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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11: 홍유한의 남인 인맥과 서학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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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7-20 ㅣ No.1218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11) 홍유한의 남인 인맥과 서학 공부


홍유한, 책상자 지고 산사에 들어가 천주교 교리 탐구

 

 

서창재의 채색 전사본 ‘방성도’ 6면 조립도. ‘방성도’는 이탈리아 선교사 민명아가 동양의 별자리를 유럽의 작도법에 따라 상하 2면, 사방 4면으로 제작한 육면체 지도이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홍유한의 남인 인맥

 

홍유한의 남인 인맥은 참으로 대단했다. 종손가에 보관된 「가장간첩(家藏簡牒)」과 「가장제현유고(家藏諸賢遺藁)」 및 간찰 자료에는 당시 남인의 핵심 인물들이 총출동하고 있다. 남인 학맥의 정점에 선 성호 이익의 편지만 해도, 홍유한의 부친 홍창보(洪昌輔)에게 보낸 편지가 9통, 홍유한에게 보낸 편지는 무려 57통이나 남아있다. 성호의 문집에는 57통 중 단 1통만 수록되었다. 성호와 홍유한 가문과의 왕래는 알려진 것처럼 단순치가 않다. 홍유한의 부친 홍창보를 위해 써준 「독행홍공묘지명(篤行洪公墓誌銘)」에서 성호는 홍창보가 자신과는 40여 년간 가깝게 지낸 벗이라고 적었다.

 

문집이 남아있지 않은 권암 권철신 부자가 홍유한에게 보낸 편지도 남은 것만 십여 통이 넘는다. 이형상과 이병휴, 권엄, 권준, 권제신, 이기양, 이총억 등의 편지도 여러 통씩 전한다. 현재 이들 자료는 천진암 성지와 종손가에 나뉘어 소장되어 있다. 정리가 시급하다. 이들은 성호 학맥의 핵심 인물들로, 대부분 서학에 학문적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이다. 이 모든 교유의 중심에 홍유한이 있었다.

 

또한, 초기 천주교 핵심 멤버들의 배후에는 언제나 홍유한의 인맥과 그림자가 얼비친다. 신유박해 때 순교한 홍낙민 루카는 홍유한과 한마을에 살았고, 이존창도 여사울에서 홍유한의 훈도를 받고 자랐다. 권철신과 이기양은 홍유한과 함께 남행 계획을 세워 이주를 결심했을 정도로 깊은 유대를 맺은 관계였다.

 

성호가 홍유한에게 보낸 네 글자를 지운 방성도 편지. 종손가에 소장된 「가장제현유고」에 수록되어 있다.

 

 

홍유한의 서학공부 : ‘방성도(方星圖)’와 서방 성인의 일

 

성호가 홍유한에게 보낸 1755년 1월 20일 편지에 흥미로운 대목이 보인다. “‘방성도(方星圖)’는 도움되는 점이 실로 많으니, 자세히 살펴보게나. 관상(觀象)의 여러 그림은 아마도 애초에는 외국으로부터 온 것인 듯하네. 사람과 별의 운명을 비슷이 보는 것 또한 연유가 있겠으나, 저쪽이 옳고 이쪽이 그르다네.(方星圖補益多, 細究之. 凡觀象諸圖, 疑若始自外國來, 其人星之類命, 亦有由. 然彼是而此非也.)” 저쪽이 서양이고, 이쪽은 중국을 말한다.

 

그런데 ‘방성도’ 바로 앞 네 글자를 먹물로 까맣게 지워 놓았다. 서학과 관련된 서명으로 짐작되나 판독되지 않는다. 필사자가 이를 지운 이유는 이것이 서학 중에서도 천주학과 관련해 예민한 내용을 담은 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워진 책 이름이 자꾸 궁금해진다. 당시 홍유한은 30세였으니, 홍유한의 서학 공부는 연원이 오랜 것이다. 「성호사설」에 ‘방성도’에 관한 항목이 따로 있다.

 

‘방성도’는 이탈리아 선교사 민명아(閔明我, Philippus Maria Grimardi, 1639~1712)가 동양의 별자리를 유럽의 작도법에 따라 제작한 6면체 지도이다.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된 채색 사본 ‘방성도’가 남아 있다. 1764년 오산(梧山) 서창재(徐昌載, 1726~1781)가 제작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서창재는 홍유한의 순흥 이주를 도와 근거지를 제공했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서창재가 그렸다는 이 ‘방성도’는 성호에게서 나와 홍유한을 거쳐 그에게 전달된 것으로 추정된다.

 

홍유한이 서학서, 그중에서도 「칠극」에 몰두한 것 또한 성호의 영향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밖에도 가장(家藏) 문헌 속에는 서학과 관련된 홍유한의 관심과 탐구를 보여주는 편린들이 이따금 눈에 띈다. 이병휴가 1775년에 홍유한에게 보낸 편지에도 이런 내용이 보인다. “듣자니 또 책상자를 지고서 산사로 들어가려 한다고 하니, 그대의 계획으로는 좋겠지만, 내게는 서글피 상심이 됩니다. 어느 산 어느 절에서 지내시려는지요. 비록 산에 있더라도 혹 인편에 금옥(金玉) 같은 소식을 전해준다면 다행이겠습니다. 나는 눈 오는 집, 얼음 언 창에서, 산 것도 아니요 죽은 것도 아닌 한 마리 벌레로 지냅니다. 서방 성인의 일을 내가 아는데, 또한 이와 같이 될까 염려합니다.(聞又將負山寺, 於足下計則得矣, 在僕失矣. 念棲何山何寺? 雖在山時, 或因行脚, 寄金玉音, 則幸矣. 僕雪屋氷窓, 作一不生不滅之, 西方聖人之事, 我知之矣, 恐亦如是.)”

