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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 코로나19가 던진 질문: 전염병과 교회의 대응 - 역사적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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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6-25 ㅣ No.1209

[경향 돋보기 – 코로나19가 던진 질문] 전염병과 교회의 대응


역사적 교훈

 

 

“이 전염병에는 의사의 조언도 치료도 소용없었습니다. 아무도 무슨 병인지 몰랐고 그때까지 그 병을 연구한 의사도 없었습니다. … 하층계급과 대다수의 중산층은 상황이 훨씬 비참했습니다. … 그들은 한집에 모여 살거나 서로 가까이 살았기 때문에 매일 수천 명씩 감염되었습니다. 모두가 간호는커녕 작은 도움도 받지 못하고 죽에 갔지요. 길거리에는 밤낮없이 수많은 시신이 나뒹굴었고 집 안에는 더 많았습니다”(조반니 보카치오, 「데카메론」, 1권, 민음사, 2012, 25-29면).

 

「데카메론」은 피렌체를 휩쓴 흑사병을 피해 모인 열 사람이 열흘간 나눈 이야기로, 그 시작에 앞서 작가는 당시 정황을 전한다. 역사학사 대부분은 1340년쯤 중국에서 생겨난 이 질병이 중앙아시아 비단길을 타고 서방으로 퍼져 인구의 20-25%(7500만~2억 명)가 사망했다고 본다. 유럽의 경우 많게는 60%까지 몰살되었다. 인구는 17세기 중반에야 회복되었다.

 

 

고대의 역병과 그리스도교의 대응

 

그런데 ‘흑사병’으로 알려진 페스트의 첫 발발 시기는 14세기가 아니다. 최근 독일에서는 흑사병으로 사망했다고 추정되는 시신의 뼈와 치아 표본을 분석했다. 그 결과 중세 흑사병의 원인은 서기 541년 에티오피아에서 유래하여 비잔틴제국과 고트족의 전쟁 때문에 처음으로 크게 유행하였던, 이른바 ‘유스티니아누스 역병’과 같은 예르시니아 균(Yersinia pestis)임을 밝혀냈다. 사실 전파 양상이 국지적일 뿐 아직 근절되지 않은 이 질병의 여파가 심각했던 이유는 숙주인 벼룩과 쥐들의 감염원 전파, 위생 관념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무지와 열악한 공중보건에 있었다.

 

역병 대유행 속에서도 교회가 병자들을 돌보는 구호 활동을 적극적으로 실천한 것은 놓치지 말아야 할 애덕의 역사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병자 간호는 2-3세기 무렵 로마에서 창궐한 전염병의 사망률을 크게 낮추는 데 이바지했다. 카르타고와 알렉산드리아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페스트 환자들을 간호했다는 기록에 전해진다.

 

3세계 중반 페스트가 발생하자 로마제국 통치자들과 시민은 이것이 그리스도인 때문에 생긴 하늘의 분노라며 교회를 거듭 박해한다. 치프리아노는 교회 공동체가 곤경에 처한 상황에서도 자선과 봉사를 아낌없이 베풀었다.

 

가난한 이들의 교부로 알려진 카이사리아의 대 바실리오는 368-369년에 수도원 인근에 ‘바실리아데’라 불린 빈민 구호소, 노인들을 위한 요양원과 전염성 환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병원, 노동자 숙소 등을 세웠다. 재활과 자립을 위한 교육기관도 운영함으로써 카이사리아 전체를 자선의 도시로 변모시켰다. 구호 기관이 많아지자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 구호 대상을 구체적으로 분류하며 자선 활동을 조직 · 제도화시켰다.

 

590년 무렵 그레고리오 1세 교황 선임 당시 로마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테베레강 범람이 곡물 창고를 파괴했고 페스트가 창궐했으며, 비잔틴제국이 약해진 틈을 타 롬바르드족이 도시를 위협했다. 그레고리오는 시대의 곤경을 세상의 종말과 동일시하였다.

 

“이 모든 징후에서 우리는 더러는 이미 실현된 것을 보고, 또 다른 징후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두려워합니다. … 우리는 페스트와 전염병으로 끊임없이 시달립니다. 해와 달, 별의 표징들이 물론 우리에게 아직 뚜렷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들도 더 이상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변화무쌍한 날씨를 보고 미루어 압니다”(대 그레고리오, 「복음 강론」, 35),

 

하지만 교황은 기도와 참회 행렬을 이끌어 방역과 홍수 피해 구호 조직으로 변모시켰고, 공평한 곡물 분배로 기근을 없앴으며, 롬바르드족은 공물로 달래 철수시켰다. 그는 설상가상의 위기 속에서도 탁월한 영적 권위와 지도력을 발휘하여 로마 시민들은 지켜 냈고 도덕적 명성과 정치적 자산을 축적하였다.

 

 

두 번째 대유행의 참극

 

중세 중기 약 300년 동안 유라시아 대륙은 온난한 기후로 농업이 발전하고 인구가 급증하였다. 하지만 높은 출산율로 늘어난 식량 수요는 감당하기 힘들었고 노동인구 과잉으로 임금은 낮아졌다. 그 결과 14세기 초반 유럽인들은 삶의 질이 점점 더 저하되는데, 가난과 기근, 보건 환경의 악화로 사람들은 감염에 취약해졌다.

 

2011년 영국 런던의 흑사병 사망자용 구덩이를 조사하던 과학자들은 희생자의 유골에서 영양부족과 선행 질병의 흔적을 찾아냈다. 원인 균은 이처럼 방역에 취약한 가운데 산불처럼 급속히 번졌다. 더욱이 14세기에는 유목민 특유의 광범위한 기동성으로 전 유라시아를 제패한 몽골제국의 교통로가 전염을 가속했다.

