 정하상의 집에서 만나 보았습니다.”

아우 응례(應禮, 사호 무거[無居], 모두 5형제)20)

 

(F) 포도청에서 배교자를 놓아준 등급, 이기원 등 남녀 61인

이기원(李起元, 사적[邪賊] 승훈의 아들, 사호[세례명] 마티아[麻之阿]) 진술하기를, “유(여항덕) 신부를 남이관의 집에서 만나보고, 나가(모방 신부)를 김안당(익례[益禮])의 집에서 보았으며, 정가(샤스탕 신부)를 권득인의 집에서, 범세형을 정하상의 집에서 보았습니다.…”

이성남(李聖南, 김영례의 아내, 이희연의 며느리)21)

 

사료 (E)는 1839년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다가 죽은 신자 38명 중 여성 이희연과 그 아들 김익례, 김응례에 대한 내용이다. (F)는 포도청에서 배교한 후 풀려난 신자 61명 중 이기원과 이성남에 대한 내용인데, 이기원(이신규 마티아)22)은 김익례에 대해 진술했고, 이성남은 이희연의 며느리(김익례의 제수)였다. 이 사료를 통해 모친 이씨의 이름과 세례명, 김익례와 김응례의 세례명, 세 모자의 심문 내용과 순교 사실, 같이 붙잡혔던 둘째 며느리의 존재가 확인된다. 아울러 모친 이희연의 가족관계가 명시됨으로써 족보와 같은 다른 자료를 활용하여 상세한 가족 구성원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정확한 날짜가 나오지는 않지만 1839년 포도청으로 잡혀가 심문을 받은 김씨 가족은 어머니인 이희연(李姬燕) 가타리나, 큰아들 김익례(金益禮)23) 안토니오, 둘째 며느리 이성남(李聖南), 셋째 아들 김응례(金應禮) ‘무거’24)였다. 김응례와 이성남이 진술한 내용은 기록되지 않았으며, 다만 가족관계(5형제,25) 둘째 아들 김영례[金永禮]의 아내가 이성남)만 밝혀져 있다.

 

반면 이희연의 진술은 좀 더 자세한데 천주교에 입교한 과정이 나와 있다. 즉 큰아들 김익례의 권유로 천주교 책을 보았고 아들의 가르침을 따라 신자가 되었다고 했다. 또한 김익례가 그 모친에게 가타리나라는 세례명을 지어주고 자신의 제수인 이성남에게도 천주교를 가르쳤음을 알 수 있다. 김익례의 진술에는 앵베르 주교를 정하상의 집에서 만나보았다고 나오는데, 이기원(이신규)의 진술에 의하면 그 자신이 모방 신부를 김(익례) 안토니오 집에서 보았다고 했다. 이로 볼 때 김익례가 프랑스 선교 사제들을 찾아가 성사를 받고 충실히 신앙생활을 했으며, 동시에 자신의 집(서울 주동)을 교회 모임 장소(공소[公所])로 만들어 다른 신자들을 불러모았음을 알 수 있다. 모방 신부가 입국한 이후인 1836년부터 1839년 사이에 김익례가 주동 공소의 회장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김익례를 중심으로 가족 신앙공동체를 형성한 김씨 집안 사람들은 1839년 포도청에 붙잡혀 갔지만, 며느리 이성남이 배교하고 풀려난 것을 제외하고는 모친 이희연, 김익례와 김응례 형제가 모두 심문을 받다가 ‘물고’(순교)26)한 것이 확인된다. 사료 (B) 칼레 신부의 보고서와 비교한다면, 이희연과 김익례 · 김응례 형제 중 한 명이 먼저 ‘물고’되고, 나머지 형제가 나중에 옥중에서 사망(옥중 순교)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사료 (E)에서는 이희연의 가족관계에 대해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즉 남편인 김의공(金義恭), 부친인 교리 이승운(李升運), 삼촌인 판서 이익운(李益運), 사촌 오라버니인 이명호(李明鎬)가 명시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죄수를 심문할 때 가족관계를 밝히는 것은27) 일반적인 사항이기는 하지만 삼촌과 사촌까지 언급한 경우는 매우 특이한 것이다. 이는 ‘사학(邪學)’ 죄인인 이희연의 삼촌과 사촌 역시 천주교와 관련이 되었기 때문에 특이 사항으로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이희연의 사촌 오라버니인 이명호(2020년 현재 ‘하느님의 종’)는 1801년(신유) 당시 천주교 신자로 널리 알려져 있던 인물이고,28) 집안에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조카이자 양자인 이명호를 독살했다고 의심받았던 이가 이익운29)이다. 이러한 연유로 이희연의 삼촌(숙부) 이익운과 사촌 이명호가 명시된 것으로 보인다.30)

 

이러한 가족관계를 통해 이희연의 집안이 남인에 속하는 명문 연안 이씨 가문임을 알 수 있고, 족보 자료를 통해 그의 부친 이승운이 이징대(李徵大, 이조판서로 추증)의 차남으로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정5품)를 지냈음을 확인할 수 있다.31) 이징대는 3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이정운(李鼎運), 차남 이승운, 삼남 이익운이 그들이며,32) 이정운의 아들 이명호가 이익운의 양자로 들어갔던 것이다. 사료 (D)에서 김면호의 외조부로 언급된 ‘참판 이승은’은 증언자가 ‘교리 이승운’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증언한 것으로 보인다.

 

사료 (A)~(D)에서는 김익례 가문이 안동 김씨이자 영평에 대대로 살던 사족 집안이며 김익례의 삼촌이 수령 관직을 지냈다고 했는데, 이희연의 진술에는 ‘영평 금수정(金水亭)’에 사는 김씨 집안에 출가했으며 이희연에 대한 협주에서 김의공의 아내라고 표기되어 있다. 여기서 금수정은 안동 김씨 문중에서 대대로 소유·관리하던 정자로 현재 경기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에 있다.33) 이를 통해서도 김익례 가문이 영평을 세거지로 삼은 ‘구(舊) 안동 김씨’34) 집안이라는 것이 증명된다. 또한 족보 기록 등에 의하면 김의공은 안동 김씨 문온공파(文溫公派)에 속하며 부친은 김택인(金宅仁), 모친은 심징(沈徵)의 딸이었고 형 김의우(金義友)가 있었다.35) 『남보』 등에 김의공의 자녀들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그 아내는 이승운(李升運)의 딸로 나온다. 이로써 김익례 형제의 부모가 안동 김씨 김의공과 연안 이씨 이희연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또한 김의공의 형인 김의우가 ‘현감’이었다는 기록36)을 통해 사료 (D)에서 ‘수령을 지낸 이(삼촌)’가 바로 김의우(김익례의 백부)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이제까지 교회사 학계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사료 (E)~(F)(『벽위편』)와 족보 등의 기록을 통해 1839년 포도청으로 끌려가 심문을 받은 김익례 안토니오 가족의 진술 내용과 순교 사실, 김익례 가문(안동 김씨)과 그 외가(연안 이씨)의 가족관계가 확인되었다.

