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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과학 시대의 신앙: 수 비교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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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8-17 ㅣ No.379

[과학 시대의 신앙] 수 비교 정의

 

 

1998년 우리나라는 국가 부도의 위기에 처하며 국제 통화 기금에 구제 금융을 요청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외환 위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이 ‘IMF 환란’의 원인이었다.

 

이를 두고 당시 우리나라를 다녀간 한 외국의 경제학자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에는 그에 해당하는 숫자가 하나씩 있다. 달러가 그것이다.” 극단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그에 해당하는 숫자와 달러를 비교하고 따져야 했을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한국에 엄청난 경제 위기를 초래한 것은 사실이다.

 

한편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우리나라에서 엄청난 돈을 거둬들인 미국 하버드대학교의 마이클 샌델 교수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란 책을 펴내 또다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는 이 책에서 지난날에는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교육과 환경, 건강, 정치 등 삶의 모든 영역을 돈으로 사고팔수 있게 된 이 시대에 윤리적 물음을 던진다.

 

 

무엇을 정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은 아주 어릴 때부터 내 것과 남의 것을 본능적으로 비교하곤 한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속담은 이런 인간의 본능적 심리를 잘 보여 준다. 바로 이런 비교 본능으로 말미암아 수를 사용하게 되었고 수를 사용하여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였으며, 시장에서 가격을 흥정하는 등의 경제 행위가 일어나게 되었다.

 

나이와 키, 몸무게, 재산, 친구의 숫자 등 어느 한 개인을 표현할 때에는 여러 숫자를 동원할 수 있다. 이런 숫자들이 그 사람을 이해하거나, 그 사람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지만 샌델이 책에서 한 것처럼 모든 것의 가치를 돈으로 따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을 숫자로 나타내어 비교할 수도 없다.

 

이 숫자들만으로 그 사람을 온전히 나타낼 수 있을까? 극단적으로 그 사람의 가치를 숫자 또는 돈으로 나타낼 수 있을까? 가령 같은 일을 했는데 한 사람은 돈을 많이 받고 다른 사람은 적게 받았다면 정의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있을까? 조금 달리 말해 한 사람은 많이 일했고, 다른 사람은 조금 일했는데, 두 사람 모두 같은 보수를 받았다면 이 또한 정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 샌델은 정의를 이야기하며 이처럼 다양한 상황에서 숫자를 이용하여 비교하였는데, 사실 이것은 마태오 복음의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20,1-16)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포도밭에서 이른 아침부터 온종일 일한 사람이나, 아홉 시부터 일한 사람이나, 정오나 세 시부터 일한 사람이나, 그리고 오후 다섯 시에 나와 겨우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이나 포도밭 주인에게서 모두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래서 일찍 일하러 왔던 사람들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20,12). 그러자 포도밭 주인은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20,13)

 

 

그렇다면 불의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일이 요즘 벌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이런 불의가 어디 있냐며 정의를 세우자고 난리가 날 것이다. 그렇지만 고용인과 피고용인이 계약한 대로 한 것이므로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한 예로 같은 물건을 어떤 사람은 더 싸게 사고, 어떤 사람은 더 비싼 값을 주고 사는 경우가 오늘날에도 있다.

 

그렇다면 이를 막연히 불의라고 할 수 있을까? 예수님의 비유는 가끔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바로 이 이야기가 그렇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불평하던 사람들처럼 예수님께 ‘질문 있습니다!’ 하며 따져 보았을 듯싶다. 다음의 포도밭 주인의 말 가운데 예수님의 가르침이 들어 있을 텐데 여전히 이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시기하는 것이오?”(20,14-15) 이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덧붙이신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20,16).

 

주인은 주인대로의 판단 기준이 있고, 일꾼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판단 기준이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나름대로 재어 보고 그 숫자를 비교하지만, 하느님의 판단은 이와 완전히 다르실 수 있다. 나로서는 그런 상황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고, 다만 포도밭 주인의 결정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

 

 

정의와 불의를 따지려고 하기보다

 

흔히 사람과 관련된 정의를 말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그 둘의 양을 비교해야 하고, 그러기에 앞서 그 양을 측정해서 숫자를 얻어야 한다. 측정하고 숫자를 얻는 것이 과학 기술 분야라면 원리적으로나 객관적으로 서로 다른 두 가지를 비교하는 데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오차가 있더라도 통계적으로 이를 다룰 수 있다. 그렇지만 사람의 일에 관해서는 말처럼 그리 쉽게 다룰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정의에 관한 한 측정하여 숫자를 비교하는 것보다 합의, 또는 약속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 보다.

 

구약과 신약 성경에도 하느님의 약속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구약의 모세 오경 가운데 가장 읽기 지겨운(?) 책이 있다면 ‘민수기’일 것이다. 영어로는 ‘Numbers’라고 하는, 아예 ‘숫자들’이라는 이름의 책인 민수기에는 다양한 율법 규정과 더불어 숫자가 많이 나온다. 민수기 31장에서 전리품을 나누는 장면을 보면, 정의로운 분배를 하고자 675,000이나 337,500과 같은 아주 큰 숫자와 함께 1/50, 1/500 같은 분수까지 나온다.

 

그 당시 사람들은 여기에 나오는 숫자를 엄밀하게 지키려고 애를 많이 썼을 테지만, 나누어 가지고자 하는 이 소 한 마리와 저 소 한 마리, 또 이 양 한 마리와 저 양 한 마리가 어떻게 같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니 결국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의 계약이다. 하느님의 약속은 인간의 부족함을 초월하신다.

 

과학과 기술이 수를 사용하는 정량적인 방법으로 엄청나게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한 대기업은 양보다 질을 내세워 크게 성장하기도 했다. ‘양’만 숫자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질’이라는 것도 사실 매우 정밀한 숫자들의 조정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수의 사용은 이제 과학 기술을 넘어 경제는 물론이고, 정치에까지 널리 침투해 있다. 그렇지만 정당에서 최종 후보자를 정할 때에 여론 조사의 가중치와 투표권의 인정 비율을 어떻게 할 것인지, 또 투표자의 나이를 어떻게 하는 것이 정의로운지를 따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합의와 약속이다.

 

사람의 일은 수를 사용해 더 정확하고 더 효율적인 결과를 추구할 수 있겠지만, 그런 것을 정의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샌델이 말한 것처럼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훨씬 많고, 더욱이 하느님 나라를 숫자로 비교하거나 따질 수는 없다.

 

* 김재완 요한 세례자 – 고등과학원(KIAS) 계산과학부 교수로 양자 컴퓨터, 양자 암호, 양자 텔레포테이션 등을 연구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9년 8월호, 김재완 요한 세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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