 

맥락 없이 툭 튀어나온 ‘서방 성인(聖人)의 일’이란 말이 턱 걸린다. 전후 문맥으로 보아 영남으로 떠나는 일이 잠시 미뤄지면서, 홍유한이 이병휴에게 편지를 보내 책상자를 지고 산사로 깊이 들어가 서양 성인의 책을 작정하고 공부하겠다는 뜻을 밝혔던 것으로 짐작된다. 서방 성인은 누구를 가리킨 걸까? 예수였을까? 아니면 다른 누구였을까? 이병휴가 이와 같이 될까 걱정이라고 했던 것은 무슨 뜻으로 한 말이었을까?

 

 

마태오 리치의 책 2권에 몰입하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781년 8월 17일, 성호의 손자 이구환(李九煥, 1731~1784)이 순흥 구고리의 홍유한에게 보낸 편지 중에 다시 이런 사연이 나온다. “서태(西泰)의 책 두 권을 그대께서 아직 돌려주지 않아서 내가 물어보려 했더니, 아드님의 말이, 근자에도 여전히 되풀이해 살펴보고 계신다더군요. 그렇다면 감히 독촉해서 찾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천리 밖의 편지는 늘 전하기 어려운 것이 염려되니, 다 보신 뒤에는 믿을만한 인편을 찾아 속히 돌려보내 주심이 어떠실런지요? 천 번 만 번 간절히 바랍니다.(西泰書兩種, 自尊所未還. 故業欲奉叩矣. 胤君言近猶閱, 若爾則不敢督索, 而千里外書緘, 常患難傳. 幸乞卒業之後, 討信便, 還如何? 千萬切仰.)”

 

서태는 마태오 리치의 자이다. 순흥 이주 후 6년째로 접어들던 당시, 홍유한은 성호 집안에서 빌려온 마태오 리치의 책 2종을 본격적으로 들춰보며 혼자 천주교의 교리를 연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구환은 책을 빨리 돌려받고 싶었지만, 아들 홍낙질의 말이 지금도 날마다 ‘번열(閱)’ 즉 되풀이해 읽고 또 읽는다고 하자, 독촉은 못 하겠지만 그래도 빨리 돌려주었으면 한다는 뜻을 피력했다. 다만 돌려줄 때는 꼭 믿을 만한 인편을 통해서, 다른 탈이 나지 않게 해달라는 내용을 완곡하게 전달했다.

 

이때 홍유한이 이구환에게서 빌렸다는 마태오 리치의 책 2권은 「천주실의」와 「이십오언(二十五言)」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십오언」은 1791년 박종악의 「수기」 중 압수하여 소각한 서책 목록 가운데 두 차례나 등장한다. 이에 반해 「기인십편」은 분량도 길지 않은 데다, 소각 목록에 한차례도 보이지 않는다. 또 「천주실의」와 「이십오언」이 명말 이지조(李之藻, 1565-1630)가 간행한 서학서 총서인 「천학초함(天學初函)」에 나란히 실려 있기도 하다.

 

「천주실의」야 워낙에 알려진 것이고, 「이십오언」은 천주교의 교리에 맞춰 25가지 삶의 문제에 대해 논의한 잠언서이다. 이 책은 헬레니즘 시대 에픽테토스가 쓴 「엥케이리디온(Encheiredion)」을 마태오 리치가 천주교의 교리에 맞춰 재정리한 내용이다. 피타고라스의 윤회론을 비판하면서 오직 한 분의 신이 만물을 창조하고 관장하심을 증명하였다. 불교에 대한 우회적 비판과 함께 스토아 철학의 핵심 내용을 천주교 교리에 얹어 선교 목적으로 중국인에게 소개했다. 이들 책은 중국인에게 익숙한 「논어」의 어록체를 적절하게 활용함으로써 중국 지식인들에게 친숙한 호응을 빠르게 이끌어냈다.

 

홍유한이 마태오 리치의 책 두 권을 읽은 일과, 앞서 이병휴가 편지에서 말한 서양 성인의 일은 무관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1724년 성호는 제자 신후담(愼後聃, 1702~1761)이 마태오 리치에 대해 물었을 때, 그의 학문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고 하면서 그가 도에 나아간 바를 가지고 논한다면 그 또한 성인이라 할 수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앞서 이병휴가 말한 서방 성인이 예수를 지칭한 것인지, 아니면 마태오 리치를 두고 한 말인지는 남은 글만으로 단정하기가 어렵다. 어쨌거나 이구환의 편지는 1781년 당시 순흥에서 홍유한의 주요 관심사가 천주교에 대한 본격적인 공부였음을 분명하게 말해주는 유력한 증거다. 그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막연하게 수덕 생활만 실천한 것이 아니라, 은수자(隱修者)로 살면서도 작정하고 천주교의 핵심 교리를 진지하게 탐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밖에 현재 천진암 문서 중에 홍유한이 친필로 베껴 쓴 알레니(P. Julius Aleni, 艾儒略, 1582~1649)의 「직방외기(職方外紀)」 서문 등이 남아있다. 이 책은 이제껏 왕래가 없는 먼 나라들의 풍토와 제도, 기후 등에 대해 자세히 적고, 지도까지 첨부한 세계 인문지리서이다. 이 또한 「천학초함」 제3책에 실려 있다.

 

젊은 날 성호를 통해 서학서를 처음 접한 이래로, 홍유한의 서학 공부는 순흥 이주 이후 점점 더 뚜렷하게 종교적 색채를 더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7월 19일,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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