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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박해시기 신앙선조들, 미사 없이 어떻게 주일 지켰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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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3-23 ㅣ No.1172

[코로나19 특집] 박해시기 신앙선조들, 미사 없이 어떻게 주일 지켰을까


삼엄한 감시에도… 주일이면 목숨 걸고 모여 복음 읽고 묵상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의 영향으로 미사 없는 주일이 이어지고 있다. 미사는 신앙생활의 가장 큰 축이 되는 전례다. 그러나 신앙인인 우리는 미사가 없다고 해서 신앙생활에 소홀할 수 없다. 박해시기 미사 참례를 할 수 없었던 신앙선조들도 미사 없이 주일을 지키며 신앙생활을 지켜왔다. 미사 없는 허전한 주일, 미사 없이도 거룩하게 주일을 보낸 신앙선조들의 삶을 기억하며 신앙생활을 지켜나가면 어떨까.

 

- 신유박해 순교자 최필제가 교우들과 함께 서울의 어느 약국에서 기도를 드리다 체포되던 당시를 그린 성화.(탁희성 작) 박해시기에도 신앙선조들은 주일이면 모여서 복음을 읽고 기도를 바쳤다.

 

 

달력 없이도 주일을 지키다

 

오늘날 우리는 달력만 펼치면 쉽게 주일을 알 수 있다. 혹시 달력이 없더라도 늘 지니고 다니는 휴대전화나 컴퓨터 등을 통해서도 손쉽게 주일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점으로 하는 서력기원, 즉 서기(西紀)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해’(Anno Domini)라고도 불리는 서기는 한 주간을 7일로 구분하고, 매주의 첫날을 일요일, 즉 ‘주일’로 삼고 있다.

 

그러나 박해시대 우리나라에는 서기가 없었다. 우리나라가 공식적으로 서기를 사용한 것은 1962년부터고, 일요일이라는 개념이 도입된 것도 1895년이다. 그 이전 음력을 사용하던 사람들은 주일이 무엇인지도, 언제가 주일인지도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신앙선조들은 이미 자체적으로 주일을 지키고 있었다. 성호 이익의 제자인 홍유한은 1770년 교회서적에서 7일마다 주일이 돌아온다는 기록을 읽고, 매달 7·14·21·28일, 즉 7의 배수가 되는 날을 정해 일을 쉬고 기도에 전념했다고 전해진다. 사제는커녕 세례 받은 이도 없던 시대에 신앙선조들은 주일의 정확한 일자는 알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요일을 계산해 주일을 지킨 것이었다.

 

1780년대 초를 전후로 신앙선조들은 보다 정확하게 주일을 지킬 수 있게 됐다. 바로 주일과 축일, 성경의 내용 등을 해설한 「성경직해」를 접하면서다. 「성경직해」는 “달 28개의 별자리 가운데 허성, 묘성, 성성, 방성 등 네 개의 별자리가 태양과 만나는 날”이라고 주일의 정확한 날짜를 동양의 천문학을 바탕으로 계산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성경직해」는 복자 최창현(요한)이 우리말로 번역해 박해가 시작됐을 때는 이미 신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었다.

 

이후 신앙선조들은 주일뿐 아니라 양력으로 셈해야 하는 교회력의 축일까지도 삶 깊숙이 받아들였다. 신앙선조들은 순교자들의 선종일을 음력이 아닌 양력으로, 심지어 그 날의 축일까지 기억하곤 했다. 기록에 따르면 1821년 윤 야고보라는 11세 소년이 “예수 승천 축일 정오에 죽으리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하고, 실제로 그날 삼종기도를 바친 후 사망했다는 일화도 있어, 당시 신자 집안의 어린이들조차도 주일과 축일을 받아들여 신앙생활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신앙선조들이 달력 없이도 주일과 축일을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첨례표 덕분이다. 첨례는 축일을 뜻하는 옛 용어로, 첨례표는 교회력에 따른 주요 축일을 기록한 한 장짜리 표다. 초기교회 지도자들은 신자들이 전례력에 따라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첨례표를 제작해 보급했다. 첨례표의 정확한 보급시기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1791년 하느님의 종 권일신의 집에서 「신혜첨례」라는 서적이 나와 당시 신자들이 이미 첨례표를 접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잡힌 신자 윤현의 압수품 목록에 ‘첨례단’이 있는 것으로 볼 때, 당시에 이미 첨례표가 상당히 보급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교회 신앙선조들의 첨례표. 교회력에 따른 주요 축일을 기록한 한 장짜리 표로, 당시 신자들은 첨례표로 주일과 축일을 지낼 수 있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미사 없이도 주일을 거룩히 보내다

