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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 코로나19가 던진 질문: 황제의 것, 하느님의 것 - 종교 자유의 관점에서 보는 국가와 종교의 올바른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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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6-25 ㅣ No.1210

[경향 돋보기 – 코로나19가 던진 질문] 황제의 것, 하느님의 것(마태 22,21)


종교 자유의 관점에서 보는 국가와 종교의 올바른 관계

 

 

유사종교 집단인 신천지교회가 코로나19의 폭발적 감염원이 되면서 우려와 걱정의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방역 당국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으면서 ‘종교 탄압’이라며 볼멘소리로 책임을 피하려고만 했다. 오랫동안 전임 대통령의 석방을 외치며 정치적 집회를 이어갔던 한 개신교회 또한 방역 당국의 조치에 ‘종교 자유’를 외치며 항변했다. 그들의 종교 자유 주장은 다소 뜬금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유는 종교 자유에 관한 문제가 비단 오늘의 문제만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무게를 지니기 때문이다. 코로나19는 우리 일상의 모든 영역에 의문을 제기하며 질문을 던지는데 종교 자유의 문제, 또 종교와 국가의 관계라 하여 이러한 의문과 도전에서 예외는 아닐 것이다.

 

 

관용에서 자유로

 

1948년에 국제연합(UN)에서 채택한 세계인권선언은 ‘사상과 양심과 종교의 자유’(제18조)를 포함한다. 생각이나 신념 또는 신앙은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것이라 외부적인 강제가 작동할 수 없음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자유는 당연히 자기 신념과 신앙을 공개적이며 공적인 영역에서 표현하고 전파하며 예배를 실천할 자유를 뜻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종교 자유의 주체는 개인과 종교이지만, 국가의 권력이 개인에게 신앙 또는 불신을 강제하곤 하였다. 결국 종교 자유의 문제는 개인의 신앙 실천과 국가 공권력의 행사 사이에 타협과 조정의 결과물인 것이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 이후 그리스도교는 유럽에서 국가 종교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국가 종교의 형태는 종교개혁 이후 무너지고, 유럽에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영주들 사이의 다툼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宗敎和議)는 ‘그의 영토에서는 그의 종교’ 원칙에 따라 지역 영주에게 자기 지역 거주민의 종교를 결정할 권한을 인정하였다. 이 결정으로 신성로마제국 안에서 지역별로 종교의 다양성은 인정되었지만, 지역 영주에게서 개인의 종교와 신앙이 독립된 것은 아니었다.

 

1598년 낭트 칙령으로 한 지역 안에서 신앙과 종교의 관용은 인정되었지만, 국가 종교의 형태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서야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고 정치적으로 선언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유럽의 각 지역은 근대적 의미의 국가로 발돋움하게 되고, 인문주의자들과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종교의 자유, 국가와 통치자에 대한 저항 등 국가에 대한 새로운 철학이 싹트게 되었다.

 

새로운 종교철학과 정치철학에 바탕한 국가는 유럽이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에서 시작되었다. 미국의 건국 문헌들은 국민주권과 저항권을 포함한 법치국가를 표명하고 있으며, 만민 평등과 인권을 드러낸다. 특히 1791년 수정 헌법 제1조는 종교와 국가의 관계를 분명히 보여 준다. “연방의회는 국교를 수립하거나 종교의 자유로운 행사를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는 조항이 그것이다.

 

이로써 종교 자유와 정교분리의 원칙은 단순히 정치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법률적, 제도적 차원으로 확립되었고, 다른 나라의 헌법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우리 헌법 제20조 또한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제1항). 그리고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고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제2항)라고 규정하여 종교 자유와 정교분리의 원칙을 지키고 있다.

 

이러한 원칙은 국가가 개인의 종교의 자유를 금지할 수 없다는 것과 국가가 종교들 사이에서 중립성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시민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고 절대적 권력을 제한하는 근대 입헌주의 정치철학에서 나온다. 곧, 국가는 시민적, 정치적 권리인 종교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고, 그런 의미에서 국가권력에 제한을 두는 것이다. 이는 프랑스 혁명 이후에 종교와 신앙을 개인의 사적 영역으로만 몰아넣었던 극단적 세속주의의 틀을 벗어난다. 이로써 국가와 종교 기관(교회)은 분리되고, 이 두 주체가 자율성과 독립성을 가지고 협력하는 관계로 설정되었다.

