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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달자 시인, 주교 수품 50주년 맞은 정진석 추기경과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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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8-09 ㅣ No.591

신달자 시인, 주교 수품 50주년 맞은 정진석 추기경과의 대화


발명가 꿈꾸던 공대생, 예수님 닮은 아흔의 사제가 되다

 

 

신달자 시인이 정진석 추기경과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눴다. 정 추기경과 삶과 신앙에 대해 나눈 신 시인은 “추기경님은 영혼의 밭을 갈며 말씀의 씨앗을 뿌리고 키우고 거두는 농부와 같다”고 말했다. 서울대교구 제공.

 

 

정진석 추기경이 올해 주교 수품 50주년을 맞았다. 1970년 6월 25일 청주교구장에 임명되면서 주교가 됐고, 같은 해 10월 3일 청주교구장에 착좌했다.

 

신달자(엘리사벳) 시인이 7월 16일 주교 수품 금경축을 기념해 정 추기경을 찾았다. 모든 것이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이 시대에 무게 중심을 잡아 주는 어른을 뵙고 싶어서였다. 정 추기경을 만난 신달자 시인이 그날의 이야기를 보내왔다.

 

 

장대비 내린 뒤 몇 가닥 구름 사이로 보이는 파아란 하늘색을 닮은 추기경을 혜화동 주교관에서 만났다. 1931년생 아흔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절반은 유년시절의 맑은 순수성을 그대로 지닌 건강한 얼굴, 예수님 닮아가는 얼굴이라고 하면 맞겠다. 안심이었다.

 

누구나 요즘 모든 일이 불안하고 두려운 상태를 살고 있어 이럴 때 인생 지침의 어른을 뵙고 싶었는데 뜻이 이루어졌다. 허영엽(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부위원장) 신부의 전화를 받고 달려가듯 설레며 갔던 것이다.

 

추기경을 뵙는 순간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다. 우리가 밥상이나 책상이 흔들거리면 종이를 접어 다리 밑에 깔고 수평을 잡지 않는가. 추기경은 그 흔들거리는 세상을 스스로 구겨진 종이가 되어 세상의 수평을 잡고 계신 분이었다. 그러나 모습은 맑은 하늘로 보이는 일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이 있으신 것이리라.

 

“50년 전 생각이 나요. 제가 늦게 로마에 가서 석사 학위를 막 받고, 박사 학위 준비 겸 방학 동안에 서울교구 신부님들 미사 예물을 얻으러 미국에 갔어요. 교구 사정이 어려울 때였거든요. 그때 미국에 있는 교황청 대사관이 편지를 보내왔어요. 교황청의 편지였지요. ‘네가 서울교구장의 허락을 받고 미국에 왔느냐? 만약 허락을 받고 왔다면 그것이 네가 주교가 된다는 것에 승낙하는 것을 겸하겠다.’ 1970년 6월 25일,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 저를 제2대 청주교구장으로 임명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 거죠.”

 

오래전 이야기를 어제 이야기처럼 차분히 하시는 것을 나는 마치 예수님의 지난날을 듣는 듯 귀를 세웠다. 그때가 김수환 추기경이 교구장이었던 시절이었으며 39세에 주교가 되신 것이다.

 

1970년 10월 3일 청주 내덕동주교좌성당에서 봉헌된 주교서품 및 청주교구장 착좌 미사 때 입장하는 정진석 추기경.

 

 

서울대학교 공대생이었던 정 추기경의 원래 꿈은 발명가였다. 그러나 인간이 발명한 것은 악용될 수 있다는 것, 인간이 만든 발명품은 마침내는 무기로 사용될 수 있어 악용되지 않는 도구가 되어야겠다 생각하셨다는 것이다. 그뿐인가. 한국전쟁 때다. 살벌한 인천 상륙 끝에 서울을 탈환하는 전날 밤 골방에서 육촌 동생 미카엘과 숨었는데 지붕이 폭탄에 맞아 미카엘이 추기경 앞에서 죽은 것이다. 만약 위치가 바뀌었다면 추기경이 그렇게 됐을 거라 생각하신 것이다.

