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20일 (금)
(녹)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예수님과 함께 있던 여자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종교철학ㅣ사상

시 읽어주는 신부: 이, 대책 없는 멜랑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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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6-12 ㅣ No.373

[시(詩) 읽어주는 신부] 이, 대책 없는 멜랑콜리!

 

 

일본 교토를 며칠 다녀왔습니다. 낯선 풍경과 사람들의 일상을 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줄을 서서 수속을 밟고 긴 비행시간을 견뎌야 하는 과정의 불편함과 귀찮음 때문에 해외여행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교토 여행은 한국의 어느 다른 지역을 여행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짧은 비행시간, 불편하지 않은 음식들,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길과 골목들, 저에게 최적화된 여행지 같았습니다.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낯선 동네를 산책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소설가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문학동네, 2019)라는 책이 요즘 화제입니다. 여행기라기보다는 여행이라는 행위에 대한 인문적 성찰의 책입니다. 볼거리와 음식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숱한 여행 서적들이 있지만 여행을 통해 사람과 삶에 대한 사유를 담고 있는 것들에 저는 눈길이 갑니다. 어디 어디를 가보았다는 일종의 정복주의적 과시와 많은 사람이 누리는 관광이라는 물질적 호사와 풍요를 나도 소비했다는 무의식적 안도감으로 가득한 자본주의적 여행의 방식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낯선 곳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타자의 삶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갖게 하고, 인간 존재와 삶의 지구적(역사적 또는 우주적) 위치를 가끔 느끼게 해주는 그런 여행을 좋아합니다. 물론 제 게으름 탓에 스스로 그런 여행을 실행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것을 감행하고 거기에서 오는 느낌과 성찰을 이야기해주는 사람들의 여행기에는 꽤 호의적입니다. 여행은 다른 사람들, 숱한 사람들 속에 있는 나를 발견하게 합니다. 김영하의 표현에 의하면, 여행은 내가 특별한 존재(somebody)가 아니라 그저 나 역시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존재(nobody)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여행은 분명 시간과 공간에 대한 확장된 의식을 갖게 해줍니다. 여행은 또한 사람과 삶에 인문적 성찰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정서적 깨달음을 주기도 합니다. 떠남과 머묾, 만남과 헤어짐, 스침과 부딪침 등 생의 우연성과 엇갈림이 빚어내는 숱한 감정들에 대한 깊은 체험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여행의 정서는 그 본성상 멜랑콜리(melancholy)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병률 시인(1967년생)은 시인이며 동시에 여행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여행 산문집들은 그의 시집들보다 더 많이 팔렸습니다. 아마도 한국 문학계에서 김영하가 소설가 여행자를 대표한다면 이병률은 시인 여행자를 대표하는지도 모릅니다. 김영하의 여행 산문이 사색과 성찰을 특징으로 한다면 이병률의 여행 산문은 정서적 ‘끌림’과 공감의 양상을 더 많이 드러내 보입니다. 상투적 구분이지만 소설가의 여행 감성과 시인의 여행 감성은 확실히 다른 것 같습니다. 이병률 시인은 젊은 날에 라디오 방송작가라는 경력이 있어서 조금 더 감성적이고 감상적인 것 같습니다. 정서적 감정에 호소하는 라디오 멘트에 길들여진 탓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추측을 해봅니다. “길은 막히고/ 당신을 사랑한 지 이틀째입니다.”(「북강변」) “어쩌면 이토록 한 사람 생각으로/ 이 밤이 이다지 팽팽할 수 있느냐.”(「몸살」) “사무치는 것은 봄으로 온다/ 너는 그렇게만 알아라.”