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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혼인 경험이 있는 여성에게 수도공동체의 삶을 열어 준, 한국 순교 복자 빨마 수녀회 안영옥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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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2-10 ㅣ No.1155

혼인 경험이 있는 여성에게 수도공동체의 삶을 열어 준, 한국 순교 복자 빨마 수녀회 안영옥 수녀

 

 

어렸을 때 부모끼리 정혼을 해둔 청년이 죽기 직전에 혼례만 치르고 혼인신고를 해둔 탓에 법적으로는 기혼이나 실질적으로는 미혼인 처자가 간절히 수도생활을 원했다. 한편, 남편이 일제강점기 징용에 나가 죽거나 한국전쟁 중 ‘미망인’이 된 새댁이 긴 여생을 수도생활로 마무리하고 싶었다. 또 아주 늦은 나이에야 수도 성소를 깨달은 노처녀도 있었다. 이런 이들이 수녀로 살 수 있다면 지금도 ‘어쩜’ 하며 감탄할 것이다. 그런데 반세기도 더 전에 이런 배경을 가지고 수도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다.

 

‘복자마을’을 꿈꾼 방유룡(1900-1986) 신부는 신분, 나이, 성별, 직분을 가리지 않고 하느님을 위해 살겠다는 사람은 누구나 수도생활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에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1946년)’와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1953년)’, 그리고 수녀회 소속 ‘외부회(1957년)’를 창설했고, 독신이 된 기혼 여성들의 수도공동체도 구상했다. ‘기혼 여성 수도단체’는 여성 수도자의 사회적 이미지와 긍지의 틀(편견)을 깨는 과감한 ‘도전’이었다. 이 어려움을 방 신부의 열린 영성, 이를 조직하고 지도한 복자 수녀회, 이곳에서 수도공동체로 성장해 낸 구성원들이 이겨냈다.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참고 견디며 후배들에게 든든한 왕국을 남겨놓았다. 한국 순교 복자 빨마 수녀회가 시작되고 정착되는 모습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크다. 씨 뿌린 이, 가꾼 이, 성장해간 이를 모두 다 거친 빨마회의 첫 회원 안영옥 수녀의 생애로 이를 볼 수 있다.

 

 

네 식구가 각각 수도원으로

 

안영옥(1922-2011)은 인천 태생으로 안영진과 박순이의 열한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고집이 세고 경우에 어긋나는 일이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안영옥은 당시 신자가 아니었지만 천주교 계통인 인천 박문 보통학교를 다녔다. 예능에 재주가 있었고, 특히 무용가가 되고 싶었다. 친척이 아버지 회사돈을 빼돌려 만주로 도주하는 바람에 집안이 어려워졌다. 당대 무용가 최승희 사무실로 찾아가 입단 허락을 받았으나 부모의 동의를 얻지 못하자 좌절하여 모든 꿈을 접고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채 학교도 포기했다. 걱정에 싸인 집안에서는 혼인을 서둘렀다. 1939년 열일곱 안영옥은 열두 살 연상인 최봉환과 혼인했다. 남편은 4대 독자로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부부는 슬하에 삼 남매를 두고 서울에서 생활했다.

 

그때 안영옥은 학창시절 기피하던 천주교 신앙에 갈망을 느꼈다. 1950년 막내 손을 잡고 서울 후암동 본당을 스스로 찾아가 영세했다. 영세 직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던 남편은 인민군에게 잡혀 학대받았다. 1.4 후퇴 때는 미리 대구로 피난했는데 이때부터 남편의 병세가 나타났다. 대구에서 장남과 장녀가 영세했다. 휴전이 되고 서울로 돌아와 파괴된 집을 수리하고 안정을 찾는 듯 했으나 남편의 건강이 악화됐다. 안영옥은 집을 팔아 치료에 전념했으나, 남편은 1956년 대세를 받고 귀천했다.

 

국토 전체가 전쟁 폐허가 된 상황에서 안영옥은 34살 나이에 16세, 14세, 12세의 세 남매를 둔 가장으로 세상과 맞서야 했다. 게다가 남편 장래 후 활용하던 적은 자금마저 사기를 당했다. ‘막다른 선택’을 생각할 정도로 생활은 비참했다. 후암동 본당에는 1954년 방유룡 신부가 주임으로 부임해 왔다. 당시 방 신부는 한 주에 사흘은 청파동 복자회에서 미사를 드렸다. 또 복자 수녀회 수녀들이 본당에 파견되어 사목을 도왔다. 이렇게 안영옥은 방 신부와 복자회 수녀들을 알게 되었다. 이 무렵 장남은 신학교 가기를 희망하여, 1957년 3월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에 입회했다.

