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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교회사 속 여성 - 순조(교회 재건기): 동정 부부 (2) 교회 재건을 위해 산 조숙과 권천례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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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12-11 ㅣ No.1067

[한국 교회사 속 여성 - 순조(교회 재건기)] 동정 부부 (2) 교회 재건을 위해 산 조숙과 권천례 부부

 

 

이순이와 유중철 동정 부부는 당시 조선 사회에는 없던 수덕 생활을 실천하여 자신들이 깨달은 영성을 교우들에게 전하고 순교했다. 이어서 두 번째 동정 부부인 조숙(조명수, 1786-1819년)과 권천례(1783-1819년) 부부는 그들의 절제로 얻은 생명력을 교회의 재건에 쏟아 넣었다.

 

 

첫날밤, 자발적 동정 서약

 

양근 한감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 있던 권일신 집안은 집안 전체가 조선 교회의 기둥 역할을 해 왔다.권일신의 3남 1녀 중 외동딸인 권천례는 첫 동정 부부인 이순이의 이종사촌 동생이다. 권천례는 일곱 살에 모친을 여의고, 2년 뒤 제사 문제로 불거진 진산 사건의 여파로 부친을 잃었다. 그러나 그는 어렸음에도 본성의 흠을 조절할 줄 알았고, 자신의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더욱이 자라면서 그의 정신적 덕과 용모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렇지만 그는 하느님께 동정을 바치고자 했으며, 주문모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았을 때 이 결심을 굳혔다.

 

그러나 그가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신유박해로 집안은 몰락하고 오빠들은 유배되었다. 결국 권천례는 조카 한 명을 데리고 서울로 가 은거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친척들은 그의 환경에서 동정을 지킨다는 것이 위험하다며 혼인을 강권했다. 그리하여 21세에 조숙과 혼인하게 되었다. 조숙도 양근 태생이었는데, 신유박해로 함경도에 유배 갔던 조동섬의 종손이었다. 조숙은 신유박해를 피해 강원도에 있는 외가로 피난 가서 거기서 자랐는데, 그동안 교우들과의 상종이 드물었다고 한다.

 

당시 조선 풍속으로는 첫날밤에 신부가 신랑에게 말을 거는 것이 관습에 어긋나므로 권천례는 동정의 아름다움을 제시하며 동정을 지키자는 글을 썼다. 그리고 그는 신방에 둘만 남게 되자 조숙에게 그 글을 주었는데, 단번에 그의 마음이 움직였다. 그들은 남매와 같이 지내기로 약속하며, 또 다른 차원의 신앙 세계로 들어갔다. 이순이의 경우에는 주문모 신부가 동정 부부를 제안했고 양가 부모가 인정한 삶의 형태였다. 반면에 조숙 부부는 자발적이고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이 약속을 지키면서 15년을 지냈다. 이 두 젊은이가 스스로 발한 서원에 거슬리는 유혹을 느낀 적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으리라.

 

평온한 상태가 회복되자 조숙 가족은 서울로 돌아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했다. 그들은 가난했으나 절약하여 이웃을 도왔고 일주일에 두 번 대재를 지켰다.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 기도와 영적 독서를 하며 사람들에게 교리를 설파했고, 그들을 위로했다. 신자이건 비신자이건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떼를 지어 방문했다. 부부의 생활은 성화와 완덕을 향했다.

 

이 부부에게 고동이(1761-1819년)라는 충실한 동료가 함께했다. 그는 황해도 사람인데 함경북도 무산에 유배된 남편을 따라갔다가 조동섬을 만나 교리를 배우고 신앙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유배지에서 남편이 죽자 재령 선산에 남편 유해를 옮긴 뒤 조숙을 찾아와 근처에 살며 교리를 배우고 충실한 조력자가 되었다. 

 

 

권천례의 사촌을 이은 정하상의 재건 운동

 

두 젊은이는 주님께 바치는 사랑과 자기 성화로 얻은 힘을 교회 재건에 쏟았다. 조숙 부부는 서울로 이사 온 뒤 성직자 영입 운동 초기부터 참여했던 것 같다. 그들은 한양 북부 사재감계(현 서울시 종로구 창성동)에 살았는데 사재감은 왕궁에 어류, 고기, 소금, 땔나무 등을 공급하던 관청이었다. 곧 사람의 왕래가 자유로운 곳이었다.