(「음력 삼월의 눈」) “사랑은 산책하듯 스미는 자,/ 산책으로 젖는 자.”(「사랑은 산책자」) 시집을 펼치면 도처에 연애편지에 인용할 수 있는 구절들 천지입니다. 이병률 시인의 시에 자주 표현되는 짧은 잠언 투의 서술들은 대중적 공감과 환호를 낳았습니다. 이런 대중적 정서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병률 시인은 문학 평론가들의 주목을 덜 받았고 문학적으로 낮게 평가된 시인입니다. 통상적으로 시집 뒤편에는 문학 비평가의 해설이 실려있습니다. 하지만 이병률 시인의 경우에는 두 번째 시집 『바람의 사생활』(창비, 2006)을 제외하고, 다른 네 권의 시집에 평론가의 해설이 실려있지 않고 동료 시인들의 해설과 발문이 실려있습니다. 문학 비평가와 문단의 현상에 대한 이병률 시인의 반감이 작동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병률 시인에게 생은 열차를 타고 긴 시간의 여정을 가는 여행입니다. 시인의 첫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문학동네, 2003)에 실린, 시인의 초기 대표시의 하나로 꼽히는 「장도열차」는 우리의 생이 짧은 만남과 긴 헤어짐의 슬픈 여정이라는 것을 아름답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의 시집인 『바다는 잘 있습니다』(문학과지성사, 2017)에서도 이것을 다시 진술하고 있습니다. “삶도 대륙을 횡단하는 긴 열차일 거라고 마음을 정하는 동안/ 밤 사이 마을을 여럿 지났다.”(「횡단열차의 저편」) 이처럼 우리의 생 자체가 여행이지만 그 긴 여정에서 사라짐의 탈출과 일탈의 시도 역시 또 하나의 다른 여행입니다. 그 사라짐은 “세상 모든 운행하는 것들에 대한 권태 때문이라”(「횡단열차의 저편」)고 시인은 말합니다. 시인에게 그 일탈(여행)은 자주 충동적입니다. “새벽이 되어 지도를 들추다가/ 울진이라는 지명에 울컥하여 차를 몬다”(「스미다」)고, “자주 지도를 들여다본다/ 모든 추억하는 길이 캄캄하고 묵직하다”(「내 마음의 지도」)고, “자꾸 먼 데를 보는 습관이 낸 길 위로 사무치게 사무치게 저녁은”(「저녁 풍경 너머 풍경」) 온다고 시인은 고백합니다. 시인에게 여행은 “끌림”과 “당김”에 순응하는 일입니다.(시인의 첫 여행 산문집 제목이 “끌림”입니다) “한밤에 그 말을 들으며 몸을 세우고 마는 당신 혹은 나/ 늦은 시간 묵묵히 그곳을 향하여 패를 던지자는 것이다// 당김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절벽 갈래 바다 갈래」) 시인에게 여행은 일상의 궤적에서 사라지는 일입니다. 여행은 “가끔 당신으로부터 사라지는 상상을 하는,” “가끔 당신으로부터 사라지는 수작을 부리는” 일입니다.(「진동하는 사람」) 시인은 “가끔 내가 사라지는 것은/ 차갑게 없어지기 위해서”(「이구아수 폭포 가는 방법」)라고 변명하면서도 “당신은 사라지지 말아라”(「당신은 사라지지 말아라」)는 이기적인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병률 시인에게 여행은 사람이 혼자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일이며, 그 혼자에게 숙명적으로 부과되는 외로움을 견디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인간 존재는 “오래 혼자일 것이므로/ 비로소 영원히 스며드는 하나”(「혼자」)입니다. 여행 역시 “나는 한사코 나만 생각하는 것이고/ 아무것도 정하지 않은 채/ 나에게로만 가까워지려는”(「나는 나만을 생각하고」) 일입니다. 그래서 “혼자인 것에 기대어 가는”(「동유럽 종단열차」) 여행은 결국 자기에로의 여행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끄는 것은 자신이다. 자신과 비슷한 것, 그의 영혼이 해독해낼 수 있는 세계 앞에서만 그는 사진을 찍고 오래 머금었던 말을 침통하게 적어 내려간다. 그렇게 멀리 떠나와서도 자신이 해독할 수 있는 풍경에만 눈이 가는 것, 그것은 햄스터의 여행을 완벽하게 실현하는 것이다.”(이병률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찬란』에 실린 허수경 시인의 해설) 시인에게 여행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며, 외로움은 죽음이라는 인간의 운명에서 기인됩니다. “모든 죽음은 이 생의 외로움과 결부되어 있고/ 그 죽음의 사실조차도 외로움이 지키는 것”(「세상의 나머지」)입니다. 사람에게 운명적으로 부여된 죽음과 외로움을 시인은 사막에 있는 선인장의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사람은 태어나 선인장으로 살지요/ 실패하지 않으려 가시가 되지요// 사람은 태어나 선인장으로 죽지요/ 그리하여 사막은 자꾸 넓어지지요.”(「사람」) 사람의 사랑마저도 이 죽음과 외로운 운명 속에서 허망한 일이 되고 만다고 시인은 탄식합니다. “사랑하였다/ 무의미였다.”(「고양이 감정의 쓸모」) “내 당신이 그런 것처럼/ 모든 세상의 애인은 눈사람.”(「눈사람 여관」)