 

『벽위편』과 족보 외에 교회 측 자료인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의 1839년 박해 보고서37)에서도 김익례 가족의 체포 시기와 신앙 활동에 관한 내용이 확인된다. 김익례 가족과 관련하여 이들 선교 사제의 서한들은 이제까지 주목받지 못했다.

 

(G) (7월) 17일에 (우리의) 소중한 통역관 유(진길)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아들(유대철 베드로)이 체포되었고, (그 집에서) 다량의 중국 서적과 성물도 압수되었고, 홍 베드로와 6개월 된 아기를 젖먹이는 그의 아내가 나루터에서 잡혔고, 마르타와 도망 다니는 처녀, 김 안토니오의 아우들도 잡혔다.38)

 

(H) (7월) 17일에 통역관인 유(진길) 아우구스티노가 체포되었는데,… 비슷한 시기에, 홍 베드로와 6개월 된 아기를 젖먹이는 아내가 체포되었는데,… 비슷한 시기에 마르타라는 여자와 홀로 거룩하고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신봉할 목적으로 가출한 다른 여자도 체포되었고, 김 안토니오도, 그의 어머니도, 그의 제수도, 아주 어린 조카도 체포되었습니다. 김 안토니오는 교회 서적들을 베껴 쓰는 일로 유명해진 사람이요 교리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오랫동안 과부로 살아온 착하고 성스러운 어머니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기도 하고 착실한 어머니가 보여준 모범 생활을 본보기로 삼아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아들 오 형제와 딸 한 명을 잘 키워 모두가 신자답게 살게 해주었습니다.39)

 

사료 (G)는 앵베르 주교의 1839년 박해 보고서이고, (H)는 앵베르 주교의 보고서를 수정·보완한 모방 신부의 박해 보고서이다. 이 사료들을 통해 1839년 7월 17일(양력) 유진길이 체포되었던 무렵에 김 안토니오와 그 가족들이 체포된 것을 알 수 있는데 두 자료 사이에 내용상 차이가 있다. 앵베르 주교의 보고서에는 김 안토니오가 아니라 그의 아우들이 잡혔다고 나온 반면에, 모방 신부의 보고서에는 김 안토니오와 그 모친, 제수, 어린 조카가 체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모방 신부의 보고서에는 앵베르 주교의 보고서와 달리 김 안토니오와 과부인 그 모친에 대한 설명과 김 안토니오 형제 6남매가 모친과 함께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앵베르 주교의 보고서 내용만으로는 김 안토니오가 김익례 안토니오인지 확정하기 어렵지만,40) 수정 · 보완된 모방 신부의 보고서 내용을 보면 김 안토니오와 그 가족이 1839년 순교자 김익례 가족임을 알 수 있다.41) 즉 김 안토니오는 김익례, 모친은 이희연, 제수는 이성남으로 비정할 수 있다. 사료 (E)~(F)(『벽위편』)와 비교해 보면 내용상 일치하는 면이 많지만 몇 가지 다른 점도 있다.

 

모방 신부의 보고서에는 김 안토니오의 동생(김응례)에 대한 언급이 없고 대신 『벽위편』에 나오지 않는 어린 조카가 체포되었다고 나온다. 당시 피신지에서 신자들을 통해서만 체포 소식을 입수했던 모방 신부의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부정확한 사실이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김씨 집안의 입교 과정에 대한 모방 신부의 설명과 이희연의 진술이 서로 다르다. 모방 신부는 과부였던 모친 이희연이 주도적으로 6남매의 자녀들을 가르치고 신자답게 살게 했다고 서술한 반면, 이희연의 진술에서는 큰아들 김익례에게 천주교를 배웠고 아들이 가타리나라는 세례명을 지어주었다고 나온다. 즉 김익례를 통해 모친과 나머지 가족이 신자가 되었다고 한 것이다. 두 기록 중 어느 쪽이 더 신빙성이 있는지를 밝히기는 어렵지만, 이희연 본인의 진술이 더 사실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모방 신부42)는 김(익례) 안토니오에 대해 “교회 서적들을 베껴 쓰는 일로 유명해진 사람이요 교리를 잘 아는 사람”이며 그 가족들은 모범적인 신자들이라고 서술했다. 명문 안동 김씨 출신인 김익례는 천주교 내부에서 지식인층에 속했을 것이고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 교리 공부에 매진했을 것이다. 자신의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전파하기 위해 천주교 서적을 배포하고 교리를 강론했을 것이며 그러한 과정에서 많은 천주교 서적을 베껴 썼을 것이다.43)

 

위의 사료들을 종합해 보면, 남인에 속한 명문 안동 김씨인 김익례 가족(5남 1녀)은 영평 지역에 대대로 살았으나, 1834년경 김익례를 통해 가족이 모두 천주교에 입교한 이후 서울 주동으로 이주해 신앙생활을 충실히 했다. 김익례는 자기 집에 공소를 마련하여 모방 신부를 모실 정도로 모범적인 신자이며 비중 있는 지도자(공소 회장)였다. 1839년 7월경 모친 이희연 가타리나, 장남 김익례 안토니오, 삼남 김응례 ‘무거’, 둘째 며느리 이성남이 같이 포도청에 붙잡혀 심문을 받았다. 심문 과정에서 김익례의 제수인 이성남은 배교하고 풀려나왔지만, 김익례와 김응례 형제, 모친 이희연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죽음(물고, 옥사)을 맞이했음을 알 수 있다.

 

 

3. 1866년과 1868년 순교자 김면호 남매와 그 자식들

 

1839년 천주교 박해 과정에서 붙잡히지 않았던 김익례의 형제들(둘째, 넷째, 다섯째 아우와 누이)과 그 가족들의 행적은 막내 김면호 토마스를 제외하면 교회사 학계에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김면호가 1839년 이후 이리저리 떠돌면서 1849년부터 신앙을 멀리하게 되자 두 형과 신자들이 그를 책망하고 권면했다는 내용과 1866년 박해가 발발한 직후에 피신을 권유하는 중형에게 김면호가 혼자 피할 수 없다고 제안을 거절하는 내용이 약전에 소개되어 있다.44) 본고 2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김면호에게 권면했던 두 형은 둘째 김영례와 넷째 김 베드로이고, 피신을 권유했던 중 형은 김영례로 추정할 수 있다.45) 이와 같이 병인박해 때 순교한 김면호 형제에 대한 자료 정리와 본격적인 연구가 미진한 상황이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2장에서 인용했던 자료와 『병인치명사적』의 다른 자료들을 활용하여 김면호 형제들의 생애와 순교 과정을 정리하겠다.