 

같은 해 3월에 복자 수녀회 ‘외부회’가 창설되었고 안영옥은 7월에 입회했다. 복자회의 윤병현 수녀가 훗날 미망인 수도공동체를 계획 중이니 미리 들어와 시작하라고 권했기 때문이었다. 안영옥은 미망인 공동체에서 살기를 원했지만 자식들이 문제였다. 첫째, 둘째는 재가하라며 어머니의 수녀원 입회를 반대했고 막내는 찬성했다. 장남은 이미 수도원에 들어갔고 수녀원에서는 두 딸을 받아주기로 했다. 딸들은 아직 어리므로 장녀는 밀양 병원에 데리고 가서 심부름을 시키고, 차녀는 아직 초등학교를 마치지 못했으니 졸업 때까지 다른 이에게 양육을 맡기라고 했다. 1년 새에 가족이 가리가리 해체되었다.

 

안영옥은 1957년 9월 16일 착복식을 하고 나서, 짐을 네 몫으로 꾸려 수도원과 수녀원으로 나눠서 보내고, 막내는 학비를 주어 복자회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본당 회장댁에 맡겼다. 10월 2일, 안영옥은 수녀들을 따라 첫째 딸을 데리고 밀양 분원으로 향했다. 서울역에는 회장 부인이 막내를 데리고 배웅을 나와 있었다. 개찰을 하려고 나가자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막내가 쫓아와서 손을 잡고, “엄마, 이제 나는 어떡해?” 하면서 울기 시작했다. 안영옥은 아이의 손을 뿌리치고, 승강장으로 뛰어나갔다. 뒤통수에다 “엄마!”라고 부르던 소리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어린 삼남매, 당신이 꼭 보호해 주십시오. 이제 제 자식들이 아니고, 죽이든지 살리든지 당신 자녀입니다.’ 때때로 하느님과 약속을 어기면서라도 보고 싶은 아이들이었다(후인 이들 넷은 모두 수도자, 성직자가 되었다)

 

 

편견, 너와 나 양쪽에서 껍질 깨고 나와야

 

이때 복자 수녀회에서 밀양에 분원을 새로 내고 있었다. 밀양에 있는 ‘성모원’이라는 동정녀 모임을 맡던 신부가 수녀회를 창설하려다 뜻대로 되지 않자 이를 복자 수녀회로 넘겼다. 거기에는 병원도 딸려 있었다. 당시에는 복자 수녀회도 초기라 수녀들은 젊은데다가 공소 방문이나 농사일에 경험이 없었다. 그들은 연장자이며 세상과 중간 역할을 할 안영옥이 가서 돕기를 바랐던 것 같다. 안영옥은 밀양에 몇 개월 있다가 이듬해 복자회 수녀들이 부산 교구청 주방으로 파견될 때 함께 가서 반년을 살았다. 그리고 다시 분원 공동체를 따라 청학동 본당으로 이동했다. 눈에 밟히는 자녀들도 지난 과거도 다 잊으려고 애써가면서, 수녀들과 공소도 다니고 농사도 지으며 분주하게 보냈다. 진일 마른일 가리지 않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신분은 수도자들과 함께 생활하는 세속인에 불과했다. 수도자와 세속인의 구별이 엄격하던 시절, 식사도 따로 하면서 ‘수도자도 아니고 식모도 아닌’ 생활을 했다. 차라리 중방 살림을 보거나 외부회 회원으로 살면 명분이나 뚜렷했을 것이다.

 

5년이 흘렀다. 수녀원에서는 미망인 공동체는 고사하고, 도대체 아무 계획이 없었다. 서울 본원에서도 그저 참고 살라고만 했다. 그러던 차에 천안 학교 박 요셉 수녀 밑에서 양재부 일을 도울까 했는데 속히 부산을 가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부산에서 다시 생활을 시작했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어떤 신부들은 “수도자도 아니면서 왜 수녀들하고 사느냐”면서, 나와서 자유롭게 사회생활을 하며 아이들도 만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결국 몸져 누웠다. 그때 청학동 본당 김유재 주임 신부가 병문안을 왔다가 그 사정을 알았다. 방이라도 한 칸 있으면 나가 살면서 공동체 설립을 기다리고 싶다고 하자, 김 신부는 수녀원이 본당 뒤쪽으로 이사하면서 빈 집이 있는데, 그것을 이용하라고 했다. 하지만 본원에서는 공동체를 이루어야 나갈 수 있다고 했다.

