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 교회사 속 여성 - 신유박해(순조 시기): 궁녀 복자 강경복과 문영인의 소명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7-29 ㅣ No.1047

[한국 교회사 속 여성 – 신유박해(순조 시기)] 궁녀 복자 강경복과 문영인의 소명

 

 

주님께서 사람을 부르신 이유는 각자마다 다르다. 조선 시대 철벽같은 조직 속에 있던 궁녀를 부르신 이유 또한 오묘했다. 양제궁의 궁녀 강경복은 심문 과정에서 당대 사람들이 왜 주님을 믿는지 설명했다. 그는 심문도 없이 죽은 왕족 부인들의 신실한 신앙생활도 증언했다. 

 

한편 어려서부터 궁에서 다양한 교육을 받은 문영인은 여성 공동체에서 사목하던 주문모 신부를 도왔다. 강완숙의 집은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적합했는데, 문영인은 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여성이 제대로 배우지 못하던 시절, ‘궁중의 철저한 훈련’이 교회를 위해 쓰였다.

 

강경복 수산나.

 

 

주문모 신부의 피신을 도운 강경복

 

양제궁 부인들이 순교할 때 여러 명의 나인이 함께 죽임을 당했지만, 사료에 나타난 이는 강경복과 서경의다. 강경복은 강완숙과 비슷한 나이였다. 1798년 무렵, 교인이 된 송 마리아는 궁녀 강경복에게 천주교를 권했다. 이때부터 강경복은 다른 궁녀들과 함께 열심히 믿는 신자가 되었다. 그녀는 서경의와 함께 강완숙의 집에 오가며 교리를 배웠고, 미사에 참석했다. 왕족 부인을 모시고 가기도 했다. 강완숙도 왕족 부인이 두 번 집에 왔었다고 실토했다.

 

1801년 2월, 강경복은 양제궁으로 피신해 있던 신부를 체포망에서 빠져나가게 도왔다.

 

당시 강경복의 어머니는 충훈부 근처, 강완숙 집 가까이에 있는 홍씨 집에 세를 들어 살고 있었다. 홍 씨는 강완숙의 집에 불이 났을 때, 자신의 아들 강득녕이 그 불을 꺼주면서 강완숙과 인연을 맺었고, 신자가 되었다. 강경복은 때마침 아버지 제사를 기회로 집에 들러 며칠 묵었다. 그때 포교인 강득녕이 어머니 홍 씨에게 포교들이 신자들을 체포하러 간다고 알려 주었다.

 

강경복은 급히 양제궁으로 가서, 이미 궁 앞에 도착한 탐정 수사를 맡은 기찰포교를 피해 이 소식을 전했다. 그녀는 곧 뒷문으로 빠져나왔으나 창의문 근처에서 체포되었다. 대신 주문모 신부는 서소문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살아서 근심을 풀고 죽어서 복당에 가다

 

조정에서는 백성이 천주교를 믿는 이유가 궁금했다. 강경복은 병이 낫는다고 해서 천주교를 믿었다고 했다. 또한 그녀는 왕족 부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추궁당했는데 “양반이 슬픔과 근심을 풀기 위해 이것을 배우면 복당(福堂)에 들어간다.”고 했다. 곧, 강경복은 왕족 부인들이 내세를 위주로 살았으며, 주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하시리라 믿었음을 전했다.

 

한편, 왕족 부인들이 천주교를 신부에게서 배웠느냐는 닦달에 그녀는, “신부가 가르치는 것은 보지 못했지만, 양반이 책으로 늘 배우는 것은 보았다.”고 답했다. 그녀가 이렇게 대답한 것은 왕족 부인들을 보호하려는 마음이었다. 그녀는 왕족 부인들이 처형된 뒤 2개월가량 더 감옥에서 살았다.

 

문영인 비비안나.

 

 

오묘한 부르심으로 순교한 문영인

 

주님께서 문영인을 부르시는 방법은 독특했다. 온갖 핑계를 댄 모세나 요나의 경우처럼 걸림돌을 치우면서 그녀를 세우셨다.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와 총명한 지혜로 무장된 본궁의 궁녀였다.

