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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행복을 찾아서: 근면 - 추락하는 근면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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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8-17 ㅣ No.949

[행복을 찾아서 – 근면] 추락하는 근면의 가치

 

 

“자기의 노고로 먹고 마시며 스스로 행복을 느끼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좋은 것은 없다”(코헬 2,24).

 

성실과 근면은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가치이자 동시에 현실적으로 유리한 행동 전략이다. 부지런히 일하고 노력하는 사람이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얻고 누리게 된다. 당연한 일이다.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워라밸’(일과 개인의 삶 사이의 균형 - 편집자 주)을 따지고 ‘저녁 있는 삶’을 부르짖는 세태가 한심스럽다.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였던 때가 불과 수십 년 전인데 말이다.

 

현자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너 게으름뱅이야, 언제까지 누워만 있으려느냐? 언제나 잠에서 깨어나려느냐? ‘조금만 더 자자. 조금만 더 눈을 붙이자. 손을 놓고 조금만 더 누워 있자!’ 하면 가난이 부랑자처럼, 빈곤이 무장한 군사처럼 너에게 들이닥친다”(잠언 6,9-11).

 

부디 다시 심기일전하여 부국강병을 위해 근면하게 노력해야 할 것이다. 언제나 남 탓만 하고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젊은 세대를 보면 걱정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그러면 왜 현자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고 말하는 것일까?

 

 

나태의 역설

 

나태는 칠죄종의 하나다. 그 자체가 누구에게 해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영혼을 갉아먹는 정신의 죄악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근로 시간으로 전 세계 1, 2위를 다투는 한국인이야말로 나태의 죄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빨리빨리’에서 우리 민족을 당해 낼 민족은 없다. 자타가 공인하는 부지런한 국민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자. 삶을 분주함으로 가득 채우는 것만이 근면일까? 잠시도 주변을 돌아볼 시간 없이 다음 갈 곳으로 바삐 움직이는 것만이 건강한 성실함일까? 나태란 단지 부지런함의 반대말이 아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나태가 우울을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보았다. 아예 나태 대신 우울을 칠죄종에 올리기도 했다. 정신의학적인 면에서 나태는 단지 느릿느릿한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적 무기력에 더 가까운 용어다.

 

 

당신의 시간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가?

 

현대인의 시간은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 여러 일을 동시에 해내야 한다. 한 회사의 과장이자 한 집안의 아버지이고, 봉사 단체의 총무이면서 동호회의 회장이고 동창회의 임원이다. 겸업도 하고 세 겹벌이도 한다. 다이어리는 여러 일정이 들어서다 못해 여러 개의 일정이 포개지기도 한다. 도대체 누가 현대인을 게으르다고 비난할 것인가?

 

하지만 현대인은 ‘지금 여기’에 집중하지 못한다. 자녀의 학예회에서 업무에 관련된 카카오톡을 쉬지 않고 날리고, 회의에 참석해서도 다른 업무를 고민한다. 정작 사무실에서는 집안일을 걱정한다. 모처럼 친구와 등산을 하면서는 온통 사업 이야기뿐이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순간조차 비워 두지 못한다. 눈과 귀는 스마트폰에 완전히 점령당했다.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마찬가지다. 배변하는 순간마저도 온전히 그 ‘일’에 집중하지 못한다.

 

우울과 나태의 주된 증상은 바로 무의욕증과 무쾌감증이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어떤 것도 즐겁지 않다. 그러니 자신이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하고, 그 시간을 온전히 즐기지 못한다. 무엇이라도 가져와서 한 번뿐인 ‘순간’에 욱여넣는다. ‘쓰레기’ 같은 정보로 시간과 정신을 가득 채운다.

 

헐레벌떡 자녀의 학예회에 오면 무슨 소용인가? 연신 회사 일로 카카오톡을 주고받는데 말이다. 차라리 그냥 회사에 있는 것만 못하다. 솔직히 말하면 자녀의 학예회에 별 관심이 없다. 등산도 마찬가지다. 산이 좋아 산에 오른 것도 아니다. 업무에 대한 열정으로 야근을 자청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에도 진정한 관심이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허전함을 채워 줄 무엇인가로 시간을 채워 넣는 것이다.

 

 

분주한 게으름

 

“수고한 보람으로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만큼 사람에게 좋은 일은 없다.” 「공동 번역 성서」 코헬렛 2장 24절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고’가 아니라 그러한 보람으로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이다. ‘수고한 보람으로 더 수고하고 더 수고해서 끊임없이 세계 1위가 될 때까지 계속 수고해라.’라고 하지 않았다. 수고한 삶이 정작 본인을 위한 시간을, 사랑하는 연인이나 가족과 보낼 시간을 빼앗는다면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분주한 게으름이다.

 

어느 날 가족 모임이 귀찮아서 야근을 자청했다. 하지만 사실은 긴 저녁을 먹고 ‘인터넷 서핑’을 하느라 야근 시간을 허비했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비싼 택시비를 내고 퇴근했다. 가족 모임에 가지 못한 죄책감이 들어 공연히 인상을 북북 쓰면서 귀가했다. 술을 마시고 잠을 청했다. 아침에는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출근을 했다. 어제 야근을 했으니 쉬어야 한다면서, 연신 탕비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노닥거렸다.

 

도대체 뭐가 근면한가? 아무것도 제대로 한 것이 없다. 자신이 해야 할 일에서 끊임없이 도망치기만 했을 뿐이다. 가족 모임도 가지 못한 채 야근도 했고 머리 감을 시간도 없었으니 남들에게는 부지런해 보일 것이다. 그렇게 도시의 빌딩을 가득 채운 현대인은 모두 “나는 바쁘다. 나는 성실하다.”를 외치면서 정작 해야 할 일에서 도망치고 있다.

 

그러면서 이유 없는 억울함으로 가득하다.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보상이 보잘것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솔직해지자. 근면한 것이 아니라 근면한 척하고 살았을 뿐이다. 도망치기만 했는데 무슨 보상이 있을까.

 

 

게으른 성실

 

우리는 종종 상상한다. 만일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일단 형편없는 직장에 사표를 날릴 것이다. 지루한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심으로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가족들과 한 번뿐인 삶을 즐길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상하다. 사실 우리 조상의 삶을 기준으로 보면 우리는 모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것 아닌가?

 

행복한 삶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그리 대단치 않다. 삶의 기본 조건이 충족되었다면 이제 ‘게으른 성실’의 삶을 누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풍족한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가장 귀한 자원은 바로 ‘시간’이다. 필요 이상의 근면한 삶은 가장 귀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부와 권력을 다 얻었지만 결국 헛되고 헛되다는 이야기는, 아마 굶주리고 헐벗은 동시대인에게는 그다지 크게 공감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게으른 분주함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정말 유익한 이야기다. 자신의 시간을 팔아 물질을 얻는 것이 지난날의 근면이었다면, 이제 소중한 시간을 얻는 것이 새로운 근면의 기준이다. 현대인보다 풍족한 삶을 훨씬 일찍 맛본 코헬렛의 현자가 말하듯이 말이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코헬 1,2).

 

* 박한선 - 정신과 전문의. 신경 인류학자.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강사로 지내며, 서울대학교 비교무화연구소에서 인간의 정신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이화여자대학교 목동병원, 서울대학교 병원, 성안드레아병원에서 일했다. 「마음으로부터 일곱 발자국」, 「토닥토닥 정신과 사용설명서」, 「내가 우울한 건 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때문이야」를 펴냈다.

 

[경향잡지, 2019년 4월호, 글 박한선 · 그림 이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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