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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티앤껑신(田耕莘) 추기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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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22 ㅣ No.1132

티앤껑신(田耕莘) 추기경전1)

 

 

티앤껑신(田耕莘) 추기경의 자는 빙삼(聘三)이다. 산동성 양곡현(陽穀縣) 장추진(張秋鎭)에서 살았다. 조부는 상인이었으나 역시 독서를 하였는데, 과거를 보지는 않았다. 부친은 개량공(開싗公)으로 슬하에 5남매를 두었으나, 추기경이 넷째였다.3) 모친은 양(楊)씨로 갈가장(葛家莊) 사람이었다. 부친은 수재(秀才)로 시를 좋아하였고, 학생을 받아 가르치는 교사 생활을 하였다.

 

장추(張秋)는 비록 작은 진(鎭)이었으나, 양곡현보다 컸고, 운하와 황하(黃河)의 교차 지점으로 상업이 번성하였다. 성(城)은 동서로 나뉘었고, 약 23만 명의 인구가 있었으며, 운하는 도시를 가로질러 나갔으므로, 성(城)에는 수문이 있었다. 성(城)은 황하의 제방에서 1리(500m) 떨어져 있었고, 황하와는 18리(9㎞) 떨어져 위치하였다. 1606년(명 만력 34년), 항주(杭州)교우(이때 이미 마테오 리치와 친교를 이루었고, 4년 뒤에 세례를 받음)인 리즐짜오(李之藻)가 장추진(張秋鎭) 준천(濬泉)에서 100여 일 머무른 후에, 다시 남왕호(南旺湖)로 간 적이 있었다. 예전의 문무 관리들이 북경으로 들어가거나, 혹은 북경에서 나와 남쪽으로 갈 때에는 이곳에 머무르지 않을 수 없는 교통의 요지였다.

 

현성(縣城)에는 묘우(廟宇)를 갖추고 있었으나, 장추진(張秋鎭)에는 묘우(廟宇)를 갖추지 못하였었다. 현성에 있던 공묘(孔廟), 성황묘(城隍廟), 관제묘(關帝廟), 천후궁(天后宮) 등은 다른 성에 있던 것보다 많고 컸다. 진(鎭) 안에는 객상(客商)들 즉 제남(濟南) 사람과 산서(山西) 사람이 비교적 많았으며, 산서인(山西人)은 전당포, 전장(錢莊), 염방(染房: 염색), 철구(鐵具: 대장간)업 등을 경영하였다. 왕래하던 선박들은 제녕(濟寧: 제남에서 영파까지)을 통행하는 선박이 가장 많았으며, 대부분은 양식(糧食)을 운반하는 선박이었으므로, 장추진(張秋鎭)은 곡식 매매의 중심이 된 큰 시장을 형성하였다. 티앤 추기경의 두 번째 숙부는 양식업을 경영하여 큰돈을 벌었다.

 

당시 장추진(張秋鎭)에는 천주교가 아직 발전하지 못한 상태였고, 성내에 겨우 백여 명의 교우가 있었으며, 교당에는 1명의 신부가 거처하였다. 현성 내의 주민들 중,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5, 6백 명 정도이었다. 회교(이슬람교) 청진사가 3곳 있었으며, 교도는 수 천 명이었다. 청조 때, 천주교인은 회교도들과 충돌하여 천주교인이 보다 많은 상해와 피해를 보았는데, 회교 청진사 한 곳은 천주교인들의 손에 의해 파괴되었다.

 

티앤(田)씨는 장추진(張秋鎭)에서 가장 큰 씨족을 이루고 있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수하였다. 티앤 추기경은 1890년(청 광서 16년 음력 9월 11일) 양력 10월 24일에 태어났다. 당시 중국 천주교에서 이름난 사람들과 비교해 본다면, 마샹보(馬相伯) 선생보다 58세가 적었으며, 잉지앤즐(英斂之) 선생보다는 33세가 적었다. 레이밍위앤(雷鳴遠) 신부보다는 13세 적었다.

 

티앤 추기경의 부친은 1896년(광서 22년) 파리장(坡쐮莊) 소수도원의 중국어 교원으로 초빙되었다. 2년 후 세례를 받았으며, 세례명은 베드로였는데, 오래지 않아 서거하였다. 티앤 추기경 본인은 12세가 된 1901년(광서 27년) 영세를 받았는데, 당시는 거야(鉅野)교안이 발생한 지 4년째였으며, 의화단(義和團)이 일어난 지 1년이 지난 때로 레이밍위앤 신부가 중국에 도착한 때이었다.