 

6남매 중 막내인 김면호의 활동과 순교에 대해서는 『한국가톨릭대사전』의 항목과 주교회의 약전에 잘 정리되어 있는데,46) 1839년 체포를 피한 이후 1866년 순교하기까지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839년 이후 김면호는 약과 붓 등을 팔며 이리저리 떠돌았고, 기유년(1849)부터는 신앙을 멀리했다. 1865년쯤부터 다시 신앙생활을 했고,47) 흥선대원군과 베르뇌 주교의 협상 과정에 참여했다.48) 김면호는 대원군의 사돈인 조기진을 통해 대원군에게 서한을 제출했는데, 아무런 대답을 받지 못하자 지방으로 피신했다. 이후 김면호는 대원군이 주교와의 만남을 원한다는 전갈을 받았고 베르뇌 주교를 데려오려고 1865년 12월 초 평양으로 떠났다. 그러나 주교를 만나지 못했고, 주교와 대원군의 회담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 선교 사제와 신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김면호도 1866년 7월(음력)에 체포돼 포도청으로 끌려가 심문을 받았다. 군문효수형을 언도 받고 1866년 9월 10일(음력 8월 2일)49) 새남터로 끌려가 처형됨으로써 순교했다.

 

김면호를 제외하고 1839년에 붙잡히지 않았던 형제들인 둘째 김영례, 넷째 김 베드로, 유일한 여자 형제인 김 베드로의 누나와 그 밖의 가족들에 대한 자료는 다음과 같다.

 

(B-1) 김 토마스, 김계호 金季好, 나이 46세

1839년 박해 때 김계호의 모친과 첫 번째 형제가 순교하였고 또 다른 형제는 옥사하였으며, 세 번째 형제도 신앙을 열심히 실천하다가 1866년에 우리(칼레 · 페롱 신부)가 조선을 떠나기 며칠 전에 여러 성사들을 받고 사망했다. 네 번째 형제와 누이는 우리 담당구역에 있었고 신실하게 성사를 받았다. 김씨 가족, 여섯 자녀는 모두 독실한 신자였다.50)

 

(D-1) 김 도마(토마스)의 일기초―자(字)는 계호(啓浩), 김 토마스 열경(悅卿)(의) 삼촌

…(김면호가) 중년에 세속(世俗)에 끌림이 되어 수계하기를 그치거늘…10년을 헛되이 지내되 그 처자(妻子)는 항상 권하여 성사(聖事)를 받게 하더니…(김면호가 순교한) 그 후에 (김면호) 토마스의 맏아들(본명은 모르고)이 또 잡혀가서 옥중에서 다섯 달 만에 교(수)하여 치명하였다 하기로 대강 기록하나이다.51)

 

(E-1) 포도청에서 물고(物故)한 등급, 이희연(여자) 등 남녀 38인

(이희연의 진술)…둘째 아들 영례(永禮)의 처 (이)성남도 또한 (큰아들 김익례에게) 배웠습니다.52)

 

(I) 김 베드로, 김열경(金悅卿)의 부(父)

김 베드로는 기해년(1839)에 치명한 김 토마스의 넷째 아우요, 병인년(1866)에 치명한 (김계호) 토마스의 넷째 형이다. 기해 군난(박해) 후에 청주(淸州) 땅으로 이사하여 생애(生涯, 생계 유지)하되 세상이 무서워 교중(敎衆, 교회 신자) 사람과 상관(相關, 관계를 맺음)하기를 적게 하고 외교인(外敎人, 비신자) 사는 지방에 가서 다만 처자만 데리고 수계하고 성사 받기를 1~2년 사이에 한 번씩 하고 살더니 수계하기가 타당치 못하다 하여 진천(鎭川)으로 이사하여 살더니, 무진년(1868) 4월에 그 둘째 아들 (김) 마태오와 두 며느리와 형수(兄嫂)와 함께 잡혀 서울로 가서 5월 18일(양력 7월 7일)에 다 교(수)하여 치명하고, 다만 맏며느리만 살아왔기에 자세히 들은즉 아무 문목(問目, 조목대로 심문함)하는 말도 없고 형벌도 없이 있다가 치명하였다 하기로 기록하오며53)

 

(J) 김 베드로의 누님은 (본명은 모르고 열경[悅卿] 고모) 기해년 전에 외인(비신자) 권 진사(進士)의 맏며느리가 될 새 본디 시집갈 때 영세(領洗)도 못 하고 성교도리(聖敎道理)도 자세히 듣지 못하였더니, 기해년에 친정 모친과 형(오빠)이 치명한 후에 성교도리를 명백히 들어 아는지라. 친정에서 (시집올 때) 데리고 간 교전비(轎前婢) 점이로 더불어 봉교(奉敎)하기로 작정하고 그 시집의 모든 이단(異端)의 일과 사망(邪妄, 사악하고 망녕됨)을 홀로 끊고 일절 행하지 아닌 연후에 비로소 영세하고 1년 1차씩 그 종을 데리고 타지방에 나아가 성사를 받은지라. 그 사언행위(思言行爲, 생각과 말과 행위)와 열심을 모든 교우(가) 일컫더니, 무진년에 이르러 잡혀 종(점이)과 함께 충주(忠州) 옥(獄)에서 치명하였다 하기로 대강 기록하오나54)

 

사료 (B-1)~(E-1)는 본고 2장에서 인용한 사료 중 김면호 형제와 그 가족에 대한 내용만 다시 정리한 것이고, 사료 (I)와 (J)는 『병인치명사적』에서 넷째 김 베드로 가족과 그 누나에 대한 내용을 뽑은 것이다.