 

 

하복순과 수도공동체로 출발

 

때마침 복자 수녀회 외부회 부산 지부 회원인 하복순이 공동체 설립에 합류했다. 하복순(1922-2003)은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집안이 어려웠다. 남매뿐인 집에서 남동생 하복근은 18세부터 가장 노릇을 했고 하복순은 이를 도왔다. 하복순은 1943년 김용호와 범일동 본당에서 혼인성사를 받았다. 남편은 혼인 후 바로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가 사망했다. 딸 김명자는 유복녀로 태어났다. 하복순은 동생 곁에 살며 콩나물 장사로 생계를 꾸리고 딸을 뒷바라지했다. 1959년 경남 여자 중학교 졸업반이던 딸이 갑자기 병이 났는데 병원에서 주사를 맞고는 ‘쇼크 상태’가 되어 어이없이 죽었다. 하복순은 실성한 사람처럼 되었다. 정신적 충격을 이겨내려고 신앙에 더 의지하던 하복순은 결국 외부회에 입회했다. 평일에는 콩나물 장사, 주일에는 다른 외부회 회원과 범일동 본당 성물판매를 하였다.

 

두 사람은 1962년 5월경부터 공동생활을 하며 입주식을 준비했다. 여러 해 비워 놓아 쥐들만 살던 집을 힘든 줄도 모르고 청소하고, 때우고, 손으로 시멘트를 개서 발랐다. 손이 다 부르터서 물건을 잡을 수도 없이 피가 흘렀건만 힘들지 않았고 먹지 않아도 배고픈 줄 몰랐다. 두 사람은 1962년 9월 4일 ‘빨마원’이라는 이름을 달고 외부회 회원들의 협조로 입주식을 했다. 신부가 열 한 명이나 참석했다. 당장 먹을 쌀도 없었지만 화려한 출발이었다.

 

빨마회 첫 회원 안영옥과 하복순은 상호 충실한 동반자였다. 성격적으로 외부 일은 안영옥이 맡았고 뒤에서 하는 일은 하복순이 챙겼다. 공동체가 시작되자 1963년에는 6.25 전쟁미망인 김복수, 1964년에는 이혼한 이영자, 그리고 1971년에는 노처녀라 불릴 정도로 과년한 손정숙이 엄마 같은 수녀를 모시고 살겠다며 입회했다. 미망인, 이혼녀, 미혼녀로 구성된 사랑공동체, 아직 정식 수녀도 아니고 단지 수도생활을 갈망하며 미래를 믿는 이들 다섯 명은 빨마회의 버팀목이 되어갔다. 이들은 “과부 떼가 무슨 수도생활이냐”는 소리를 들어가면서, 수없이 들어오고 나가는 회원들을 맞고 내보내며 그 자리에 있었다. 여성에게 직업이 별로 주어지지 않던 사회에서 더욱이 배움이 짧은 이, 가진 것 없는 이들의 희망이 되고자 했다. 결혼은 했지만 나름의 이유로 혼자 살게 된 여성을 ‘깨진 독’쯤으로 여기던 사회에서 이들만의 고유한 소임을 발굴했고 나름의 소명을 이루어내었다.

 

이들은 30년 후 부산 교구 소속 수녀회로 정식 인가받았다. 그 사이 초기의 목적인 미망인 공동체가 아니라 혼인 경험의 유무에 상관없이 다소의 사정이 있는 모든 이에게 가장 열린 공동체로 다져졌다. 당 한 뼘 없는 곳에서 현재 50여 명의 회원이 분원 공동체 10개를 이루는 데까지 새겨진 회원들의 갈등과 믿음은 다른 데와는 구별되는 면이 있다. 안영옥이 그 기초를 놓았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9년 겨울호(Vol. 48), 김정숙 소화 데레사(영남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도움 최금희 총원장 수녀, 홍현자 수녀(한국 순교 복자 빨마 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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