 

 

공의회의 종교 자유 선언

 

가톨릭 교회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 「인간 존엄성」(1965년)을 반포함으로써 종교와 국가 간의 관계에서 지난날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공의회는 이 선언을 준비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공의회의 많은 교부가 그리스도교 신앙 진리는 절대적인 진리이고, 따라서 국가권력의 힘을 빌려서라도 보호되어야 하며, 동시에 신앙 진리의 문제가 개인 양심에 따라 상대적으로 판단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교부들은 오랜 토의 끝에 종교의 자유는 교리 문제이기보다는 법률과 인권에 관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더 나아가 종교 자유 없이는 인류의 공존과 평화가 어렵다는 사실 또한 깊이 깨달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공의회는 현대사회의 인간의 존엄성과 그에 따른 종교의 자유에 대한 깊은 갈망에 관심을 기울이며, 그 갈망이 진리와 정의에 부합한다고 선언(1항 참조)하였다. 동시에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길을 따라 종교 자유의 원칙을 인간의 존엄성과 하느님의 계시에 부합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존중”하며, 비록 역사 속에서 “복음 정신과 덜 맞거나 심지어는 반대되는 행위도 있었으나 교회는 언제나 그 누구에게든 신앙을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쳐 왔다.”(12항)고 고백했다. 교회의 사명은 신앙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선포하고 증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의회는 종교 자유의 권리가 양심과 사상의 자유와 더불어 시민적 정치적 권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보았다. 이는 정당한 범위 안에서 자기 양심을 거슬러 행동하도록 강요받지 않아야 하고, 또한 아무도 자기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데 방해받지 않을 권리(2항 참조)를 뜻한다. 이 권리의 주체는 개인과 종교이고, 국가는 이들의 기본적 권리를 보호하고 증진하는 것이 마땅하다.

 

시민사회는 국가에 우선하며, 국가는 시민사회에 봉사하려고 존재한다. 그리고 시민사회에 대한 국가의 봉사는 공동선의 증진이다. 국가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공권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국가의 역할과 공권력의 행사는 시민사회 안에서 각 사회적 주체들이 각종 활동에 자유롭게 참여하도록 보조성의 원리에 입각하여 제한되어야 한다. 보조성의 원리는 더 작은 조직과 단체의 역할과 활동을 위하여 큰 조직과 단체의 역할을 제한해야 한다는 원리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간 존엄성」은 종교의 자유가 도덕 질서에 부합하는 법률의 규범에 따라서 공공질서의 유지를 위하여 제한될 수 있다(7항 참조)고 선언한다. 더 나아가서 종교적 신앙을 전파하거나 소개할 때, “떳떳하지 못하고 올바르지 못한 강제적인 설득으로 보이는 행동은 언제나 삼가야” 하고 그러한 행위는 “자기 권리에 대한 남용이며 타인의 권리에 대한 침해”(4항)라고 가르친다.

 

이처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종교 자유의 선언은 교회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전환이 되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그리스도교는 국가 종교가 되었고, 황제는 대사제(pontifex maximus)로 불렀다. 그러나 이제 교회는 「인간 존엄성」을 선언함으로써, 오늘날 인간의 존엄성과 그에 따른 인권의 증진에 깊이 공감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교회사 안에서 복음의 정신과 부합되지 못했던 지난날을 고백하며, 신앙은 오로지 선포와 증언을 통해 전해져야 함을 선언했다. 그리고 현대의 문화와 종교와 예배의 다원성을 존중하며, 또한 역사 안에서 얻었던 교회의 특권과 기득권을 내려놓았다. 이로써 가톨릭 교회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을 이루게 된 것이다.

 

 

종교의 자유는 타 종교의 존중에서

 

유럽은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래 너무나 오랫동안 교회와 국가가 하나로 살았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교회와 국가의 경계가 어디인지 서로가 구별하기 어려워했다. 미국 수정 헌법과 「인간 존엄성」은 서로의 경계를 찾으면서 서로의 정체성을 되찾는 계기가 되었다. 국가는 국가 이전의 가치 위계와 진리 위계에서 분리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교회는 국가로부터 받았던 기득권을 포기하기를 배웠고 종교와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하기를 배웠다.

 

한국에서 천주교는 혹독한 박해를 겪었고, 현대에 들어와 전체주의 국가 아래에서 천주교와 개신교회 모두 정권과 정치적 갈등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근대국가의 수립 때부터 민주 공화정과 종교 자유, 그리고 정교분리는 변함없는 원칙이었고, 유럽에서 볼 수 있는 국가와 종교의 큰 충돌은 없었다.

 

종교와 정치는 인간 삶을 구성하는 영역이고 이는 분리될 수 없다. 정교분리의 원칙은 엄격하게 국가와 종교 기관의 분리이고, 그 의무는 국가의 의무이지 시민의 의무가 아니다.

 

반면에 2020년 한국에서 종교의 자유는 역설적이게도 그것을 외치는 이들에 의해 부정된 듯하다. 공중보건이라는 공동선을 위한 방역 당국의 요청에 ‘종교 탄압’ 또는 ‘종교 자유’를 부르짖는다고 해서 자신의 책임을 피할 수 없거니와 그래서도 안 된다.

 

신앙은 강요가 아니라 삶의 증언으로 선포된다. 자유는 진리와 화해할 것이다. 참다운 종교의 자유는 타인의 권리와 신앙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된다.

 

* 이동화 타라쿠스 – 부산교구 신부,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지금은 부산가톨릭대학교 교수로서 사회 교리와 종교사회학 등을 가르치고 있다.

 

[경향잡지, 2020년 6월호, 이동화 타라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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