 

사료 (B-1)(칼레 신부의 보고서)에서 가리키는 형제의 순서는 서술 과정에서 먼저 나오는 대로 붙인 것이지 형제의 서열(장남-차남 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즉 칼레 신부가 언급한 1839년 순교자인 ‘첫 번째 형제’와 ‘또 다른 형제’는 맏이 김익례와 셋째 김응례이고, 1866년에 사망한 세 번째 형제와 그 당시 살아 있던 네 번째 형제는 둘째 김영례와 넷째 김 베드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사료 (I)에서 넷째 김 베드로가 1868년에 순교했으므로 칼레 신부가 언급한 1866년에 죽은 형제는 둘째 김영례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5남 중 차남인 김영례는 1839년에 잡혔다가 배교하고 풀려나온 이성남(李聖南)의 남편(사료 (E-1))인데 앞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한동안 신앙에서 멀어졌던 막내 김면호를 책망하고 1866년 초 박해가 발발했을 때 김면호에게 피신을 권유했던 ‘중형’이 바로 그다. 그는 6남매 중 유일하게 관원에게 붙잡히지 않았고 순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평생 열심히 신앙을 실천하다가 1866년 칼레 신부 일행이 조선을 떠나기 며칠 전(9월 하순경)에55) 성사를 받고 숨을 거두었는데, 선종(善終)56)의 삶을 살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사료 (I)에 따르면, 4남인 김 베드로는 1839년 이후 청주로 이사했는데 신자들과의 교류를 최소화하면서 비신자 지방에 가서 처자만 데리고 신앙생활을 했다. 선교 사제들이 다시 입국한 이후에는 1~2년 사이에 한 번씩 성사를 받았는데, 신앙생활이 여의치 못하자 진천 지역으로 이사했다. 1866년 박해는 무사히 지나갔지만 1868년 4월에는 가족들과 함께 잡혀가 서울에서 7월 7일(음력 5월 18일)에 교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김 베드로가 1866년 이전에 진천으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칼레 신부의 보고서에 의하면 1866년 9월경에 김 베드로와 그 누이가 칼레 신부 담당 구역에 있었고 신실하게 성사를 받았다. 당시 칼레 신부와 페롱 신부가 피신해 있던 ‘목천’ 지역57)이 ‘진천’ 지역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이러한 추론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칼레 신부에게 독실한 신자로 인정받았던 김 베드로와 그 가족은 함께 잡혀갔고, 큰며느리만 살아서 돌아와 그들의 순교 사실을 증언했다. 이때 함께 순교한 이들은 김 베드로와 그 둘째 아들 김 마태오 부부, 김 베드로의 형수였다. 그의 아들로 이름이 밝혀진 김열경(金悅卿) 토마스는 붙잡히지 않은 큰아들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여기서 김 베드로와 함께 순교한 김 베드로의 형수가 누구인지를 추정해 본다면, 김 베드로의 세 형(김익례, 김영례, 김응례)의 아내 중 한 명일 것이다. 1839년에 배교하고 풀려나왔던 김영례의 아내 이성남일 가능성도 있다.

 

사료 (J)에서 6남매 중 유일한 여자 형제가 확인되는데, 이름과 세례명이 밝혀지지 않았다. 대신 넷째 김 베드로의 누님(김열경의 고모)이라고 명시되어 있고, 1839년에 모친과 형이 순교했다고 나온다. 즉 1839년에 순교한 첫째 김익례와 셋째 김응례가 손위 형제(오빠)라고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6남매 중 넷째로 김익례, 김영례, 김응례의 누이동생이자 김 베드로와 김면호의 누나인 셈이다.

 

김 베드로의 누나는 1839년 이전에 비신자인 권 진사의 맏며느리가 되어 출가했다. 이 사료에 의하면 1839년 혼인하기 이전에는 천주교 교리를 잘 몰랐고 모친과 오빠들이 순교한 이후에야 세례를 받은 것으로 나온다. 모친이 6남매를 모두 신자로 잘 키웠다는 모방 신부의 보고서(사료(H))의 내용과는 서로 어긋나는 부분이다.58)

 

비신자 집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기는 어려운 일이었지만 김 베드로의 누나는 친정에서 같이 시집에 온 여종 점이59)와 함께 천주교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을 모두 끊어버렸다. 그런 연후에 세례를 받고 1년에 한 번씩 다른 지방에 가서 성사를 받았다고 하는데, 시집이 있는 곳이 비신자 마을이고 주변에 신자들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가 살았던 지역이 어디인지는 명확히 나오지 않는데, 칼레 신부의 보고서에 의하면 동생 김 베드로와 함께 칼레 신부의 성사를 받았으므로 목천의 인근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1868년에 여종 점이와 함께 충주 옥에 잡혀가 순교했으므로 충주 진영 관할 지역60)에 속했을 것이다.

 

사료 (D-1)을 보면, 김면호가 한동안 천주교 신앙을 멀리하고 있을 때에도 자신의 처자에게는 계속 성사를 받도록 권유했다고 한다. 즉 김면호의 아내와 자식들은 계속해서 신앙생활을 충실히 했던 것이다. 김면호가 순교한 이후 그 가족들에게도 박해가 이어져서 결국 김면호의 큰아들(세례명은 모름)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잡혀가 옥중에서 다섯 달 만에 교수형을 당해 순교했다.

 

주교회의에서 간행한 ‘김면호 약전’에는 1839년 순교한 가족들에 대해 언급하면서도 1866년 이후 1868년까지 순교한 나머지 가족에 대한 내용은 없다. 하지만 관련 자료들을 종합하여 검토한 결과 1839년에 순교한 김면호의 모친(이희연)과 형들(김익례·김응례)은 물론 1868년 무렵까지 김면호를 비롯하여 그의 큰아들, 넷째 형 김 베드로, 누나, 형수, 조카인 김 베드로의 둘째 아들(김 마태오) 부부까지 10명의 순교자가 김씨 집안에서 나온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순교하지는 않았지만 둘째 김영례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다가 1866년 9월경 선종했음을 알 수 있었다.

 

 

4. 맺음말 - 3대 순교자 김익례 · 김면호 가족의 가계도

 

위의 본문에서 앵베르 주교의 보고서, 모방 신부의 보고서, 칼레 신부의 보고서 등 파리외방전교회 선교 사제들의 서한 자료와 『병인치명사적』 등의 증언 자료, 『포도청등록』 등의 관찬 자료, 『벽위편』 기해 관련 자료, 족보 자료들을 종합하여 김익례 가족 순교자들의 행적과 가족관계 등을 살펴보았다.

 

김익례 안토니오와 김응례, 이희연 가타리나는 종래 교회사에서 ‘김면호의 형과 모친이자 1839년 순교자’로만 알려져 있었는데 관련 자료들을 통해 그들의 세례명과 이름, 가족관계, 체포 시기, 입교 과정과 활동 내역, 심문 내용, 순교 방식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김면호의 약전에도 소개되지 않았던 다른 형제(김 베드로와 그 누나)와 조카 부부(김 베드로의 아들 김 마태오 부부), 김면호의 큰아들, 김면호의 형수에 대해서도 그 행적과 순교 사정을 정리해 보았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하여 김익례 안토니오 가족의 역사를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김익례 가족은 영평을 세거지로 한 ‘구 안동 김씨’ 가문으로 남인 당파에 속했으며, 김의공과 연안 이씨 이희연 가타리나 사이에 5남 1녀(김익례, 김영례, 김응례, 딸, 김 베드로, 김면호)가 태어났다. 외가인 연안 이씨 집안도 남인에 속했는데 이희연의 숙부인 이익운은 척사에 앞장섰지만, 그의 양아들 이명호 요한(김익례에게는 외당숙)은 신앙을 지키다가 목숨을 잃어 순교했다. 초창기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형성되고 발전되는 과정에서 김익례의 외당숙인 이명호는 다른 신자들과 함께 활동하다가 신앙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신앙과 순교의 전통은 그 후대에 이어지게 된다.

