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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수도원 이야기: 새로운 물결 -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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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7-21 ㅣ No.650

[수도원 이야기 – 새로운 물결]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개혁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대관식이 이루어진 독일 아헨 대성당.

 

 

우산 장수가 어느 날 짚신 장수가 되려 한다면 그는 적응주의자이거나 기회주의자일 것이다. 자신의 일에 대한 가치와 철학이 없고 다만 변화에 대한 적응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산 장수가 기존의 고리타분한 우산이 아닌, 좀 더 저렴하고 안전하고 새로운 디자인의 우산을 개발했다면 그것은 개혁이다.

 

 

천 년의 마무리와 개혁

 

이 관점을 서기 1000년 무렵의 수도원 개혁에 대입해 보면, 당시 수도원은 새로운 우산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우산 장수였다. 올바른 개혁의 조건을 만족시켰다는 뜻이다.

 

샤를마뉴 대제 이후 유럽이 봉건 사회로 접어들면서 수도원은 지역 영주에 따른 세속화의 바람을 피할 수 없었으며, 수도원장의 수도원 재산 남용 또한 심심찮게 벌어졌다. 또 왕권 약화에 따른 이민족 침략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이에 첫 번째 천년기의 끝을 전후하여 유럽의 수도원은 동시다발적으로 개혁에 돌입한다. 첫 작업은 세속 권력과의 인연을 끊는 것이었다. 대표적 개혁 운동은 크게 세 군데에서 일어났다고 보는데, 오늘날 벨기에 지역에서 활동한 성 제라르도의 개혁, 룩셈부르크 남쪽 지역, 그리고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에서 시작한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이 그것이다.

 

이러한 자극에 움찔하며 몸을 움직인 인물이 있다. 바로 그레고리오 7세 교황(1073-1086년 재위)이다.

 

 

카노사의 굴욕에 담긴 실제 의미

 

1077년 1월 21일 알프스 산악지대 카노사 성 앞. 역사는 그해 겨울 추위가 유난했다고 전한다. 눈이 무릎까지 쌓인 성문 밖에서 한 남자가 맨발인 채로 벌벌 떨며 서 있었다.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였다. 황제는 그레고리오 7세의 뜻에 거스른 죄를 참회하며 사면을 청하는 중이었다. 벌써 사흘째, 동사(凍死)까지 각오한 참회였다. 그 정성이 교황의 마음을 움직였다. 결국 황제는 사면을 받고 제위를 보전할 수 있었다.

 

이를 두고 역사책은 대부분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기록한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 이는 1636년 청나라에 패한 인조가 삼전도에서 무릎 꿇은 것과 같은 그런 ‘진짜 굴욕’ 사건이 아니다. 당시 민중은 이 사건을 굴욕이 아니라 ‘승리’로 인식했다. 여론이 황제보다는 교황 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이다. 민중은 그레고리오 7세의 다양한 개혁 정책이 탐욕스러운 황제의 세속 권력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 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교황이 카노사에서 거둔 승리는 교회의 승리, 신앙의 승리였으며, 동시에 세속 지배 계층에 대한 민중의 승리였다.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의 ‘카노사의 마틸다’ 석상. 마틸다는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그레고리오 7세에게 용서를 청할 당시 카노사 성의 영주였다. 바로 그녀가 교황에게, 하인리히 4세를 너그럽게 용서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그가 황제보다 우위에 있음을 보여 주도록 중재했다고 한다.

 

 

청빈과 정결의 해이

 

‘그레고리오 개혁’은 그레고리오 7세의 이름을 바탕으로 하지만 실제로는 1046년부터 시작해 그레고리오 7세 교황 이후까지 지속된 모든 개혁을 일컫는다. 이 개혁의 초점은 교회의 외부 문제와 내부 문제로 나눠 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교회의 내부 문제, 곧 성직매매와 문란해진 독신제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먼저 성직매매를 보자. 조선 시대에 양반의 지위를 돈으로 사는 사례가 있었듯, 11세기 유럽에서는 성직을 돈으로 사는 사례가 있었다. 심지어는 대주교가, 선발된 주교 후보자의 서품을 거행하면서 돈을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 성직매매는 뿌리 뽑아야 하는 폐단이었다.