 

티앤 추기경은 형 1명과 누나 2명, 1명의 누이동생이 있었다. 큰 형과 큰 누나는 먼저 사망하였고, 둘째 누나는 모친보다 먼저 영세를 받았고, 이미 결혼하였으며, 현재는 생사를 알 수 없다. 모친은 1915년에 영세를 받았다.

 

티앤 추기경은 유년시절에 독서를 좋아하여, 당시 가장 유행되었던 삼자경(三字經), 백가성(百家姓), 유학경림(幼學瓊쐹), 사서(四書), 시경(詩經), 경서(經書), 역경(쮹經), 사기(史記), 좌전(左傳) 등을 읽었으며, 고문(古文)과 책론(策論) 등을 즐겨 읽었다.

 

티앤 추기경이 천주교를 믿게 되었을 때, 산동(山東) 교구가 세 개의 교구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연대(煙臺) 교구로 프랑스 프란치스코회 소속이 되었고, 둘째는 노북(魯北) 교구로 독일의 프란치스코회에 속하게 되었으며, 세 번째는 노남(魯南) 교구로 독일의 말씀의 선교수도회에 속하게 되었는데, 양곡(陽穀)은 노남(魯南) 교구에 속하였으며, 중국 말씀의 선교수도회의 발상지가 되었다.

 

1882년(광서 8년) 말씀의 선교수도회 선교사가 산동으로 왔고, 양곡(陽穀)에 공학을 설립하였다.

 

1904년(광서 30년)에서 1910년(선통 2년)까지는 티앤 추기경이 소수도원에서 공부할 시기였고, 1910년(선통 2년)에서 1916년(민국 5년)까지는 대수도원에 있을 때였으므로, 철학과 신학을 배우던 시기였다. 소수도원 시기에 티앤 추기경과 20여 명의 친구들이 가장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라틴어, 중국어와 라틴어의 통·번역 과목으로, 번역이 매끄럽게 통하지 않았고, 교수방법 역시 옛 것을 따랐으므로 어려웠고, 중국어는 상해 서가회(徐家滙) 출판의 〈고문십급〉(古文拾級)을 활용하여 학습하였다.

 

티앤 추기경은 신부가 될 행운을 안고 있었다. 1916년 그는 아주 심한 폐병을 앓게 되어 피를 토할 정도까지 악화되었고, 반년 후에는 병이 좀 나아졌으나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으므로 집으로 돌아가 요양하면서 몸을 돌보아야만 하였다. 1917년 주교는 이미 그를 성모승천 첨례일에 학교로 돌아오도록 결정하였고, 신부로 승품시키려 하였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이란 것은 재고할 필요도 없다. 이때, 티앤 추기경은 사제의 성직을 받을 수 있었을까 없을까에 대하여 그의 의지가 흔들렸고, 이로써 1년을 연기한 후에 신품을 받을 것인가에 대한 결정을 하도록 연기를 신청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 또 다시 병이 나자, 주교는 “수도원은 병을 요양하는 곳이 아니다. 너에게는 성소가 없으니 가봐!”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1918년 6월 9일 사제 서품을 받게 되었다.

 

1917년 8월 14일은 중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산동(山東)의 독일국적 선교사들은 외출이 금지되었으나, 헤닝하우스(Mgr. Augustin Hennighaus, 중국명: 韓寧鎬) 주교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1919년 2월 1일(음력 정월 초하루), 갑작스러운 소식은 독일 신부, 주교가 모두 중국을 떠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영국과 프랑스 두 국가들이 주장하였으며, 미국은 이에 찬동하지 않았다. 그 진실은 교구 내 선교사들이 모두 연주(兗州)에 모여, 자신들의 고국으로 떠나가려고 하였는데, 중국 신부는 여전히 현지 인민들을 부추겨 선교사들이 돌아가는 것을 만류하게 하였으며, 한 달이 채 안되어서, 전체 선교사들은 모두 원래의 임무지로 돌아갔다.

 

이 한 달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티앤 신부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 왕장(王莊)에서 주임 사제를 담당하였고, 고아원도 맡아 보았다. 이후에는 대가(戴家)로 파견되었다.