 

부친 김의공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모친 이희연과 6남매는 함께 살다가 1834년경 큰아들 김익례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했다. 김익례는 모친과 막냇동생 김면호에게 세례명(가타리나와 토마스)을 지어주었고 제수인 이성남에게도 천주교를 가르쳤다. 김익례 가족들은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기 위해 고향 영평을 떠나 서울 주동에 자리를 잡았으며, 선교 사제들이 입국한 이후에는 김익례가 모방 신부를 자기 집(공소)에 모셨고 정하상의 집을 방문하여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에게 성사를 받았다. 공소 회장이었던 김익례는 천주교 교리를 잘 알았고 교회 서적을 베껴 쓰는 일로 유명했다. 6남매 중 넷째인 유일한 여자 형제는 1839년 이전에 비신자인 권 진사의 맏며느리로 시집을 갔다.

 

1839년 7월경에 김익례와 김응례 형제, 모친 이희연, 둘째 김응례의 아내 이성남이 주동 집에서 붙잡혀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았는데 배교를 거부하고 신앙을 지키다가 ‘물고’되거나 옥중에서 숨을 거둬 순교했다. 다만 이성남은 배교를 하고 풀려났다.

 

양반 가문 출신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목숨까지 바쳐야만 하는 결단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김익례와 그 가족들은 천주교를 받아들였고 모범적인 신자이자 교회의 지도자로서 활동했다. 1839년 박해가 일어나자 김익례 가족은 체포되었고 김익례, 김응례, 이희연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붙잡히지 않았던 김익례의 나머지 동생들은 흩어져 살았지만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계속 신앙생활을 했다. 1866년 9월 하순 이전 당시 목천에 피신해 있던 칼레 신부와 페롱(S. Féron) 신부에게 김 베드로와 그 누나가 성사를 받았다. 이때 둘째 김영례는 성사를 받고 선종했다.

 

1866년 박해가 발발한 후 그해 9월 10일에 막내 김면호 토마스가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했다. 1868년 7월 7일에는 넷째 김 베드로와 그 가족(아들 부부와 형수)이 서울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같은 해에는 김 베드로의 누나가 같이 신앙생활을 하던 여종 점이와 함께 충주로 잡혀가 순교했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김면호의 큰아들도 잡혀가 다섯 달 동안 감옥생활을 하다가 교수형을 당해 순교했다.

 

이와 같이 김익례 가족은 삼대에 걸쳐 10명의 순교자를 배출했으며, 특히 6남매 중 선종한 2남을 제외한 5명의 형제자매가 모두 순교했다. 김익례 형제의 외당숙인 이명호 요한과 김익례 가족의 여종이었던 점이도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이다.

 

현재 시복시성이 추진되는 순교자와 증거자들뿐 아니라 개인 신자와 가족 신앙공동체에 대한 사료의 수집과 정리, 약전 서술과 가계도 작성이라는 기초적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 논문은 그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김익례 가족을 대상으로 자료를 정리, 분석하여 간략하나마 그들의 역사를 재구성한 것이다. 앞으로도 관련 자료의 수집과 본격적인 연구가 계속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제를 남겨두면서 마지막으로 본문에서 인용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김익례 가족의 가계도(외가 연안 이씨 가계 포함)를 작성하여 제시했다.

 

 

 

 

참고문헌


1. 자료

 

『병인치명사적』

『승정원일기』

『일성록』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우포도청등록』, 『좌포도청등록』

『숭정 177년 갑자식 사마방목』(국립중앙도서관[古朝26-29-75]).

『진신보(搢紳譜)』 1·2·3·4(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929.3-Eu55]).

한국천주교회200주년기념사업위원회 역사자료편찬부, 「연안 이씨 계보」, 『남보(南譜)』 1, 한국천주교회200주년기념사업위원회, 1984

한국천주교회200주년기념사업위원회 역사자료편찬부, 「(구)안동 김씨 계보」, 『남보(南譜)』 2, 한국천주교회200주년기념사업위원회, 1984.

모방 신부, 「1839년 8~9월 서한 중 박해 보고서」(AMEP, Vol.1260, f.184)

칼레 신부, 「병인박해로 희생된 조선인 순교자들(1867년 작성)」(MEP V.579, f.1225-13)

 

2. 도서

 

김시준 역, 『新完譯 闢衛編―韓國天主敎迫害史』, 명문당, 1987.

박순집 증언, 김영수 역, 『박순집 증언록』, 성황석두루가서원, 2001.

뮈텔 주교 지음, 하성래 감수, 『치명일기』, 성황석두루가서원, 1986.

샤를르 달레 원저, 안응렬·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1, 천주교 수원교구, 2011.

수원교회사연구소 판독·역주, 『앵베르 주교 서한』, 천주교 수원교구, 2011.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부록,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고문·색인 편,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문화위원회, 『A-MEP Vol. 579(B) Corée 1797-1874 필사 문서 판독 자료집』,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문화위원회, 2010.

 

3. 논문

 

방상근, 「병인박해」, 『한국천주교회사』 3, 한국천주교회사연구소, 2010.

이석원, 『19세기 동서양 충돌과 조선 천주교』, 수원교회사연구소, 2018.

_____, 「모방 신부·샤스탕 신부·앵베르 주교의 서한에 나타난 조선대목구의 현황」, 『박해의 배경, 실상, 순교 영성』, 천주교 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2019.

조현범,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사본 71」, 『교회와 역사』 426, 한국교회사연구소, 2010.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편찬, 「김면호(토마스, 1820~1866)」,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18.

차기진, 「김면호 金勉浩(1820~1866)」, 『한국가톨릭대사전』 2, 한국교회사연구소, 1995.

한국가톨릭대사전 편찬위원회, 「김면호 金勉浩(1820~1866)」, 『한국가톨릭대사전』,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4. 기타

 

‘괴목유래’ 벽암두릉연가(블로그), http://blog.daum.net/dldml2xhd/15920173 [2020. 1. 20 열람].

