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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죽음에 대한 성찰: 모든 문화적인 것의 시원으로서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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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20 ㅣ No.388

[죽음에 대한 성찰] 모든 문화적인 것의 시원으로서 죽음

 

 

전공이 문화사회학인데, 박사 학위 논문 주제가 ‘죽음’이라 말하면, 의아해 하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문화라는 사회(과)학적 개념과 죽음의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단박에 떠오르지 않는 모양입니다. 죽음이라는 주제는 사회학보다는 철학, 신학 또는 심리학 같은 분야와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도 그랬습니다. 죽음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죽음을 사회학적으로 공부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습니다.

 

 

문화의 시원에는 무덤이 있다

 

독일에서 공부하던 시절, 문화사회학 시간에 만난 죽음이라는 테마, 그저 막연한 끌림으로 시작한 ‘죽음 공부’. 이 공부를 계속하게 된 시작점에는 한 줄의 문장이 있습니다. 지금은 제목도 저자도 기억나지 않는 두꺼운 책에서 만난 한 문장이 제 맘에 깊이 남았습니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우리가 문화라 부르는 모든 것의 시원에는 무덤이 있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한 줄의 문장이 전해 준 울림은 길고 깊었습니다. 문화적인 것이라 하면 좁은 의미에서 이해하든 넓은 의미에서 이해하든 간에 뭔가 고양된 것, 뭔가 가치로운 것이 연상되지 않는지요. 그런데 그 시작이 삶의 끝의 흔적인 무덤이라니. 그 무덤이 모든 문화의 시작이라니.

 

 

시작에 끝이 있었다

 

이 문장의 울림을 곱씹으며 비로소 ‘문화’라는 말이 가진 깊은 뜻을 나름 이해할 수 있었고, 그 공부의 과정은 이 문장의 의미를 저 나름으로 추적하는 과정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죽었다. 나와 살을 맞대고 살던 그 누군가가 더 이상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 것이 출발점이 되었을 겁니다, 인간이 어떤 형태로든 ‘무덤’을 만들고, ‘장례’라는 것을 치르게 된 것은.

 

사실 이미 죽은 사람은, 어떤 육체적 · 정신적 · 사회적 기능도 수행하지 않는 사람은, 개인적으로도 집단적으로도 더 이상 ‘유용’하지 않습니다. 불편하게 들리겠지만 도구적 수준에서만 보자면 사체는 ‘쓰레기’일 뿐이고, 위생적인 문제만 없게 처리하면 될 일이었을 겁니다.

 

 

인간이 최초로 지은 집, 무덤

 

우리는 어차피 시간과 함께 자연으로 돌아갈 터. 무덤을 만들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기능적으로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무덤과 장례는 기본적으로 ‘허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위생적인 문제 때문이라고만 보기도 어렵습니다. 그렇게 보기에 인간은 터무니없이 많은 시간과 노동력을 들여 끊임없이 무덤을 만들고 장례를 지냈으니까요.

 

인간은 선사 시대부터 끊임없이 죽은 이를 위한 무덤을 만들고, 장례를 치렀습니다. 건축학자들도 인간이 동굴을 나와 최초로 지은 건축물은 집이 아니라 장례식을 치르기 위한 신전(‘괴베클리 테페’)이었다고 추측합니다. 그것은 이 건축물이 인간에게 그만큼 중요했고, 그만큼의 수고와 비용을 들일만큼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며, 인간이 아주 오래전부터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문화, ‘의미’를 부여하고 만들어 가는 과정

 

그리고 바로 이 ‘의미’라는 단어에 문화의 핵심이 있다고 봅니다. 어떤 방식으로 문화를 정의하든지, 문화라는 개념의 핵심어 단 한 가지가 있다면, 저는 그것이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무언가의 의미를 찾아냈을 때,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때, 의미를 만들어 냈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그 무엇인가를 문화라 부를 수 있습니다.

 

예컨대 흔히 음식 문화라는 말을 쓰지만, 사람이 배가 고파서 무엇인가를 먹는 것은, 그 자체로는 아직 문화라고 볼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음식과 결부된 수많은 ‘의미망’이 음식을 문화로 만듭니다. 그 결과로 어떤 음식은 때로 신성한 것이 되기도 하고, 때로 불경한 것이 되기도 하지요. 어떤 곳에서는 음식을 손으로 먹어야만 하고, 어떤 곳에서는 음식을 손으로 먹는 것이 금지됩니다. 이 모든 것이 그 음식 자체에 ‘내재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어떤 요소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겠는지요? 인간이 음식에 부여한 의미망이 그리 만드는 것이 거의 분명합니다.

 


가장 비기능적인 사건에 부여된 가장 고도의 상징적 의미

 

그렇습니다. 인간이 아주 먼 옛날부터 시신을 수습하고 예를 갖추었다는 것은 인류가 타인의 죽음에 어떤 맥락(두려움, 공포, 슬픔, 기원 등)에서였던지 의미, 특히 ‘상징적 의미’를 부여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인간은 이미 ‘생존’을 넘어 ‘실존’하게 된 ‘문화적 존재’였던 것입니다.

 

인간이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해 왔는지, 어떻게 기억하고 그 기억을 공유해 왔는지에 대한 명백한 증거로서의 무덤은 인간이 자신과 타인의 죽음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해 왔다는 것, 어찌 보면 가장 비기능적인 사건에 대해 가장 고도의 상징성을 부여해 왔다는 것,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죽음이야말로 모든 문화적인 것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줍니다.

 

 

죽음을 기억하는 방식, 한 사회의 문화 척도

 

이것이 무덤에서 인간 문화의 뿌리를 읽어야 하는 까닭이고, 죽음을 기억하는 방식이 그 사회의 문화 척도가 될 수 있는 까닭이기도 할 겁니다. 우리 사회가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질문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죽음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갖고 있는지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어디를 향해 가는지를 판단하게 해 주는 중요한 기준점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도구적 합리성으로만 무장한 오늘의 반문화적 죽음 풍경은 다름 아닌 아직 살아 있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황폐화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듯하여 씁쓸하기 짝이 없습니다. 죽음과 죽음의 공간에 적절하고도 합당한 자리를 부여하는 일은, 우리 삶의 문화적 시원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이며, 우리 삶이 동물과 다른 인간적 삶임을 주장하려는 최소한의 근거를 회복하는 일이라 믿으며, 한 해의 시작을 죽음에 대한 생각과 함께 열고자 합니다.

 

* 천선영 율리아나 - 경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 이소영 수산나 - 홍익대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미술학과 동양화전공 미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심홍 이소영의 수묵일러스트레이션」, 「꽃 속에 마음 담은 우리 옛그림」을 펴냈다.

 

[경향잡지, 2020년 1월호, 글 천선영 · 그림 이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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