 

“왜 하느님이 나를 살리셨을까?” 이 물음은 추기경이 신학교로 가신 큰 동기가 되었다. 추기경님은 눈을 지그시 감으시면서 “사명을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명? 누구나 크고 작은 사명을 받고 태어나지만 많은 사람은 그 사명을 되돌리는 경우가 많다.

 

더 큰 계기가 있었다. 1ㆍ4 후퇴 때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돼서 마산까지 걸어갈 때였다. 덕소 근처에서 얼어있는 한강을 건너는데, 추기경이 지나간 다음에 얼음이 깨져서 뒤에 오던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추기경이 막 건너간 다음이다. 또 의성쯤 갔을 때는 추기경 바로 앞에 간 사람들이 지뢰를 밟아 죽었다. 낙동강 전투 때 뿌려놨던 지뢰였다.

 

여러 번 살아난 것이다. 추기경은 그러므로 그때마다 “반성하고 또 반성했다”고 하셨다. 그 뼈저린 죽음을 너무 많이 경험하면서 하느님이 주신 사명은 추기경의 굳건한 영혼의 뼈로 굳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 때 그것이 곧 생명 안에 사는 것을 알게 하신 뜻일 것이다.

 

마산에 도착해서는 육군 국민방위군 소위가 되었지만 한 달 만에 국민방위군 부정사건이 터져서 방위군 사령관이 처형당하고 국민방위군은 해체됐다. 그리고 대구에 있던 미8군 부대에서 통역관이 됐다. 미군 무기수송부대였는데 똑같은 부품이 트럭에도 있고, 탱크에도 있었다. 그래서 또 한 번 느낀 게 있었다. 평화의 무기가 곧장 살생 무기가 되는구나 하고.

 

“그 무렵 영적 아버지인 김영식 신부님을 만나게 됐어요. 전쟁 중에 고아 100명을 기르고 계셨지요. 부산으로 피란 왔던 고아원이 부평 미군 보급부대 옆으로 이사했는데 통역관이 필요하셨던 거예요. 신부님을 따라다니면서 고아원 운영에 필요한 물품을 얻어오곤 했지요.”

 

그때까지는 신부도, 신학도도 아니었다. 미군 신부 방에서 「성녀 마리아 고레티」 「종군 신부 카폰」 「억만인의 신앙」 책을 빌려보게 된다. 그렇게 「성녀 마리아 고레티」 책을 번역하게 되는데, 마리아 고레티 성녀는 1950년 6월 시성됐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때에 성인이 되었으니 “이분은 한국의 성인”이라고 하면서 번역을 하셨다. 가슴으로 걸어오시는 성녀가 계셨던 것이다. 책은 추기경이 신학교 1학년 때 출판이 되었다.

 

정 추기경은 2015년 가톨릭출판사를 통해 자신의 첫 번역서 「성녀 마리아 고레티」 초판본 표지와 개정판을 선물 받았다. 정 추기경은 한국전쟁 중 「성녀 마리아 고레티」를 읽고 서울대 공대 복학을 포기하고 신학교에 입학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추기경에게 지금의 생은 한 네 번, 다섯 번째인 것 같다. 살려 주시는 분이 계셨고 해야 할 과제를 손에 쥐여주시는 분 또한 계셨다.

 

“「억만인의 신앙」을 번역할 때는 우리나라 신자 수가 1%도 안 됐어요. 그래서 그게 가슴에 맺혀있었죠, 어떻게 하면 전교를 잘 할 수 있을까 하고요. 「억만인의 신앙」은 선교에 관한 책이에요. 신앙을 튼튼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이지요.”

 

번역 60년, 최근에 다시 「참 신앙의 진리」라는 새로운 제목으로 탄생되었다. 하느님이 마련하신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참 진리의 선교에서 오늘에 이르신 것이다.