‘디지털포천문화대전’, http://pocheon.grandculture.net/Contents/Index?local=pocheon [2020. 1. 20 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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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해년(1839)·병인년(1866) 순교자들인 103위 성인, 신해년(1791)·신유년(1801) 순교자들이 주축인 124위 복자, 초창기부터 1879년까지 포함된 제2차 시복 대상자 133위 하느님의 종,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에 대한 약전과 자료집이 파리외방전교회나 한국천주교회(주교회의) 주관 아래 간행되거나 편찬 중에 있다.

 

2) 1980년대에 ‘초기 교회 신자 가계표’와 ‘병인박해 순교자 가계표’가 작성되었고, 이후 개인 연구자나 연구소, 성지 차원에서 순교자 가족에 대한 가계도가 작성, 수정되고 있다(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부록,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178~206쪽 ; 한국교회사연구소,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고문·색인 편,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486~514쪽).

 

3) 교회 측 자료에는 이름이 ‘김계호’로 나오지만, 관변 측 자료에는 ‘김면호’로 나온다. 교회 측 자료와 관변 측 자료에서 나오는 이름이 서로 다를 때에는 공식적인 이름이 사용되는 관변

측 자료를 기준으로 삼는다.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도 ‘시복 대상자로 선정할 때 김면호’라는 이름을 택했다.

 

4)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편찬, 「김면호(토마스, 1820~1866)」,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18, 149~152쪽.

 

5) 1839년 순교자 중 시복 대상자들은 『기해일기』와 페레올 주교의 ‘순교자들의 행적’ 기록에 근거해서 선정되었다. 따라서 이 자료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김익례는 시복 대상자가 될 수 없었고 그에 대한 신자들의 목격 증언이 채록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김익례가 교회사 학계나 일반 신자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6) 샤를르 달레 원저, 안응렬·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456쪽. 달레 신부가 정리한 김면호 관련 내용은 칼레 신부의 보고서를 축약한 것이다. 원문에서는 김면호의 형들의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역주자가 각주 31번에 『우포도청등록』을 인용하면서 두 형의 이름이 김익례, 김응례임을 밝혔다.

 

7)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김면호 金勉浩(1820~1866)」, 『한국가톨릭대사전』,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220쪽 ; 차기진, 「김면호 金勉浩(1820~1866)」, 『한국가톨릭대사전』 2, 한국교회사연구소, 1995, 1178쪽.

 

8) 김면호의 한자 이름은 『좌포도청등록』에는 ‘金勉浩’로, 『우포도청등록』에는 ‘金冕浩’로 기록되어 있다(『좌포도청등록』, 병인년[1866] 7월 18일 기사, 영인본, 409~410쪽 ; 『우포도청등록』, 병인년[1866] 7월 18일, 영인본, 641~642쪽). 다른 신자의 진술에는 김계호(金季浩)로 나오기도 한다(『좌포도청등록』, 병인년[1866] 10월 17일, ‘沈世慶 年五十七’, 영인본, 423~424쪽 참조). 『승정원일기』 병인년(1866) 8월 2일 사형 집행 기사에는 ‘金勉浩’로 나온다. 교회 측 기록인 『치명일기』 13번과 『병인치명사적』 10권 27쪽, 30쪽에는 ‘김계호 토마스’로 나온다. 『병인치명사적』 17권 1쪽에는 한자 이름이 啓浩(계호)로 나오고, 칼레 신부의 보고서에는 金季好(김계호)로 나온다.

 

9) 『좌포도청등록』, 병인년(1866) 7월 18일, 영인본, 409쪽 ; 『우포도청등록』, 병인년 7월 18일, 영인본, 641~642쪽.

 

10) 칼레 신부가 1867년에 작성한 ‘병인박해로 희생된 조선인 순교자들’(MEP V.579, f.1225-13)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문화위원회, 『A-MEP Vol. 579(B) Corée 1797-1874 필사 문서 판독 자료집』,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문화위원회, 2010, 225쪽.

 

11) 『병인치명사적』 10권 30~31쪽.

 

12) 『병인치명사적』 17권 1쪽.

 

13) 김면호의 포도청 심문 내용은 의정부로 보고되었고, 그가 기해 사학죄인 익례, 응례의 아우라는 사실이 『일성록』에도 기록되었다(『일성록』 고종 3년[1866] 8월 1일, ‘金勉浩 卽己亥邪學翼禮應禮之弟’).

 

14) 사료 (D)에는 소제목이 있어서 김면호의 한자 이름과 조카 이름(김열경 토마스)이 표기되어 있다. 김열경에 대해서는 본고 3장에서 다시 언급하겠다.

 

15) 영평은 현재 경기 포천시 영중면, 일동면, 이동면, 영북면, 창수면 지역이다. 조선 초기에는 영평현이었는데, 1836년에 영평군으로 승격했으며 1914년 포천군에 편입되었다.

 

16) 『치명일기』(13번)에는 김계호(김면호)가 안동 박골 태생으로 나온다. 『박순집 증언록』(1권 31앞)에는 ‘안동 방골’ 태생이며 태중교우(胎中敎友, 부모 대부터 신자 집안)로 나온다(뮈텔 주교 지음, 하성래 감수, 『치명일기』, 성황석두루가서원, 1986, 16쪽 ; 박순집 증언, 김영수 역, 『박순집 증언록』, 성황석두루가서원, 2001, 81쪽). 김면호 가족에 대한 『병인치명사적』의 증언 내용과 뒤에 언급할 『벽위편』 자료를 보면 김면호가 안동 지역 출신이라기보다는 대대로 영평에 살았던 안동 김씨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17) 『병인치명사적』 17권 4쪽에 의하면, 5형제 중 넷째 김 베드로의 누님이 나온다. 즉 김면호가 6남매 중 막내였다.

 

18) 포도청 심문에서 김면호는 익례, 응례, 자신을 포함해 삼 형제라고 진술하고 다른 형제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아직 잡히지 않은 다른 형제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19) 조선 후기 서학서의 전래부터 1801년(신유)까지 척사 기록을 모은 이기경(李基慶)의 『벽위편』을 그 후손인 이만채가 1931년에 새로 편집, 추가한 것이다. 그 역주본과 원본의 영인본을 실은 책이 김시준 역, 『新完譯 闢衛編―韓國天主敎迫害史』, 명문당, 1987이다. 이하 ‘『벽위편』’으로 약칭한다.

 

20) 『벽위편』, 341~342쪽, 389쪽(원문).

 

21) 『벽위편』, 342~343쪽, 389쪽(원문).

 

22) 이승훈 베드로의 아들로 그의 이름은 원래 기원(起元, 또는 基元)인데 1856년 3월에 신규(身逵)로 개명했다(『벽위편』, 343쪽, 389쪽[원문]).

