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57-60: 박 토마스 주교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2-22 ㅣ No.1158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57) 박 토마스 주교 I

 

 

박 토마스 주교(Thomas Stewart, S.S.C., 1925.8.8~1994.10.30)는 1925년 8월 8일 아일랜드 골웨이(Galway) 지방의 우드포드(Woodford)에서 태어났다. 발리나슬뢰(Ballinasloe)의 성 요셉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사제와 선교사로서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1944년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에 입회하였다. 그 후 선교 사제를 양성하던 성 골롬반 신학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1950년 12월 21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가 된 후 선교회 사제로서는 매우 예외적으로 로마의 그레고리오 대학교에 유학하여 교회법을 전공했고, 1954년에 교회법 박사학위를 받았다. 훗날 그가 한국에서 ‘박(朴)’ 씨 성을 가지게 된 것은 당시 우리나라 교회에는 흔치 않았던 박사학위를 지닌 신부로서 ‘박사 신부’로 불렸기 때문이었다. 같은 해 선교지 한국으로 임명을 받고 그 다음 해인 1955년에 입국하여 서울에서 한국어를 배운 다음, 춘천교구 관내의 선교사로 파견되어 1956년 횡성 본당 보좌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1958년 초 원주 학성동 본당 2대 주임으로 전임되었으며, 같은 해에 잠시 횡성 본당과 간성 본당의 주임으로도 사목활동을 하였다.

 

1959년 춘천 대목구의 총대리로 임명되어 교구 전체의 사목에 관해 구인란 토마스 주교를 보좌하기 시작했다. 1962년에 본국으로 휴가를 다녀온 뒤 1963년에 교구 상서국장(현 사무처장)이 되었으며, 1965년에는 총대리 겸 상서국장으로 임명됨으로써 당시의 춘천교구장 구인란 토마스 주교를 도와 교구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던 중 1966년 2월 11일, 고령과 건강상의 이유로 구인란 토마스 주교의 사임이 교황청에서 수락됨에 따라 그 후임으로 박 토마스 주교가 제5대 춘천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그는 만 41세의 젊은 나이였다. “회중의 모범이 될지니라.”라는 사목 표어 아래 그해 5월 11일 춘천 성심여자대학 교정(현 한림대학교)에서 춘천교구장 주교로 서품되었다. [2020년 2월 23일 연중 제7주일 춘천주보 2면, 교회사연구소]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58) 박 토마스 주교 II

 

 

박 토마스 주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난 후 임명된 한국천주교회의 첫 주교로서 무엇보다도 공의회의 정신을 반영하고 실천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비록 외국인으로서의 한계가 있었지만, 젊은 주교로서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구의 사제들이나 교우들과 어울리며 그들과 하나 되고 사회 안에서 그 책임을 다하며 살아있는 교회의 모습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1969년 5월 1일 자로 한국천주교회는 교황청의 인준 하에 교구 관할구역을 재조정했다. 그 결과 기존에 춘천교구였던 강원도 횡성군 전체와 평창군의 절반 정도가 원주교구 관할의 사목 지역으로 재편되었고, 대신 서울대교구 관할구역이었던 경기도 가평군과 포천군이 춘천교구 관할의 사목 지역으로 편입되었다. 교구 경계의 새로운 조정과 함께 60년대 후반부터 일기 시작한 산업화의 바람은 도시 지역의 인구 증가를 가져왔고, 이에 따라 시내 지역을 중심으로 본당의 신설과 함께 성당의 건축이 이어졌다. 박 주교는 손수 타이핑을 하며 외국의 은인들에게 편지를 쓰는 등 건축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공의회 이후에 새롭게 제정된 규정에 따라 교구의 체계를 정비했고, 특별히 오랫동안 교구의 현안이었던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와의 ‘선교 사제의 인사권 위임에 관한 계약’을 1972년에 체결함으로써 교구 내에서 사목하는 선교사들에 대한 완전한 인사권을 교구장 주교가 행사할 수 있게 하였다.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와의 ‘선교 사제의 인사권 위임에 관한 계약’은 1969년 2월 24일자 포교성성의 훈령에 ‘또한, 효과적인 협력을 촉진하기 위해 지방 교구장들과 선교회는 그들의 상호 관계를 규정하는 계약서를 작성해야 한다’라는 조항에 따라 이루어진 협약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성 골롬반회 출신이지만 춘천교구의 교구장인 박 토마스 주교는 성 골롬반 선교회와의 계약이 필요했던 것이다. 교회법에 능통한 박 토마스 주교는 위의 계약을 통해 교구의 선교 활동을 위해 선교사들에 대한 완전한 인사권을 갖게 되었고 더욱 활기차게 사목을 할 수 있게 되었다. [2020년 3월 1일 사순 제1주일 춘천주보 2면, 교회사연구소]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59) 박 토마스 주교 III

 

 