 

같은 해 봄, 문상(汶上)의 교무를 관리하였다. 문상(汶上)은 유일하게 큰 현(縣)으로 교우가 3, 4천 명이나 있었다. 약 1개월 동안 거처한 후, 부활절 전일에 거야현(鉅野縣)으로 가서 주임사제를 거들어 주었다. 이 현에는 4, 5천 명의 교우가 있었다. 티앤 추기경의 서술에 의하면, 같은 해 여름이 선교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었다고 하였다. 10월, 명령을 받고, 단현(單縣)으로 갔고, 연말에는 또 황강(黃岡)으로 갔다. 이때 토비들이 부단히 출몰하였으나, 선교사들을 위협하지는 않았다.

 

1910년, 1911년의 기간에는 모두 황강(黃岡)에 있었고, 기타 지역에는 교우가 1천여 명 있었으며, 신부는 1인이었으며, 남녀 선교원은 10여 명이었다.

 

티앤 추기경의 구술 중에, 우리들은 두 사건에 대하여 들을 수 있었다. 하나는 노서(魯西)의 조주부(曹州府) 거야현(鉅野縣)에 유명한 교안이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1919년 티앤 추기경이 거야현(鉅野縣)에 있을 때, 교우와 외교도들이 아주 잘 지냈다는 것이고, 전 추기경은 거야현을 가장 좋아하였고, 말씀의 선교수도회와 지방과의 감정 또한 아주 양호하였다고 한다. 거야 교안이 발생한 것과는 22년 전의 일이었다.

 

두 번째는 티앤 추기경이 신부가 되던 해, 레이밍위앤(雷明遠) 신부가 천진(天津)으로 추방되었고, 다시 절강 소흥(紹興)으로 보내졌을 때, 프랑스 선교사들이 이곳에 도착하였으며, 이들은 중국 신부들이 익세보(益世報)와 익세주일보(益世主日報)를 열람하는 것을 엄금시켰다. 그러나 산동(山東)의 독일 국적의 선교사들이 관할하는 구역에서는 금지를 시키지 않았으며, 익세보는 산동 교회에서는 기금을 내어 익세보를 발간까지 하였다.

 

전자에 대해서, 거야(鉅野)교안에 피해를 입은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로 인하여, 말씀의 선교수도회 선교사들까지도 영향을 입은 것은 선교방식 상에서 이미 자기 자신들이 변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후자에 대해서는, 독일은 프랑스가 보호권을 향유하는 것에 불만을 갖고 있었으므로, 레이(雷) 신부의 행동에 대하여 최소한의 반대를 하였던 것이다.

 

1922년(민국 11년), 한 차례 사제 이동이 있었고, 소학교를 관리하였는데, 학생은 7, 80여 명이었으며, 전부 교우였다. 학교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입안(立案)을 계획하였는데, 또 명령을 받고, 범현(範縣)으로 이동되었다. 입안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당시 전국 교회 소학은 아주 입안 되는 것이 아주 적었다.

 

범현(範縣)에는 7백 명의 교우가 있었는데, 대부분이 농민이었고, 티앤 추기경은 그 곳에서 새로운 교우들과 아주 관계가 좋았고, 여교우들이 남자교우들보다 많았다. 현지 인민은 천주교에 대해 본래 아주 우호적이지 않았으나, 티앤 추기경이 2년간의 업무를 본 후, 상황이 많이 좋아졌고, 티앤 추기경은 지방의 인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교우들은 성당에서 가장 먼 곳에 사는 사람이 50km 떨어져 있었으며, 대다수의 사람들은 30리(15㎞)이상 떨어져 있었다. 성(城) 안에는 거의 교우가 없었다. 주일에 성당에는 오직 50여 명이 미사 참례를 왔다. 티앤 추기경은 대부분 각 교우들이 모여 있는 곳을 방문하고, 시찰하면서 미사를 집전하였다.

 

1915년 티앤 공의 어머니가 영세를 받았고, 그녀는 11년 후에 사망하였다.

 

티앤 추기경의 자술에 의하면, 1920년(민국 9년) 꾸에브란트 주교(Mgr. J. B. Budes de Guebriant, 光)가 중국 교무를 시찰하면서, 연주부(兗州府)에서 이틀을 머무르면서 2, 3명의 중국 신부를 만났으며, 산동 교무에 대하여 만족을 표시하였다. 티앤 추기경이 산동의 외국국적 신부들이 처음에는 중국 신부에게 이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그 후 점차 바뀌었다. 이후 교황대표인 코스탄티니(Celso Costantini, 剛恒毅) 주교 역시 연주(兗州)에 도착하였고, 교무 상황을 보고받고 아주 만족하였다.