 

23) 김익례의 한자 이름은 김면호의 심문 내용이 실린 『포도청등록』과 『일성록』에는 ‘익례’(翼禮)로 나오지만, 위의 『벽위편』에는 ‘익례’(益禮)로 나온다.

 

24) 『병인치명사적』에 넷째 김 베드로와 다섯째(막내) 김면호가 확인되므로 김응례는 셋째 아들이 분명하다. ‘무거(無居)’가 어느 성인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김응례의 진술을 채록하는 서리가 잘못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다. 『병인치명사적』(17권, 3~4쪽)에서 넷째 김 베드로의 형제 중 김 토마스가 1839년에 순교했다고 나온다. 이를 통해 볼 때 김익례와 김응례 중 한 명의 세례명이 토마스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김익례의 세례명이 안토니오이므로 ‘토마스’가 김응례의 세례명일 가능성이 있다. 다만 『병인치명사적』의 증언자가 김익례의 세례명을 토마스로 잘못 알고 진술했을 가능성도 있으므로 김응례의 세례명이 ‘토마스’라고 확증하기는 어렵다.

 

25) 『벽위편』에 언급된 ‘5형제’는 여자 형제를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병인치명사적』(17권 4쪽)에는 여자 형제가 1839년 이전에 이미 비신자인 권 진사의 맏며느리가 되었다고 나오므로, 이희연이나 김익례 형제가 1839년 심문받을 당시에 시집간 딸(여자 형제)을 아예 언급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26) 물고(物故)는 원래 ‘고의가 없었다’는 뜻으로 심문 중에 죽는 사고사를 의미한다. 그러나 형리들이 정해진 규정을 어기고 가혹한 형벌을 가하면서 죽음에 이르게 하거나 또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고의로 죽이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물고’ 역시 ‘순교’의 한 형태로 인정받는다.

 

27) 보통 부모와 조부모, 자녀와 같은 직계가족을 명시하며, 여성인 경우에는 남편과 시부모 관계가 덧붙여진다.

 

28) 이명호 요한은 1795년 이전에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했다. 집 근처에 별채를 마련해 혼자 생활하면서 주일에 신자들과 만나 함께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신앙을 전파했다. 1801년(신유)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자 부친 이익운은 집안에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해 그에게 신앙을 버릴 것을 강요했다. 이명호가 이를 거절하자 이익운은 사람들을 시켜 강제로 독약을 먹여 아들을 죽였다(다블뤼 주교,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f.193 ; 조현범,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사본 71」, 『교회와 역사』 426호[2010. 11], 한국교회사연구소, 2~3쪽).

 

29) 이익운(1748~1817)은 남인(南人)의 영수 채제공(蔡濟恭)의 문인이었다. 1801년 경기도 관찰사 때 척사(斥邪)에 앞장서서 천주교 신자들을 심문하고 사형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양자 이명호와 관련되어 계속 천주교를 비호한다는 탄핵을 받았다. 벼슬은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30) 천주교 신자를 심문하는 관원의 입장에서 이희연과 이명호가 사촌 남매이자 ‘사학죄인’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희연의 진술에 의하면 연안 이씨 집안과 상관없이 아들 김익례가 천주교 서적을 권하고 천주교를 가르쳤다.

 

31) 한국천주교회200주년기념사업위원회 역사자료편찬부, 「연안 이씨 계보」, 『남보(南譜)』 1, 한국천주교회200주년기념사업위원회, 1984, 515~518쪽.

 

32) 이정운(1743~1800)과 이익운(1748~1817)의 생애와 활동 사항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8, 한국학중앙연구원, 1991, 167쪽, 218쪽에 정리되어 있다. 이희연의 부친 이승운은 형제들과 달리 일찍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연도는 확인할 수 없었다. 대신 그의 부친 이징대가 아들 삼 형제의 출생 기념으로 고택 후원에 나무를 심었고 그에 대한 기념비가 남아 있어 이승운의 출생연도가 1746년임을 알 수 있다(‘괴목유래’ 벽암두릉연가[블로그] http://blog.daum.net/dldml2xhd/15920173 [2020. 1. 20 열람] 참조).

 

33) 금수정은 오가리 마을 앞을 흐르는 영평천(永平川) 변 절벽 위에 있는 정자이다. 원래는 조선 초기에 김명리(金明理, 1368~1438)가 현재의 장소에 정자 우두정(牛頭亭)을 지었는데, 후에 시인이자 서예가로 명성이 높았던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이 정자 이름을 금수정으로 고쳤다고 한다. 금수정은 안동 김씨 문중에서 소유하며 몇 차례 중수를 거쳐 유지되다가 6·25전쟁 때 완전히 소실되었다. 1980년대에 포천시의 지원으로 같은 장소에 현재의 정자를 복원했다(‘디지털포천문화대전’, http://pocheon.grandculture.net/Contents/Index?local=pocheon [2020. 1. 20. 열람] 참조). 정자를 처음 세운 김명리는 김의공(김익례의 부친)의 14대 조부이다.

 

34) 19세기 세도 가문으로 유명한 ‘신(新) 안동 김씨’와는 분파가 다른 안동 김씨 가문이며, 김익례 집안은 남인에 속해 있었다. 족보(『남보』)와 과거 합격자 기록(『사마방목』), 양반 사족 가계 기록(『진신보』)에는 김익례와 그 형제들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그 부친 김의공과 선조들에 대한 기록이 명확히 나온다.

 

35) 「(구)안동 김씨 계보」, 『남보(南譜)』 2, 1984, 1117~1118쪽 ; 『숭정 177년 갑자식 사마방목』, 국립중앙도서관, 古朝26-29-75 ; 『진신보(搢紳譜)』 1·2·3·4, 규장각한국학연구원, 古929.3-Eu55.

 

36) 『남보』 2, 1117~1118쪽 ; 『진신보』 1·2·3·4, 규장각한국학연구원, 古929.3-Eu55.

 

37) 1839년 8월 11일 이전에 앵베르 주교가 작성한 「1839년 조선의 서울 박해 보고서」는 1839년 천주교 박해의 현장에서 박해의 발발과 진행 과정, 신자들의 체포, 심문, 순교 사정을 생생하게 기록한 자료이다. 앵베르 주교의 지시에 따라 스스로 포졸에게 나가 체포된 모방 신부도 출발하기 전(8월 말~9월 6일 이전)에 박해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앵베르 주교가 남긴 ‘박해 보고서’를 바탕으로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추가·보충했다(이석원, 「모방 신부 · 샤스탕 신부 · 앵베르 주교의 서한에 나타난 조선대목구의 현황」, 『박해의 배경, 실상, 순교 영성』, 천주교 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2019, 26쪽).