 

30대 청년 주교라니, 호기심이 생겼다. “39세면, 추기경님이 교구장으로 막 부임하셨을 때 굉장히 미남이셨을 거 같아요.”

 

“미남인 건 모르겠고요.(웃음) 그때 청주교구에 미국 메리놀회 신부님이 19명, 한국 신부님이 6명이었어요. 한국 신부님들은 미국 신부님들보다 연배도 어리니까 작고 가난한 본당으로 갈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니까 생활비가 없었어요. 젊은 신부님들이 생활비 때문에 고민하고, 실망하고 그런 상황들이 벌어졌지요.”

 

그때는 다 가난하고 충북에 포장도로도 거의 없을 때였다. 주교 서품식은 1970년 10월 3일 청주에서 있었다. 그 당시 청주 사람들은 주교 서품식을 처음 보았다. 교구 설정 12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인 주교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착좌 후 일주일 동안 교구 내 22군데 성당을 다 방문했다. 간혹 신자들을 만나 본명을 물으면 “밀가루 이름요?” 하고 되물었다. 교리에는 관심 없이 외국 교회의 구호품을 받으려고 세례받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성심의 바닥에 하나씩 돌을 쌓기 시작하신 것이다. 나는 추기경의 탁월한 기억력에 감탄했다.

 

나는 문학도로서도 한 인간으로서도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에 매번 머뭇거린다. 약하고 잘 비틀거리는 내가 물었다. “추기경님은요?”

 

“사람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것 중에 마지막 작품이에요. 그렇다면 뭔가 다른 피조물에게는 없는 것을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주셨지요. 그게 지성이에요. 하느님이 만들어 주신 작품 중에서 사람만이 나를 존재케 해주시는 하느님을 의식할 수 있어요. 그것이 자유예요.”

 

자유! 뜻밖의 말씀이었다.

 

“그 자유를 인간이 남용해서 불행을 자초하는 거예요. 하느님은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너는 행복하게 살아라’ 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 태어날 때 영혼을 넣어주셨어요. 각 사람의 영혼을 단독으로 창조하셔서 아기가 태어날 때마다 새로운 창조를 해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 선생이나 나나 모두 특별한 존재예요.”

 

무엇인가 남용했다는 말씀에선 심장이 툭 떨어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남용! 인간은 그 남용과 남발로 지금 무지한 고통에 시달리는 것, 추기경은 가차 없이 지적해 주셨다. 부와 건강, 자녀 이런 것들을 다 가진 내 지인들은 어쩌다가 단둘이 얘기를 하다 보면 다들 불행하다고 한다.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안으로는 불행하다, 아프다, 외롭다고 말한다. 인간은 왜 그럴까? 행복은 어떤 것이기에 인간이 가지기 어려운지 모를 일이다.

 

“요새 전염병 때문에 다 어려워하고 있잖아요. 전염병의 근거가, 인간이 지구의 자원을 남용했기 때문이라는 학설도 있잖아요, ‘이것으로 알아들어라’ 하는. 외로움 상처 고통 모두 같은 문제에요. 재앙의 원인은 끝없는 욕망에 있어요. 우주 질서를 순종하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해요. 많이 가진다고 행복하지 않아요. 감사와 자유가 필요합니다. 특히 하느님에 대한 신뢰 부족이 원인이기도 해요. 말씀을 철저히 따르면 부족함이 없을 텐데, 조금씩 에누리를 해서 자기 멋대로 악용을 하잖아요.”

 

추기경이 내 안을 들여다보시는 것 같아 조금 자세를 고쳐앉았다. 어휴! 오래 앉아 있으면 안 되겠다고 스스로 서두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나는 다그쳤다. 왜 인간은 외로운가. 예수님이 계시는데도 말이다. 왜 부족하고 왜 상처를 받는가. 추기경도 사람인데 혹시 이런 순간은 없을까.