 

1926년 티앤 추기경은 어대현(魚臺縣)으로 옮겨갔고, 교우는 2천 여 명이었으며, 모두 충실하였으나, 신앙이 견실하지는 못하였고, 성실하지 못한 자가 많았으며, 티앤 추기경은 스스로 이곳에 선교를 하였고, 많은 힘을 들였다. 때는 북벌(北伐)시기로 여전히 남녀 소학을 설립하여, 훈련을 시켜 1년에 4개 반을 만들었으며, 각 반에는 1백 명에서 1백 5십 명의 학생이 있었으며, 하루에 4과목 수업을 했고, 심지어 여교우들까지도 그 혜택을 보았다.

 

그 당시 티앤 추기경은 선교경비를 상해, 홍콩, 페낭섬 및 남양 각지에서 모금을 하였다. 금(金) 1파운드는 16은원(銀元) 대양(大洋)이었고, 양식을 사는 가격으로 볼 때, 1원(元) 대양(大洋)으로는 55근의 고량(高粱; 수수)을 구입할 수 있었고, 대두(큰 콩) 1 말(斗) 즉 60근은 가격으로는 1원(元) 2각(角)이었다. 밀은 1말(斗)의 가치가 2원(元)이었는데, 선후로 모금한 대양(大洋)은 1만원에 이르렀다. 이에 교리반의 학생모집을 확대하였고, 기숙사를 제공하였으며, 아울러 각종 교우들이 종교행사에 열성인 단체에 격려금을 제공하자, 교우들은 이에 크게 증가하였다.

 

1929년 3월 8일 그는 말씀의 선교수도회에 가입하였고, 2년간의 초학 훈련을 받았다. 1931년 2월 7일에는 마지막 허원을 하였다. 가상(嘉祥)으로 임지가 이동되었는데, 그곳의 교우는 2천 명이 채 안되었다. 다시 10월에는 운성(鄆城)으로 이동되었으며, 교우는 2천 여 명이었으며, 교우들은 교회의 규율을 잘 지켰다. 같은 해 산동성은 임청(臨淸)을 새로운 감목구로 분리시켰으며, 감목으로는 호수신(胡修身)인 중국인이 임명되었고, 1932년(민국 21년) 7월 1일에 양곡(陽穀), 수장(壽張), 관성(觀城), 조성(朝城), 급범(及範), 복(濮) 6개의 현이 자치구가 되었고, 12월 13일 감목구로 되었다. 1934년 2월 23일 티앤 공이 감목으로 발표되었다. 이때부터 더욱 활발한 교무가 전개되었다. 당시 사제는 모두 12명이었고, 교우는 13,700여 명이었다. 주교좌 성당은 파리장(坡里莊)이었다.

 

1937년 2월 3일에서 7일까지, 마닐라에서 거행되는 국제 성체대회에 참가하였고, 이를 위해 첫 번째 출국을 하였다. 1939년 7월 11일, 교황청은 티앤 공을 양곡(陽穀) 종좌대목에 임명하였다. 교황은 아울러 친히 축성하고자 하였다. 당시 중일전쟁이 폭발한지 이미 2년째가 되었고, 일본군이 화북(華北) 및 화동(華東) 연안을 점령하였으며, 티앤 공은 일본군의 전선을 뚫고, 상해로 와서 유럽으로 가는 배를 탔으며, 수에즈 운하에 도착하지 못하였을 때, 독일은 9월 1일 네덜란드를 침공하였다. 3일,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티앤공은 독일 함선으로 원동으로 돌아가고자 하였고, 교황은 그가 교황청으로 올 것이라는 희망을 버렸으나, 예기치 않게 티앤 공은 다른 배를 타고, 10월 29일 성 베드로 성당에 도착하여, 교황으로부터 친히 주교로 축성을 받았다.

 

어떤 해의 중국 교무통계에는 영세, 입교자수가 한양(漢陽)교구가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양곡(陽穀)교구라고 하였다.

 

1941년(민국 30년) 10월 3일, 청도(靑島)주교 웨이그(Mgr. Georgts Weig, 중국명: 維昌祿)가 서거하였다. 13개월 후인 1942년 11월 10일, 티앤 공이 청도 주교로 이임되었다. 이 웨이그 주교는 그가 수도원장직을 맡고 있었을 때, 티앤 공에 대하여 말하기를, 「당신은 성소가 없는 사람이다.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한 사람이었다.