 

38) 앵베르 주교의 ‘박해 보고서’(A-MEP, Vol.1254, f.154) ; 수원교회사연구소 판독·역주, 『앵베르 주교 서한』, 천주교 수원교구, 2011, 557쪽.

 

39) 모방 신부, 「1839년 8~9월 서한 중 박해 보고서」(A-MEP, Vol.1260, ff.182~184).

 

40) 김익례는 심문에서 앵베르 주교를 정하상 집에서 보았다고 진술(사료 (E))했는데 주교댁인 정하상 집에 가서 앵베르 주교에게 성사를 받았다는 의미이다. 이때 김익례를 만나본 앵베르 주교가 자신의 ‘박해 보고서’에 ‘김 안토니오’(김익례) 가족을 언급했던 것으로 보인다.

 

41) 역주서 『앵베르 주교 서한』에는 ‘김 안토니오’를 ‘구산 출신의 1841년 순교자 김(성우) 안토니오’라고 추정하고, 당시 체포된 김 안토니오의 아우들을 김(성우)의 아우인 ‘김덕심 아우구스티노와 김 베드로 알강달아’라고 협주를 달았다. 모방 신부의 박해 보고서를 보더라도 역주서의 협주가 오류임은 분명하다. 김(성우) 안토니오는 1839년 7월이 아닌 12월(음력)에 그의 사촌과 함께 붙잡혔으며, 그의 모친은 이미 1834년 무렵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1, 천주교 수원교구, 2011, 367~369쪽. 김성우의 조카 김 막달레나의 증언 ;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1, 411쪽. 김성우의 제수 엄 체칠리아의 증언 참조).

 

42) 사료 (F) 이기준(이신규)의 진술, 즉 모방 신부가 김익례의 집(공소)에서 신자들을 만나 성사를 주었다는 내용을 상기한다면, 모방 신부는 김익례 가족을 직접 만났고 김익례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43) 자발적으로 기득권을 포기하고 몰락 양반의 위치에 처하게 된 김익례가 천주교 서적을 베껴쓰는 일을 생업으로 삼았을 가능성도 있다.

 

44)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149~151쪽. 위의 내용은 『병인치명사적』 17권, 1~2쪽에 나온다.

 

45) 『벽위편』, 341~342쪽, 389쪽(원문)과 『병인치명사적』 17권, 3~4쪽 참조.

 

46)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149~152쪽 ; 『한국가톨릭대사전』 2, 1178쪽.

 

47) 주교회의의 약전에는 김면호가 1865년경에 서울 상동(尙洞, 현재 서울 중구 남대문로3가 · 남창동 · 북창동 · 태평로2가에 걸쳐 있던 마을)에 이주했다고 나온다. 그러나 약전이 인용한 자료들(칼레 신부 보고서, 포도청등록, 칼레 신부의 보고서)에서는 ‘상동’이라는 지명은 확인되지 않는다. 약전 서술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거나 참조한 다른 자료의 전거를 밝히지 않은 것일 수 있다.

 

48) 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의 주선으로 조선이 프랑스·영국과 동맹을 맺어 러시아를 견제하고 그 대가로 조선 정부가 천주교를 공인하는 방안을 말한다. 김면호는 다시 신앙생활을 하면서 베르뇌 주교의 집주인인 홍봉주, 승지를 지낸 관료인 남종삼과 교류했다. 안전상 베르뇌 주교가 전면에 나서지 않고 대신 홍봉주, 남종삼, 이유일, 김면호 등이 흥선대원군 측과의 연락을 담당했다(이석원, 『19세기 동서양 충돌과 조선 천주교』, 수원교회사연구소, 2018, 138~147쪽 참조).

 

49) 김면호의 순교일에 대해 주교회의의 약전 본문에는 9월 8일로 나오고 각주 8번에는 9월 10일로 나오는 자료를 따로 제시했다. 그러나 관찬 사료인 『포도청등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음력 8월 2일(양력 9월 10일)에 어영청 군사들이 김면호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했다고 나온다.

 

50) 칼레 신부가 1867년에 작성한 ‘병인박해로 희생된 조선인 순교자들’(MEP V.579, f.1225-13) ; 『A-MEP Vol. 579(B) Corée 1797-1874 필사 문서 판독 자료집』, 225쪽.

 

51) 『병인치명사적』 17권, 1~3쪽.

 

52) 『벽위편』, 341~342쪽, 389쪽(원문).

 

53) 『병인치명사적』 17권, 3~4쪽.

 

54) 『병인치명사적』 17권, 4~5쪽.

 

55) 1866년(병인) 박해 당시 체포되지 않은 선교사 3명 중 리델 신부는 7월 1일에 먼저 중국으로 탈출했고, 페롱 신부와 칼레 신부는 목천에 피신해 있었다. 페롱과 칼레 신부는 1866년 9월 하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강화도로 향했다. 철수한 프랑스 함대와 만나지 못한 두 신부는 강화도에 잠시 머물러 있다가 10월 11일경 배를 타고 중국으로 출발했다(방상근, 「병인박해」, 『한국천주교회사』 3, 한국천주교회사연구소, 2010, 265쪽). 위에 나오는 ‘조선을 출발할 때’는 목천을 떠난 9월 하순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56) ‘선생복종’(善生福終)의 준말로, 일상생활에서 천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착하게 살다가 복되고 거룩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57) 목천은 현재 충남 천안시 목천읍, 동면, 병천면, 북면, 성남면, 수신면 지역이다. 조선시대에는 목천현이었는데 1894년에 군으로 바뀌었다가 1914년 천안군에 편입되었다.

 

58) 어느 자료가 더 신빙성이 있는지 명확히 판단하기는 어렵다. 다만 좀 더 내용이 구체적인 사료 (J)가 사실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59) 여종 점이가 천주교에 대해 잘 몰랐다가 김 베드로의 누나와 함께 입교했는지 아니면 김익례의 집에 있을 때부터 천주교에 입교했고 나중에 권씨 집안에 와서 김 베드로의 누나를 가르치거나 권유해서 세례를 받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만약 후자라면 김익례가 자신의 가족뿐 아니라 거느리고 있던 하인(노비)까지 천주교를 전파했을 가능성이 있다.

 

60) 조선 후기에 충청도 진영(陣營) 중 후영(後營)이 충주목에 설치되어 있었으며, 충주 외에 청풍, 단양, 괴산, 연풍, 음성, 영춘, 제천 지역의 치안과 군사를 관장했다. 이 지역 중 충주와 음성은 당시 진천 지역과 맞닿아 있었으며 목천과도 비교적 멀지 않은 곳이었다. 김 베드로의 누나가 충주나 음성 지역에 거주했을 가능성이 있다.

 

[교회사 연구 제56집, 2020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이석원(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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