 

한편, 신유박해 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제일 급한 일은 교회 재건과 성직자 영입이었다. 황사영은 박해가 진행되고 있을 때 이미 이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박해 직후 이 일을 이은 사람은 조숙의 종조부인 조동섬과 권천례의 사촌인 권상술(일명 권노방)과 권상립(일명 권기인), 신태보, 이여진 등이었다. 그러므로 조숙 부부도 자연스레 이 일을 도울 수 있었을 것이다.

 

교회 재건자들은 박해가 끝나자 사방으로 다니며 교우들을 격려하고 박해로 생긴 절망 상태를 극복하려 했다. 성직자 영입은 비밀스럽게 진행되어야 하는 일이므로 초기에는 자신들이 모든 일을 감당하려 했으나, 나중에 교우들의 협력을 호소했다. 그들은 1811년에 북경 주교와 교황에게 간곡한 내용의 서한을 써서 북경에 보냈다. 이어 1813년 북경교구에 두 번째 밀사들을 보냈지만, 북경교구의 사정으로 계속 성과가 없었다. 이 당시에 중국을 왕래한 사람은 이여진이었다. 그러나 1814년 권상립이 죽고, 이여진도 은거한 뒤 이를 이어 중국을 왕래한 이는 정하상이다.

 

권천례의 사촌 권상술은 황사영을 숨겨줄 만큼 가까웠으니 황사영의 처조카 정하상에게 일이 연결되는 것은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더욱이 정하상은 무산 유배지까지 조동섬을 찾아가 배웠고 그로부터 큰 뜻을 세웠다. 그리하여 1816년 말에 조선교회는 정하상을 북경 주교에게 밀사로 보냈다. 조숙 부부는 정하상의 중국 파견 뒷바라지를 했다.

 

정하상은 북경에서 돌아오면 조숙의 집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짐을 운반하는 말이 다리를 다쳐 늦어지는 바람에 제날짜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직전 조숙 가족은 포졸들에게 잡혀갔고, 교우들이 성문 밖에서 이 일을 알리려고 정하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 조숙 부부는 1816년 밀사를 끝으로 순교의 길로 가고, 묘한 우연으로 체포를 면한 정하상은 북경 연락을 계속하기 위해 남았다.

 

 

동정의 쌍백합, 순교의 종려 가지

 

1817년 3월 말경 정하상의 귀환을 기다리던 부부는 포졸에 의해 체포되었다. 예비신자가 지니고 있던 조숙의 첨례표가 발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권천례와 고동이도 따라가 함께 옥에 갇혔다. 세 사람은 1819년 8월 10일(음력 6월 20일) 참수형으로 주님께 돌아갔다. 그들은 동정을 지킬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심에 감사했고, 순교의 은총에 불러 주심에 감사했다. 그들은 감옥 생활도 기쁜 기도로 이어갔고, 27개월이 넘는 긴 옥살이와 고문에도 어느 한 사람 누설하지 않았으며, 성직자 영입 운동의 조직을 지켰다. “이처럼 훌륭한 신자들을 배출하고, 이렇게까지 기묘한 일을 행하는 교회를 가진 민족에게 어찌 큰 기대를 걸지 않겠는가?”라고 선교사들은 반문했다.

 

교우들은 한 달이 지나서야 그들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다. 이때 교우들은 권천례의 머리채를 대바구니에 담아 권철신의 처조카 남이관의 집에 두었는데 바구니를 열면 향기가 진동했다고 한다. 그들을 기리는 전승은 계속 이어졌다. 동정 부부는 2014년 8월 16일 시복되었고, 동료 고동이는 현재 ‘하느님의 종’이다.

 

*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 영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 교수이며 대구 문화재 위원과 경북여성개발정책연구원 인사 위원을 맡고 있다. 대구대교구와 수원교구 시복시성위원회 위원이며 안동교회사연구소 객원 연구원이다. 한국가톨릭아카데미 겸임 교수를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9년 12월호,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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