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레지오ㅣ성모신심

허영엽 신부의 나눔: 나의 오랜 친구, 차동엽 신부를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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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05 ㅣ No.666

[허영엽 신부의 ‘나눔’] 나의 오랜 친구, 차동엽 신부를 추모하며

 

 

차 신부를 처음 만난 건 1988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였습니다. 우리 둘 다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였죠. 사제품을 받고 유학을 온 나와는 달리, 서울대를 졸업하고 뒤늦게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당시 서품 전의 신학생 신분으로 유럽으로 유학을 왔습니다. 그와 첫 만남에서부터 ‘이 사람과 나는 평생 함께 가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낯선 땅에서 힘들게 공부 중이던 우리는 만나서 대화를 나눌 때마다 서로의 신앙과 심성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도 나처럼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하고 병치레가 잦았다고 했습니다. 차 신부의 관심 분야와 교회에 대한 생각은 끝이 없을 정도로 풍부하고 신선했습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나는 그가 뼈 속 깊이 철저한 신앙인이자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애국자이며, 인간에게 깊은 연민을 느끼는 인격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연배가 비슷한 우리는 어느새 친구가 되었습니다. 비엔나에 머무르는 동안, 주머니 사정이 조금 나았던 나는 그를 거의 매일 시내로 데리고 나가 한식을 함께 사 먹었습니다. 타지에서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사주는 것처럼 큰 애덕은 없다고 하지요. 타지에서 힘이 되어주는 한식을 먹고서, 헤어질 때엔 꼬깃꼬깃 접은 용돈을 그의 주머니에 넣어 주었습니다. 매번 사양하는 그에게 “나중에 다른 후배에게 대신 갚아요” 하면서 함께 웃곤 했습니다.

 

1988년 10월29일 늦가을, 유럽에 머물고 있던 한국인 사제와 신학생들에게 슬픈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전주교구 소속 김 안토니오 신학생, 인스브루크 알프스 산 등반 도중 실족사.’ 사고를 당한 신학생의 나이는 이제 겨우 스물여덟.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고 몇 달 후 사제품을 받기 위해 고국으로 귀국하려던 차였습니다.

 

 

서로의 신앙과 심성에 빠져든 차 신부와 나

 

안토니오 신학생의 장례미사에서 다시 그를 만났습니다. 차 신학생은 부고를 듣고 급히 비엔나에서 인스부르크로 달려왔던 차였습니다. 공부 때문이었는지 몹시도 피곤해 보였습니다. 우리는 안토니오 신학생의 시신을 사이에 두고 눈인사를 건넸습니다. 갑작스런 사고에 한국의 가족은 한 명도 참석하지 못한 채 인스브루크 신학교 성당에서 장례미사가 봉헌되었습니다. 이국땅에서 아깝게 숨져간 한 젊은 신학생의 죽음은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동료 신학생의 울먹이는 고별사에 우리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친구야, 추운 땅속에 너를 묻으려니 몹시 마음이 아프구나. 춥지 마라. 몇 달만 있으면 우리가 그토록 그리던 한국에 갈 수 있는데… 왜 험한 길을 나선 거니?” 우리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학생은 십여 년 전 똑같은 사고로 숨진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의 저자인 김정훈 부제의 묘지 옆에 영원히 잠들었습니다. 묘지까지 가는 길에 우리는 함께 걸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이렇게 울고 슬퍼해도 결국 시간이 흐르면 이 모든 것도 잊히겠지요?” “살아 있는 사람들은 각자 다시 자신의 삶을 또 살아가야 하니까요. 그래서 인생이 참 슬픈 거죠.” 우리 두 사람은 나지막이 대화를 나누며 함께 운구행렬을 따랐습니다. 안토니오 신학생의 영혼이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안식을 누리기를 기도하며 그의 묘지에 꽃 한 송이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한참 올려다보았습니다. 유난히 푸르고 높은 가을 하늘, 그 하늘 끝으로 가면 거기에 어머니의 나라, 우리의 고향이 있겠지 하는 생각을 위안 삼아 눈물을 삼켰습니다. 그 이후에도 우리는 몇 번 유럽에서 만났고 만날 때마다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 때는 내가 공부하고 있던 독일에 그가 방문하여 며칠간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차 신부는 공부를 마치고 귀국해 사목과 강연, 집필 활동으로 무척 바쁘게 지냈습니다. 차 신부는 특히 자신의 강의를 통한 선교의 도구로서 미디어를 잘 활용했습니다. 덕분에 미디어 분야 사목을 담당하고 있던 나는 차 신부를 여러 방면으로 도울 수 있었습니다. 그의 저서 ‘무지개 원리’는 ‘한국판 탈무드’라고 불릴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고 공중파 방송에서도 차 신부의 강연을 앞 다퉈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차 신부가 지금까지 해온 각종 특강과 저술 등, 그가 펼쳤던 사목 활동은 말 그대로 ‘기적’이었습니다.

 

 

죽음을 묵상하며 현재의 삶을 더 값지고 은혜롭게 살아야

 

우리는 일 년에 보통 한두 번 잠깐 만나는 게 전부였는데도, 오랜만에 만난 걸 실감하지 못할 정도로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면서 차 신부의 일은 자꾸 늘어갔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가 건강이 안 좋은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의 건강이 걱정되어 안부를 물을 때면 “난 40세까지만 건강하게 살아도 하느님께 땡큐야!” 라며 특유의 그 표정으로 환하게 웃어주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차 신부는 오래전부터 이미 죽음을 각오했던 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아니 그는 사목 활동에서 자신의 고통과 죽음은 한쪽에 미뤄놓은 듯한 태도였습니다. 차 신부는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깊어 산책을 할 때나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주머니에서 묵주를 꺼내어 같이 로사리오 기도를 하자고 했던 적이 많습니다. 함께 묵주기도를 바쳤던 시간은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추억이 되었습니다.

 

차 신부를 떠나보내며 인간의 삶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한없이 유한하고 나약한 존재인 우리네 인생은 가을날 힘없이 바람에 떨어져 흩날리는 낙엽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을 믿으며, 죽음이 끝이 아니고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과정임을 잘 압니다. 그래서 죽음을 묵상하며 오히려 현재의 삶을 더 값지고 은혜롭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나의 오랜 친구 차동엽 노르베르토 신부는 그의 길을 최선을 다해 달렸고 이제는 편안한 안식에 들게 되기를 청하며 기도합니다.

 

“주님, 사제 노르베르토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아멘.”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1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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