 

14세기 유럽 그리스도 교회는 권위가 흔들리고 이단과 분열이 생겨났다. 흑사병 대유행기에 아비뇽으로 교황청이 옮겨져 세속 권력에 휘둘리며 구심점을 잃는 무능을 드러냈다. 백년전쟁으로 세속 군주들의 통치력도 한계가 있었다. 미생물과 세균의 존재를 몰랐던 중세 사람들은 전염병이 탁한 공기, 악마의 횡포,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었다. 참회 예식을 하겠다고 폐쇄된 공간에 밀집한 기도 모임은 오히려 감염을 부추겼다.

 

대재앙 앞에서는 교회도 속수무책이어서 전체 성직자의 40%를 잃었고,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서만 5,084명의 사망자가 기록되었다. 고위 성직자들과 달리 피신하지 않은 하위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현장에서 병들어 죽어 가는 민중을 끝까지 돌보다 자신들도 감염되어 사망률이 높았다. 적어도 그들은 최후까지 이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언하여 직분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인위적인 방역 대책 중에는, 극단적이었어도 강제격리가 효과를 보았다. 1347-1350년 피렌체에서는 인구의 80%나 사망했지만, 감염자의 집을 가족과 함께 통째로 폐쇄시키는 가혹한 정책을 편 밀라노에서는 대조적으로 사망률이 15%에 머물렀다고 한다.

 

참고로 근래 자주 들었을, ‘격리’나 ‘검역’을 뜻하는 ‘쿼런틴’(quarantine)이란 단어는 정확히 말하면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격리 기간이나 장소’를 뜻한다. 14세기에 유럽에 페스트가 창궐하자 당시 이탈리아의 라구사 항구에서는 전염 지역에서 출항한 배들에 하선을 허락하지 않았다. 질병이 없어졌다고 인정될 때까지 40일 동안 선원과 승객을 비롯한 모든 것이 배 안에 남도록 강요한 것이다.

 

이때 40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콰란타’(quaranta)에서 지금의 형태로 파생되어 17세기 중반부터 이 단어가 재앙의 종류와 상관없이 고립된 장소나 기간 또는 격리 상황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재난의 후폭풍과 우리의 과제

 

흑사병이 교회를 휩쓴 뒤 민중은 교회의 성사나 전통, 제도와 기관, 무능하고 타락했다고 여겨진 교계로부터 신뢰를 거두기에 이른다. 대신 하느님과의 직접 통교 또는 각 개인의 내면적 영성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근대 신심(devotio moderna)이 발전했다. 지역 성인의 치유 이야기가 확대재생산되고 성인의 유해 공경이 대중화되었다.

 

갑작스러운 성직자 부족으로 교회가 사제 선발 기준을 완화하고 연령 제한이나 교양 수준을 낮추자 오히려 무능과 문란, 탐욕과 출세욕 등에 급급할 뿐 자질이 부족한 성직자가 늘어나기도 했다. 이는 교회의 부패와 윤리적 타락을 가속화시켜 장기적으로 종교개혁으로 이어진다.

 

인류는 두 가지 중요한 변화를 겪는다. 사회적으로 인구의 급감은 유럽의 경제 상황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런던 시립 묘지 연구에 따르면 식량에 여유가 생기면서 살아남은 농부와 노동자들은 더 많은 땅과 임금을 받아 영양 생태도 좋아지고 더 오래 살기 시작했다. 생활수준이 올라가서 사회계층 이동성이 증가하였고, 시골 중심의 지방분권화된 봉건제가 약화되었으며 도시 중심의 중앙집권적 국민국가로의 정치적 변화가 이루어졌다.

 

생물학적으로는 연약한 사람들이 다수 사망했으나 질병을 이겨낸 이들의 유전자가 살아남아 집단면역이 이루어진 셈이다. 현재 과거에 발생한 바이러스 전염병 위험은 항생제 덕분에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도 해마다 1000여 명이 바이러스 전염병으로 사망하고, 최근 항생제에 내성을 지닌 병원체가 생겨나 암흑기가 돌아올 가능성도 있다.

 

오늘날 세균과 바이러스는 전 세계 항공망을 통해 그 어느 때보다 더 빠르고 넓게 퍼질 수 있다. 아울러 이번 코로나19 확산은 출처 불명의 미확인 정보, 가짜 뉴스 등의 정보 전염병(인포데믹)이 상황을 얼마나 악화시키는지 극명히 드러낸다. 흑사병 확산의 주점을 색출하려던 중세의 부당한 광기도, 작금의 정보 전염병도, 전염병 대유행(팬데믹)은 언제나 공황 상태와 붙어 다님을 일깨운다.

 

역사가 주는 교훈을 되새기자면, 유행병의 파급력은 전쟁이나 자연재해 이상일 수 있다. 방역 정책 담당자들로서는 전염병으로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보다 병 자체의 인과관계를 아는 것이 더 시급할 수 있다. 그래야 앞날에 유사한 악몽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날과 달리 오늘날에는 유행병이 맨 처음 생겨날 시점에 이를 과학기술로 재빨리 감지하고 그 영향력을 최소화할 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이점을 지녔다. 다만 지도자의 결단과 행정력, 학계와 정부와 기업의 협력, 종교계를 비롯한 시민사회의 자발적 협소가 어우러질 때만이 가능한 일임을 명심해야 한다.

 

* 이진현 라파엘 – 예수회 신부로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세계 교회사와 서학, 한국 천주교회사를 가르친다. 예수회 천문학과 지도학, 동아시아 과학사에도 관심이 많다.

 

[경향잡지, 2020년 6월호, 이진현 라파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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