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수)
(백) 부활 제4주간 수요일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프란치스칸 영성2: 바라봄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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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7-20 ㅣ No.1460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2) 바라봄의 영성


“그분을 응시하고 깊이 생각하고 관상하십시오”

 

 

이시도로 아레돈도, ‘성광을 든 클라라 성녀’, 캔버스에 유화, 1693, 프라도미술관, 스페인.

 

 

프란치스코는 성체성사에 대한 중요성을 매우 강조한 사람이다. 프란치스코가 이렇게 성체성사로 시선을 돌리고자 했던 이유는 그가 성체성사 안의 하느님 현존을 참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를 보기를 원하고 온전히 믿기를 원했지만, 그분은 보이지 않고 그분을 본다는 것이 그에게는 너무나 힘든 일이었을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프란치스코가 성체성사로 시선을 돌렸던 이유는 이런 고뇌와 힘든 투쟁 가운데였을 가능성이 크다.

 

 

‘보는 것’의 화두를 품은 성녀 클라라

 

어쩌면 클라라는 프란치스코 성인보다 ‘보는 것’의 화두를 더 강하게 마음에 품고 살았던 성녀가 아닐까 한다. 클라라는 프라하의 아녜스 성녀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대의 구원을 위해 인간들 가운데 가장 비천한 자가 되시어 멸시받고 얻어맞고 온몸에 갖가지 방법으로 매질 당하여 십자가의 참혹한 고뇌 가운데 죽어 가시는 그대의 정배를 닮기를 갈망하면서, 그분을 ‘응시하고’(intuere), 그분을 깊이 ‘생각하고’(considera), 그분을 ‘관상하십시오’(contemplare).”

 

클라라가 사용하고 있는 이 세 개의 단어들은 사실 모두가 ‘보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클라라는 우리가 그분을 참으로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우리도 내적, 외적으로 그분의 모습을 닮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봄’과 관련하여 클라라의 전기에 엄청난 대목이 나온다. 악마가 작은 아기의 모습으로 그녀에게 나타나서 그녀의 얼굴을 때리고 턱에 상처를 입힌다. 그런 다음 그녀의 눈을 쳐서 피가 나게 한다. 이것은 그녀의 회개 후(수도원에 들어간 후) 한참이나 지나서였다. 우리에게 악마는 무엇이며 삶의 시련이란 무엇인가? 그들은 우리의 눈을 덮어서 볼 수 없게 한다. “하느님께서는 어디에 계신가?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교회와 투쟁해야 했고, 그녀의 자매들과 투쟁해야 했다. 아마도 클라라는 이런 삶의 한가운데서 이런 질문들을 했을 것이다. “나는 왜 이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인가? 왜 이들은 함께 하지 못하고 자비를 베풀지 못하는가? 왜 이들은 계속해서 분열해야 하는가? 나는 볼 수 없다!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도대체 내 성소가 무엇이란 말인가? 이 모든 것이 의미 없어 보인다!”

 

악마의 가장 큰 유혹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클라라가 그토록 보고 마음에 품고자 했던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 순간들이 있었다는 것은 가히 짐작할 만한 일이다.

 

 

하느님 볼 수 없게 만드는 악마의 유혹

 

우리 삶도 마찬가지 아닌가? 어찌 보면 우리는 하느님을 보고자 하는 단순한 노력도 기울이지 못한 채 그저 세상의 부정적인 물결에 떠밀려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는 참으로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 참된 긍정이시자, 긍정과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 얼굴을 찾고자 했던 이들이다.

 

우리는 실제로 이 모든 것 속에서 하느님을 보는 단순한 믿음이 필요하다. 이것은 현시대 사회의 체험이다. 성체성사에 대한 믿음의 결핍, 교회에 대한 믿음의 부족, 체제와 사제직의 문제들!

 

“악마는 그녀의 얼굴을 강타했다!” 이것은 또한 그녀가 함께 살았던 여인들 몇몇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일 수도 있고, 그녀가 속해 있었던 사회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일 수도 있다. - 모르긴 해도 수치, 불명예, 험담… 그녀는 상처를 받았는데 복음서는 다른 쪽 뺨을 돌려대 주라고 말한다. 전기는 그녀를 유혹하는 악마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것이 소명 전부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의 구체적인 환경에서 복음을 살아가는 것을 그토록 힘겹게 만드는 그 무엇이다.- 우리의 이웃, 교회, 우리 공동체, 그리고 그 약점. 우리는 이런 유혹의 체험을 해왔다. 이것이 고통의 문제이다. 문제는 사라지는가? 늘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여기가 바로 우리가 하느님을 발견하는 곳이다.

 

 

선과 긍정과 희망 품기 15초

 

리차드 로어(Richard Rohr, OFM)는 「Divine Dance」, 「The Universal Christ」와 같은 저서들에서 신경과학에서 증명해 낸 것이라 하면서 인간 신경계(神經系)에 우리 감정이 연결되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 즉 인간의 감정을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으로 크게 나눈다면 미워하고, 질투하고, 비판하고, 냉소적으로 보는 것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찍찍이’(velcro) 같은 것이어서 우리 신경계통에 즉각적으로 단단히 들러붙는 반면에,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선하게 보는 것 등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은 ‘테플론’ 같은 것이어서 신경계에 잘 붙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아주 묘한 것은 우리가 이 긍정적인 감정들을 적어도 15초 이상 우리 생각 속에 붙들어 둘 때는 이 감정들이 신경계통에 더욱 단단하게 들러붙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종교적인 관점에서 말하는 ‘관상’이라고 정의했다. 얼마나 아름다운 관상의 정의인가!

 

그런데 우리가 지금까지 익숙하게 살아온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삶의 분위기는 우리가 단 15초라도 선과 긍정과 희망을 품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어찌 보면 이런 15초 정도의 인내심도 우리가 갖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와 더불어 계시며 당신의 강력한 사랑으로 일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에 대한 진정한 신뢰심을 두지 못하는 가운데 신앙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기도하면서도 이런 긍정과 선과 희망 속에 머물지 못하는지 모른다. 물론 이런 것이 기도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말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7월 19일,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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