박 토마스 주교의 교구장 재임 초기인 1970년대 대한민국 정부는 인구 억제 정책의 하나로 임신 3개월 이전의 낙태를 허용하는 모자보건법을 시행함으로써 인공 유산과 불임 시술을 합법화하였다. 이에 박 토마스 주교는 인간의 생명 존중과 가정의 보호라는 신앙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자연적 가족 계획법인 ‘빌링스 법’(일명 점액 관찰법)에 대한 자료를 입수하여 적극적으로 홍보하였다. 이후 가정과 생명권의 수호를 위한 ‘행복한 가정 운동’은 박 토마스 주교의 재임기에 추진했던 가장 중요한 사목의 한 부분으로 일관되게 강조되고 실천되었다. 교구 내 모든 본당에는 ‘행복한 가정 운동’(행가운)이 조직되었고, 이를 가르치고 지도하기 위한 지도자들을 선발하고 양성하였다. 견진이나 사목방문을 위해 본당을 방문하면 직접 그 내용을 확인하거나 지도했다. 특히 어린 청소년들에게 순결 교육을 강조했으며 정기적으로 본당의 ‘혼인 서약 갱신식’을 직접 집전하기도 했다. 또한, 더욱 적극적인 생명 수호와 낙태 반대 그리고 미혼모들을 위한 사목적 배려를 위해 ‘착한 목자 수녀회’를 교구로 초청하여, 1979년부터 지금의 교육원 자리에 ‘마리아의 집’을 마련하여 미혼모들을 돌보게 하였다. 박 토마스 주교는 한국 M·E 담당 주교, 주교회의 가정사목위원회 위원장(1974-1994) 등을 역임하면서 인간 생명 수호 운동과 가정 성화를 이루는 데에 있어, 한국 교회와 사회 전체를 위한 선구자적인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의 가정 사목 활성화에 많이 기여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사목활동과 교구 사제들을 위한 생활비, 그리고 신학생 학비 마련 등을 위한 재정 확보를 하는 일은 박 토마스 주교의 가장 큰 고민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해마다 교황청과 성 골롬반 선교회를 통한 재정적인 큰 도움과 은인들의 도움으로 여러 사업에 대한 재정을 충당할 수 있었다. 성 골롬반 선교회 총장과 재정 담당 신부와 나눈 서신의 내용을 보면 박 토마스 주교가 얼마나 교구의 재정 확보를 위해 노력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그 중에 선교회에 보낸 감사 편지의 내용을 소개한다.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와의 ‘선교 사제의 인사권 위임에 관한 계약’은 1969년 2월 24일 자 포교성성의 훈령에 ‘또한, 효과적인 협력을 촉진하기 위해 지방 교구장들과 선교회는 그들의 상호 관계를 규정하는 계약서를 작성해야 한다’라는 조항에 따라 이루어진 협약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성 골롬반회 출신이지만 춘천교구의 교구장인 박 토마스 주교는 성 골롬반 선교회와의 계약이 필요했던 것이다. 교회법에 능통한 박 토마스 주교는 위의 계약을 통해, 교구의 선교 활동을 위한 선교사들에 대한 완전한 인사권을 갖게 되었고 더욱 활기차게 사목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본당과 공소를 위해 25,000달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25,000달러를 기부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함을 전하기 위해 이 편지를 씁니다. -중략- 또한, 한국의 행복한 가정 운동에 쓰라고 보내주신 10,000달러에 대해서도 감사합니다. 우리는 헌신적인 선교사들과 선교를 위해 많은 자금을 우리에게 계속해서 공급해 주는 선교회의 그 한없는 너그러움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보답할 길은 더욱더 없습니다. 우리는 사제들이 하느님의 왕국을 넓혀나가기 위해 더욱더 많은 노력을 하도록 하고 재원을 잘 사용하도록 독려할 수밖에 없습니다.”(1976년 3월 16일 아일랜드 총장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2020년 3월 8일 사순 제2주일 춘천주보 2면, 교회사연구소]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60) 박 토마스 주교 IV

 

 

박 토마스 주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른 평신도 사도직의 활성화에도 적극 나서 많은 평신도 운동이 우리 교구에 도입되고 발전해 나가도록 지도했다. M·E, 선택, 꾸르실료, 성령세미나, 농민회, 의사회, 교수회 등이 모두 박 토마스 주교 재임 시기에 태동하여 활동하기 시작했고, 이미 활동 중이던 레지오 마리애와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등은 더욱 활발하게 성장하였다. 활동 초기, 때때로 약간의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단체가 신앙과 공의회의 정신으로 세상과 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역할과 사도직에 충실하였다.

 

1982년 2월부터는 교회의 홍보 활동을 위해 춘천교구 월 소식지인 <회중>을 발행하기 시작했고, 같은 해 2월 28일부터는 그동안 본당 별로 발행하던 주보를 통합한 <춘천주보>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또한, 1980년대에는 많은 행사를 주관했는데, 1982년 10월 9일에는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준비하기 위한 <한국 천주교회 선교 200주년 기념 전국 신앙대회 겸 제3차 민족 복음화 대회>가 춘천에서 개최되었다. 이 행사는 여러 주교와 전국의 모든 교구가 참석한, 우리 교구가 주최한 최초의 전국 행사였다. 1983년 4월에는 200주년을 앞둔 사제들의 쇄신을 위한 <특별 연수회>가 한 달간 개최되었고, 교구 내 모든 구성원이 참석하는 <사목회의>를 열기도 했다. 1988년 5월 5일에는 춘천 실내 체육관에서 <인간 생명권 수호 대회>를 거행하여 낙태와 전쟁, 테러와 기아 등으로 죽어가는 인간의 생명에 대한 수호 의지를 천명했다. 일 년 뒤인 1989년 5월 5일에는 <춘천교구 설정 50주년 및 성체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 박 토마스 주교는 지병인 심장병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교구장 직무 수행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에 박 주교는 교황청에 사임을 청했고, 그 청원이 수락되어 1994년 5월 21일 28년 만에 춘천교구장직에서 물러났다. 그해 7월 16일 ‘소임을 다한 선교사는 사목지에 머물지 않고 본국으로 돌아간다.’ 라는 원칙에 따라 일생을 헌신한 한국과 춘천교구를 떠나 아일랜드로 돌아갔다. 본국에 돌아간 박 주교는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본부에서 휴양하던 중 1994년 10월 30일 심장 마비로 선종하여 ‘회중의 모범이 되어’ 살아온 일생을 마치고 하느님 품에 안겼다. [2020년 3월 15일 사순 제3주일 춘천주보 2면, 교회사연구소] 



1,071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