 

문영인은 중인 신분의 양가에서 태어났다. 부친과 숙부는 작은 벼슬을 하고 있었다. 하루는 그녀의 집에 궁녀를 뽑는 관리들이 찾아왔다. 그의 아버지는 두 언니는 숨겨 두고, 일곱 살짜리 문영인은 나이가 어려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궁

에서 나온 관리들은 이 똑똑하고 귀여운 아이를 보고 감탄하며 그녀를 궁으로 데려갔다. 그녀는 아기 나인으로 궁궐 예절을 배웠고, 열다섯 살 때 관례(성인식)를 치른 뒤 정식 궁녀가 되었다. 그녀는 글을 잘 써서 문서 작성을 담당했다.

 

문영인의 어머니는 독실한 신자였다. 어머니는 딸이 궁에 있어 신앙생활을 할 수 없음을 슬퍼했다. 어머니와 언니들은 그녀가 집에 오면 붙들고 신앙을 권했는데, 그때마다 그녀는 궁에서는 어렵다며 늙어서 나오게 되면 그때 보자고 했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기도가 뒷받침되었는지 문영인은 어느 날 저녁 궁녀들과 모였다가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온갖 치료에도 병은 점점 심해졌다. 결국 궁에서는 다시 치료하고 들어오라며 그녀를 내보냈다. 1797년 무렵이었다.

 

그녀가 집에 돌아오자, 어머니는 딸의 위험한 상태를 보고, 입교를 강권했다. 그녀는 드디어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세례받은 다음 날 그녀의 병이 깨끗이 사라졌다. 이런 은혜에 이어 심상치 않은 기적이 보태졌다. 궁에서는 문영인을 치료하고자 주기적으로 의사를 보냈고, 궁녀들이 남아서 간호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녀는 멀쩡하다가도 궁에서 사람이 나오면 병이 심해져 다시 몸이 마비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돌아가면 아무 고통 없이 일어났다.

 

그 뒤 문영인은 잠시나마 궁으로 돌아갔던 것 같다. 그러나 궁궐 사람들이 그녀가 사학을 한다고 지목하여 1798년 그녀는 궁녀에서 제명되었다. 그녀는 자유의 몸이 되자 신자의 본분을 지키는 데만 집중했다. 그리고 김승정 회장의 어머니인 김섬아와 함께 신부를 곁에서 돕게 되었다.

 

문영인은 주문모 신부가 양제궁으로 피신하자 집으로 돌아가 있었다. 하루는 김섬아가 그를 보러 와서 기도문을 적은 종이를 방의 자리 밑에 두었다가 잊고 돌아갔다. 얼마 뒤 포졸들이 들이닥쳤고, 종이가 발각되었다.

 

관리들은 젊은 옛 궁녀를 배교시키고자 여러 방법을 동원했으나 소용없었다. 포졸이 고문을 하면서 그녀의 다리를 칠 때 피가 솟구쳤는데, 그 피가 꽃이 되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놀란 관리는 이를 발설하는 사람은 엄벌에 처한다며 단속했다.

 

 

제 몫을 해 낸 ‘장래의 복자’들

 

서경의는 배교하고 유배를 갔다. 강경복과 문영인도 한때 신앙의 의지가 약해졌으나 이겨 내고, 강완숙 등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어떤 교우의 아버지는 형리들이 문영인의 목을 쳤을 때 그 상처에서 흰 피가 흐르는 것을 목격했다. 주님께서는 동정 순교자 마르타에게 베푸신 기적을 조선 땅에 다시 내려, 30년 넘게 신부도 없이 신앙생활을 하게 될 조선 사람들을 위로하셨나 보다. 당시 강경복은 39세, 문영인은 25세였다.

 

순교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맡기신 몫을 해 내었다. 동시에 이들 생애는 어떤 경험도 버릴 것이 없음을 보여준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하고 있는 일도 주님 그림의 한 획이 되리라. 그 소명을 우리가 죽은 뒤 역사가가 진단하기보다 자신이 살아서 깨닫는다면 더욱 즐겁게 주님의 뜻에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순교자들의 삶을 엿본다.

 

*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 영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이며 대구 문화재 위원과 경북여성개발정책연구원 인사위원을 맡고 있다. 대구대교구와 수원교구 시복시성위원회 위원이며 안동교회사연구소 객임 연구원이다. 한국가톨릭아카데미 겸임 교수를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9년 7월호,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988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