 

1945년 8월 14일 일본이 무조건 투항하였고, 10월 11일 미국 해군 제6사단이 청도에 상륙하여, 일본군을 무장 해제시켰다. 28일, 티앤공은 주교좌성당에서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같은 해 12월 24일 교황청은 티앤 공을 원동 최초의 추기경에 임명하였다. 다음해 2월 18일, 티앤 공은 로마에서 교황이 친히 집전하는 추기경 승품 예식에 참가할 수 있었다. 4월 11일, 교황청은 또 중국에 정식 교계제도(敎階制度 또는 敎統)를 선포하였고, 전국을 20개의 교성(敎省)으로 나누었으며, 각 교성에는 1명의 대주교를 임명하였으며, 티앤 추기경을 북평(北平) 대주교에 임명하였다.

 

1946년 6월 29일, 티앤 공이 북평에 도착하면서, 청년 신부들을 대학에 보내 보다 많은 학문을 할 것을 강조하였다.

 

1947년 5월, 공산군이 기동(冀東)을 점령하자, 교우들이 북경으로 몰려왔으므로, 이들을 수용할 것을 생각하여야 하였다. 가을 경신(耕莘)중학이 설립되었는데, 이것은 실제로는 소수도원이었으며, 수도생은 80여 명에서 150명으로 증가하였다. 10월 10일 또 보인대학(輔仁大學)에 성 토마스 철학원이 설립되었는데, 실제로는 철학계를 위주로 하는 대신학생들이 철학과에 들어와 전공을 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각국 각 수도회 신부들은 북평에서의 선교를 환영하였고, 상지(上智)번역관을 설립하였으며, 서적을 출판하였고, 전공지식인들이 읽었다. 또 천주교 방송(廣播)협회가 설립되었다.

 

1948년 6월 10일, 안질이 심각하여, 상해로 가서 치료를 받았다. 같은 해, 가을, 경신(耕莘)중학 학생들, 즉 수도생들이 250명에 달하였다. 12월, 공산군이 북평성을 포위하였고, 수도원을 이전할 틈도 없었으므로, 이를 티앤 추기경은 큰 유감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1949년 봄, 티앤 추기경은 한차례 대만을 방문하였는데, 그것은 교황 공사 홍콩주재 비서를 남게 하기 위한 것으로 공산당 방면에서 대륙에 중국 천주교의 교황을 만드는 것을 반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시카고에 거주하였면서 안질과 심장병을 치료하였다.

 

1950년, 교황 비오 12세가 티앤 추기경을 초청하였는데, 그것은 11월 1일 성모의 육신이 승천한 것에 대한 찬반 투표에 대한 참가를 위한 초청이었다.

 

중국 정부는 티앤 추기경을 중국에 상주시키기를 희망하거나, 혹은 대만으로 보내는 줄 것을 희망하였으나, 1957년 9월 13일, 티앤 추기경은 대만에 도착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11월 8일 대만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1958년 8월 14일에는 서독의 파앙(波昻) 부근의 자동차 사고로, 어깨에 큰 부상을 입었다. 10월 9일, 교황 비오 12세의 사망 때, 티앤 추기경은 로마에 부임하여 교황선거에 참가하였고, 병상에서 투표하였다. 1959년 6월 28일 비행기로 미국으로 돌아가서, 시카고에 머물렀다. 12월 4일 교황 요한 23세는 티앤 추기경을 대북(臺北) 대주교에 임명하였다. 1952년 8월 7일 대만은 이미 교계제도(敎階制쇐; 聖統)가 성립되었다. 1960년 3월 1일 대북의 이신(履新)에 도착하였다.

 

본 내용의 3년간 기록은 (본인 [저자 팡하오]이) 미국 콜롬비아 대학 중국근현대편찬위원회의 도움으로 기록한 것이고, 부분 자료는 3차에 걸쳐 대북(臺北) 근교의 대평림우(大坪林寓)에서 티앤 추기경이 구술한 내용을 근거로 작성한 것이다. 원래의 원고는 영문으로 되어 있으며, 선도보(善導報)에는 중문으로 발표되었다. 티앤 추기경의 은경축일을 이로써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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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 내용은 羅光 主編 《天主敎在華傳敎史集》(光啓出版社等聯合出版, 1967年版)의 〈田耕莘傳〉(方豪 著述)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2) 충북보건과학대학교 중국비즈니스과 교수

 

3) 원서에는 3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하고 있는데, 본문 아래쪽을 보면, 티앤 추기경은 형 1명과 누나 2명, 1명의 누이동생 1명을 두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로써 티앤 추기경은 5남매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국문역자 주)

 

[학술지 교회사학 vol 10, 2013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팡하오(方豪) 저술 · 신의식2) 국문번역]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212808&Page=12&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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