 

“있죠. 그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인간의 감정을 누를 수 있는 더 강한 말씀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진정한 가르침을 진정하게 듣는가. 멋대로 악용하고 나름으로 해석하는 건 아닐까. 결국, 고통만 남는 것이리라. 그렇다. 예수님을 생각하시기에 일 년에 한 권씩 책을 쓸 수 있는 무한 힘을 받으시고 실행하셨는지 모른다. 그리스도 안에 완성을 이루는 삶을 사신 것이다.

 

한국 교회 두 번째 추기경으로 임명된 정 추기경에게 2006년 3월 24일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진홍색 둥근 모자와 사각모를 차례로 씌워주고 있다.

 

 

추기경은 역경에 처했을 때보다 더 높은 뜻을 생각하고 그 생각을 기르는 분이시다. 추기경이 스스로를 ‘작은 별’이라고 지칭하실 때 추기경 앞에 꿇어앉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여러 혼란 속에 고통을 헤쳐나가셨는데 후임자인 자신은 그런 용기가 없다고 생각하셨단다. 그러나 ‘작은 별’이라고 스스로 칭하셨지만 작은 별에도 분명 빛이 있다고. 그 믿음으로 오늘까지 예수님의 뜻을 받들고 오신 것이니 큰 별이 틀림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통째로 주님의 은혜라는 것을 추기경을 통해 깊게 느꼈다. 추기경과의 만남에서 나의 첫 질문은 ‘요즘 세상에 희망이 있을까?’였다. 추기경은 힘주어 말씀하셨다.

 

“희망이 있죠. 하느님께 늘 희망을 청하면서 지냅니다.”

 

추기경은 그 희망을 구겨진 종이로 우리 사회를 받쳐 오신 것이다. 나는 동시대인으로 함께 추기경과 살아온 행운에 감사했다.

 

마지막 질문으로 트로트를 불러 보신 적이 있는지 물었다. 추기경은 고개를 흔드셨다. 옆에 앉은 허영엽 신부가 대신 대답해주셨다. “가요를 부르신 적이 있어요. 2004년 명동대성당 특강 때 최희준의 ‘하숙생’을 부르셨는데 음정 박자가 하나도 틀리지 않아서 많은 박수를 받으셨죠.” 우리는 함께 웃었다. ‘인생은 나그넷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허 신부님이 그 노래의 첫 구절을 불러 나도 따라 불렀다.

 

주교 수품 50주년 인터뷰가 트로트로 끝이 났지만, 추기경은 90년 동안 영혼의 농부였다고 생각한다. 영혼을 밭갈이하며 말씀의 씨앗을 뿌리고 키우고 거두는 농부, 그 험난한 신앙의 박토를 일구신 농부. 아무리 험하고 가파르고 아픈 길이어도 오르고 또 오르는 순교이며 예수님의 말씀을 땅으로 삼으신 추기경의 주교 수품 50주년은 아름답고 향기가 너무 진했다.

 

“인생이라는 먼 길을 가는 우리에게 그 최종 목적지와 주의사항을 알려주는 길잡이가 곧 성경”이라고 추기경은 말씀하셨지만, 추기경이 바로 우리에겐 그 길잡이라는 생각이 썰렁한 내 마음을 훈훈하게 했다.

 

‘추기경은 우리 모든 사람에게 등대지기셔요. 누가 쳐다보지 않아도 늘 불을 켜고, 바닷가에 외롭고 당당하게 서 있는 등대. 추기경이 계시니 주교 수품 50주년을 맞아 이 어지럽고 갈팡질팡한 대한민국에 등대지기로 저희가 바라보고 있습니다.’

 

건강하시고 앞으로도 계속 책도 보여주시고, 얼굴도 보여주시고, 하숙생도 부르시고, 그렇게 등대지기가 길잡이가 계속되어 주시기를 바라며 혜화동을 밝게 걸어 나왔다. 며칠 굶어도 되겠다. 든든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8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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