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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심리학이 만난 영화: 사진의 심리학, 8월의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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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8-17 ㅣ No.955

[심리학이 만난 영화] 사진의 심리학, 8월의 크리스마스

 

 

“어머니, 사진관에 오셨으니까 독사진 하나 찍으세요.”

 

가족사진을 찍으러 손자와 손녀, 아들, 딸, 며느리, 사위와 함께 사진관에 온 할머니. 사진을 다 찍고 일어서려는데, 아들이 이야기를 꺼냈다. 할머니는 마뜩잖다. 자신의 영정 사진을 준비하려고 하는 게 뻔해 보인다. 아들이 찍자고 하니 마지못해 찍기는 하는데, 할머니의 표정이 밝지는 않다.

 

 

조금 더 예쁜 사진이 필요한 이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 사진관 문을 열고 들어온 할머니는 사진사에게 수줍게 묻는다. 낮에 찍은 사진 다시 찍을 수 있냐고. 할머니는 연분홍색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오셨다. 낮에 입었던 한복보다 화사하다.

 

“예쁘게 잘 찍어 줘. 이거 제사상에 놓을 사진이야.” 연분홍 한복 덕분인지, 안경을 벗으니 더 고운 얼굴이 드러난다. 이제야 할머니는 환히 미소 지으며 사진을 찍는다. 낮에 사진을 찍을 때 표정이 밝지 못했던 이유는 아들이 아직도 살날이 많이 남은 자신에게 영정 사진을 찍자고 해서가 아니었다. 영정 사진을 찍을 줄 알았다면, 더 곱고 화사한 모습으로 준비하고 왔을 텐데, 준비도 안 된 자신에게 갑자기 영정 사진을 찍으라고 하니 속이 상했던 것이다.

 

할머니에게는 낮에 찍었던 것보다는 더 예쁜 사진이 필요했다. 지금 찍는 사진이 가족들에게 자신을 기억하게 할 마지막 모습이기 때문이다. 자손들은 제사를 지내며 한 번씩 오늘의 할머니를 만나게 될 것이다. 가족은 자신을 기억해 줄 사람들이다. 그들이 할머니의 모습을 기억하는 한, 세상을 떠나도 할머니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만은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할머니에게 더 예쁜 사진이 필요했던 이유다. 자신을 기억해 줄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고운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었던 것이다.

 

 

인생의 8월에 준비하는 죽음

 

허진호 감독의 1998년작 ‘8월의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인 사진사 정원(한석규)은 30대 초반의 나이에 죽음을 준비한다. 인생의 8월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 사진사. 인생의 12월은 그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는 찍는다, 초원 사진관에 찾아온 손님들의 사진을. 증명사진, 가족사진을, 그리고 할머니의 영정 사진. 그는 자신의 8월에 찾아온 크리스마스 같은 존재인 다림(심은하)의 환한 얼굴도 사진에 담아 둔다. 정원은 자신의 사진도 남긴다. 가족과의 사진, 죽마고우들과의 단체 사진,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영정 사진을 남긴다.

 

 

영원히 살 수 없지만 기억될 수는 있다

 

우리의 삶은 영원하지 않다. 우리의 인생은 시간과 함께 소멸해 간다. 우리 모두의 삶에는 끝이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불멸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세상을 떠나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세상에 계속 머물고 싶은 것이다.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움베르토 에코는 사람들이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고자 다른 사람의 기억 속에 살아남는 방법을 선택했다고 주장한다. 물리적으로는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살아남아서 이 세상에 계속해서 존재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기억해 줄 자식에게 평생을 바치고,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남기고자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없지만 영원히 기억될 수는 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누군가가 할머니를 추억한다면, 그의 마음속에 할머니는 살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특별한 몇몇의 사람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방식으로 수많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가족을 포함해 자신을 기억해 주는 몇몇 사람의 마음속에 살아남는다. 그렇지만 사람의 기억은 영원하지 않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그에 대한 기억은 시간과 함께 스러져 간다. 이때 사람들의 기억을 붙잡아주는 것이 사진이다.

 

사진은 기억이다. 사진은 현재의 순간을 붙잡아 주고, 그래서 사진 속 인물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살아갈 수 있게 돕는다.

 

 

사진보다 사랑이 먼저다

 

정원도 사진을 찍고 다림도 사진을 찍는다. 둘의 사진은 기억을 위한 것이다. 그렇지만 정원의 사진과 다림의 사진은 용도가 다르다. 정원은 사진사고 다림은 불법 주차 단속반원이다. 정원의 사진기 앞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환히 미소 짓는다. 그들은 기억을 붙잡아 두려고 사진관을 찾았다. 이 사진을 통해 누군가에게 자신이 기억되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다림의 사진을 통해 자신들이 기억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다림이 불법 주차된 차량의 사진을 찍을 때마다 사람들이 거칠게 항의하고 화를 내는 이유다.

 

우리는 누군가의 마음속에 좋은 모습으로 남아 있기를 원한다.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나쁜 모습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미움과 증오로 기억된 채 누군가의 마음에 영원히 살아남는다면, 불멸은 가장 큰 처벌이 될지도 모른다.

 

사진은 사랑이 아니다. 사진은 기억일 뿐이다. 사진은 사랑을 기억하게 할 수도 있지만, 미움을 기억하게 할 수도 있다. 사진이 무엇을 기억하게 할지는 사진 속의 인물과 그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의 추억이 결정한다. 사랑의 추억은 그 사진을 통해 더 선명하게 사랑을 기억하게 하고, 미워했던 기억은 그 사진 때문에 더 선명하게 그 지난날을 떠올리게 만든다.

 

다림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카메라가 볼품없어서 사람들이 자기한테 쉽게 화를 낸다고 투덜댄다. 그렇지만 더 좋은 카메라로 더 선명하게 사진을 찍는다면,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더 선명하게 남기려는 다림에게 더 크게 화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좋은 기억이 되려면 선명한 사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의 좋은 추억이 필요한 것이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살아남길 바란다면, 그와 좋은 추억을 먼저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 사진보다는 사랑이 먼저다.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눈 내린 크리스마스. 정말 오랜만에 초원 사진관 앞에 온 다림. 사진관의 쇼윈도에는 지난 8월에 정원이 찍었던 다림의 증명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다림. 그 사진을 보는 다림도 환해진다.

 

사진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도 한다. 내가 지닌 사진은 내가 그 사진 속 인물을 기억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쇼윈도의 사진이 그렇게 말한다. 정원을 보지 못했어도 다림은 행복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기억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전우영 - 충남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무료 온라인 공개 강좌 서비스인 케이무크(K-MOOC)에서 일반인들을 위해 쉽게 디자인한 ‘심리학 START’를 강의하고 있다. 「나를 움직이는 무의식 프라이밍」, 「내 마음도 몰라주는 당신, 이유는 내 행동에 있다」 등을 펴냈다.

 

[경향잡지, 2019년 8월호, 전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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