 

박해시기에도 선교사들이 목숨을 걸고 국내에서 활동했지만, 주일에 미사를 드릴 수 있었던 신자들은 한정적이었다. 대부분의 신앙선조들은 미사 없이 주일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신앙선조들은 성사도 없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주일을 경건하고 거룩하게 보냈다.

 

신앙선조들은 주일이면 파공(罷工)을 지키고, 대송(代誦)을 바쳤다.

 

파공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기 위해 육체노동을 삼가는 것을 의미한다. 대송으로는 「천주성교공과」에 수록된 ‘주일경’과 ‘축일 기도문’을 바쳤다. 「천주성교공과」는 박해시대부터 사용해온 한국교회의 공식기도서다. 「천주성교공과」에는 기도서가 없거나 글을 몰라 ‘주일경’과 ‘축일 기도문’을 바칠 수 없는 경우에는 성로선공(聖路善功), 즉 십자가의 길을 바치도록 했다. 십자가의 길도 바칠 수 없다면, 주님의 기도 33번씩 두 번을 바치도록 했다. 또 글을 아는 이들은 주일에 마땅히 성경을 읽고 아랫사람들에게 그 말씀을 가르치도록 권고하고 있다.

 

성 한이형(라우렌시오)은 주일과 축일에는 집에서 4㎞가량 떨어진 신자 마을을 찾아 신자들과 함께 기도했는데,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거르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또 성인은 밭일을 하며 생활했는데, 아무리 일이 바빠도 주일 파공을 철저히 지켜 농사를 쉬고 기도에 임했다고 전해진다.

 

제4대 조선대목구장이었던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는 1857년 편지를 통해 당시 신자들이 미사 없이 주일을 보내는 모습을 기록했다. 베르뇌 주교는 “주일이 되면 신자들 12명 내지 15명이 어떤 때는 이 집에, 어떤 때는 저 집에 모이는데, 외교인들에게 미행당하지 않으려고 언제나 은밀히 모인다”며 “그들은 낮은 목소리로 기도를 외우고 그날의 복음 해설을 들으며, 나머지 시간은 묵주신공과 교리문답을 배우고, 아이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치며 보낸다”고 묘사했다.

 

신앙선조들은 주일에 정성을 다해 기도와 말씀 묵상을 바치는 한편, 그리스도가 부활한 기쁨을 나누는 날로 삼았다.

 

1799년 순교한 복자 원시보(야고보)는 주일과 축일이면 많은 사람들을 초대해 음식을 베풀곤 했다. 복자는 사람들이 모이면 “오늘은 주님의 날이니 거룩한 기쁨으로 이날을 지내야 한다”고 말하고, “또한 천주께서 주신 재산을 나눠 그분의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며 초대한 이들에게 천주교의 교리를 전하곤 했다. 양반 집안에서 행해온 접빈객(接賓客)을 통해 선행을 실천하며 신앙도 전파했던 것이다.

 

복자 이중배(마르티노)와 복자 원경도(요한)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특별히 더 기념하는 주일,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아 그 기쁨을 나누던 중 체포됐다. 두 복자를 비롯한 경기도 여주 지역의 신자들은 양섬에서 잔치를 열었다. 신자들은 큰 소리로 ‘알렐루야’와 ‘부활삼종기도’를 바치며 고기와 음식을 나누던 중 관헌들에게 붙잡혔다.

 

박해시대 신앙선조들은 달력도 없고, 사제도 없던 중에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주일을 지냈다. 물론 신앙선조들은 무엇보다도 성사를 갈망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주일의 기쁨을 나누고, 선행을 실천하며 신앙심을 키워갔다. 신앙선조들은 박해로 자유로운 주일미사는 잃었지만, 주일의 정신은 잃지 않았던 것이다.

 

[가톨릭신문, 2020년 3월 22일,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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