 

교회 안의 더 심각한 문제는 문란해진 독신제였다. 긴 박해가 끝나자 하느님의 신비에 참여하고자 정결을 찬양하며 금욕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과정을 앞서 살펴보았다. 자연스레 교회 안에는 정결과 독신을 추구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사제 독신제를 의무화한 것은 306년 스페인 엘비라의 지역 시노드였다. 이 시노드에서는 그 지역 성직자들의 독신 의무를 결정하였고,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모든 성직자의 의무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렇게 찬양되고 잘 지켜지던 독신제는 서기 1000년을 전후해 균열이 생긴다. 사제가 농사 지어야 하는 상황, 그래서 가정을 꾸리지 않으면 기본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던 상황 등이 사제 독신제를 흐트러트리는 요인이 될 수 있었다. 성적 문제와 관련해 느슨해진 사회 문화, 성직자에 대한 교육의 미비, 성소가 없는 이들을 교회 직무에 임명했다는 것 등도 그 원인일 수 있다.

 

교회 규율이 지켜지지 않는 것은 분명 문제였다. 성직자가 여성과 관계했다는 문제만이 아니라, 그 사이에서 생긴 자녀에 대한 문제, 그들에게 분배되는 유산, 이와 관련한 교회의 재산 관리, 이 밖에도 사목의 공백 등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교회 개혁과 축성생활의 체계화

 

이에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은 칼을 들었고 개혁 수도원이 그 의지를 뒷받침했다. 개혁적 투쟁에 나설 수 있는 사람으로는 세상의 재물이나 권력에 초연할 수 있는 수도자가 적격이었다. 이에 수도원들은 교황의 명령에 따라 성직매매를 없애고자 하는 최전선의 전사로 활동했다. 특히 그레고리오 개혁 이후 전통을 따르는 다양한 수도원이 잇달아 나타나면서 성직매매와 사제들의 쇄신 운동에 불을 지폈다.

 

동시에 수도원의 틀을 만드는, 이른바 제도화 작업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제1, 2차 라테란 공의회(각각 1123, 1139년)는 수도자와 성직자의 축성생활 형태를 모두 보호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수도자들에게는 성 베네딕토, 성직자들에게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규칙서를 적용하도록 하였다.

 

한편 교회 내 폐단을 청산하고자 수도자들도 사목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당시, 성직자들보다는 수도자들이 더 열심히 살았고 따라서 교회 개혁에 더 적합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역 성직자들도 손 놓고 바라보지만은 않았다.

 

개혁 바람이 강하게 불던 시대였기 때문에 재속 사제와 지역 성직자 모두가 힘을 모아 개혁을 도모했고, 교회는 가능한 한 이들을 황제와 영주의 간섭에서 보호하고자 노력했다. 동시에 축성생활에 대한 법적 규정을 마련하는 작업도 함께 이뤄졌다.

 

그렇다 보니 많은 형태의 축성생활이 이 시기에 기원을 두기도 한다. 의전 사제단이나 재속 사제회, 은수자, 사도적 설교가와 같은 삶의 형태가 이때 법적 형식을 갖추었고 오래된 수도원들도 수도 형식을 새롭게 제도화했다.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개혁 결과물로 모범적인 수도회들이 나타났다. 시토회, 카르투시오회, 트라피스트회 등이 그들이다. 다음 달에는 산텐의 노르베르토 성인이 1120년 프랑스 북동부의 랑 인근에 설립한 프레몽트레회를 살펴볼 것이다.

 

* 최의영 안드레아 – 교황청립 마리아의 아들 수도회(CFIC) 동아시아 준관구장. 교황청립 라테라노대학교 수도자 신학대학원(클라렛티아눔)을 졸업했다.

 

[경향잡지, 2020년 7월호, 글 ‧ 사진 최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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