 

시인에게 죽음은 사라짐을 당하는 일이지만 여행은 사라짐을 먼저 행하는 일입니다. 신형철의 해설에 기대어 설명하면 죽음은 이별(離別)의 형식이지만 여행은 작별(作別)의 형식입니다. 여행은 헤어짐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헤어짐을 짓는 것입니다.(『바람의 사생활』에 실린 신형철의 해설) 이병률 시인에게 여행은 죽음을 미리 연습하는 한 사내의 적극적인 행위인 것 같습니다. “사내라는 말은 서럽고도 차가워/ 도망가려 버둥거리는 정처를 붙드는 순간/ 내 손에 뜨거운 피가 밸 것 같다.”(「바람의 사생활」) 시인에게 여행은 부여된 운명에 저항하는 작은 행위이기도 합니다. “옮겨놓은 것으로부터/ 이토록 나를 옮겨놓을 수 있다니/ 사는 것은 얼마나 남는 장사인가.”(「여행」)

 

혼자인 사내, 이 대책 없이 멜랑콜리한 사내는 생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지. 이 지독하게 허무한 사내는 세상과 타자의 문제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입니다. 얼핏 보면, 그저 자기감정에 겨워 무책임하게 살아가는 이기적인 사내의 모습입니다. 이병률 시인은 자주 사람 관계의 허망함과 인간의 근원적 이기성을 노래합니다. “만나도 모르는 사람들/ 몰라도 만나는 사람들// 만나더라도 만나지 않은 것이다/ 이제 이 좁디좁은 우주에서 우리는 그리 되었다.”(「사람의 재료」) “스친 것으로 무슨 인연을 말할 수 있을 것이며/ 날아오른다고 하여/ 이 과도한 행을 벗어나거나 피할 수 있을 것인지.”(「왼쪽으로 가면 화평합니다」) “우리가 마주 잡았던 손도 결국은 내가 내 손을 잡은 것입니다.”(「이별의 원심력」) 그의 시적 스승인 최하림 시인 역시 “이병률의 시에서 타자는 도드라진 의미를 갖지 못하고 그림자로 사는” 것 같다고 토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록 시인의 시적 태도가 세상과 타자와 작별하는 삶을 살아가는 듯한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생의 쓸쓸함 속에서 ‘사소한 아름다움(찬란)’으로 자기의 삶을 견뎌내는 정직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계와 다를 테니

그때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 만나자

 

무심함을

단순함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만나자

 

저녁빛이 마음의 내벽

사방에 펼쳐지는 사이

가득 도착할 것을 기다리자

 

과연 우리는 점 하나로 온 것이 맞는지

그러면 산 것인지 버틴 것인지

그 의문마저 쓸쓸해 문득 멈추는 일이 많았으니

서로를 부둥켜안고 지내지 않으면 안 되게 살자

 

닳고 해져서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발이 발을 뒤틀어버리는 순간까지

우리는 그것으로 살자

 

밤새도록 몸에서 운이 다 빠져나가도록

자는 일에 육체를 잠시 맡겨두더라도

우리 매일 꽃이 필 때처럼 호된 아침을 맞자

 

『바다는 잘 있습니다』에 실린 「이 넉넉한 쓸쓸함」이라는 시의 전문입니다. 이병률 시인의 전반적 시적 분위기와는 정반대의 시입니다. 이병률 시인의 숱한 시가 보여주는 대책 없이 정직한 허무함 속에서, 이 단순한 다짐의 시가 오히려 더 역설적인 진실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본성상 혼자이기에, 시간의 여정 속의 생은 허망하기에 오히려 사소한 것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고 사람(타자)의 역설적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 지금껏으로도 많이 살았다 싶은 것은 찬란을 배웠기 때문/ 그러고도 겨우 일 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다 찬란이다.”(「찬란」) “우리는 저마다/ 자기 힘으로는 닫지 못하는 문이 하나씩 있는데/ 마침내 그 문을 닫아줄 사람이 오고 있는 것이다.”(「사람이 온다」)

 

시 읽기의 글을 쓰기 위해 시인을 선택하는 일은 즐거우면서도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사실 이번에는 문태준 시인에 대해 쓰려고 마음을 먹었다가 변덕을 부려 이병률 시인을 선택했습니다. 대중친화적인 시인에 대해 한 번 이야기해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장도열차」나 「당신의 제국」이라는 시를 좋아했고 이병률 시인의 시집은 출간되는 대로 늘 사서 읽었습니다. 언젠가 한 번 다루어야겠다는 생각은 했었습니다. 다만 이렇게 빨리(?) 언급할 줄은 몰랐습니다. 더 정직하게 고백하면 지금까지의 시 읽기의 순서는 시인에 대한 제 선호도가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 읽기는 창조적 오독(誤讀)이라는 것을 거듭 실감합니다. 아니 세상의 모든 읽기는 그 자체가 오독일 것입니다. 자기의 방식으로 읽는 것입니다. 저의 ‘시 읽기’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시선과 방식으로 시를 읽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바람의 사생활』 시집 해설을 쓴 평론가 신형철과 뒤표지의 추천사를 쓴 소설가 김훈의 시선은 달랐습니다. 신형철이 언어를 매개로 상상력과 인식의 깊이를 보여주는 시를 선호한다면, 김훈은 시의 내용이 담고 있는 이야기의 서술성과 담백함을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저의 시 읽기 역시 저의 편견과 제 개인적 시선이 담겨있으니, 여러분은 여러분의 방식으로 시 읽기를 하시라는 부탁입니다.

 

이병률 시인의 시를 다시 읽으면서 묘한 느낌이 교차했습니다. 신학교 선생 시절 “타인의 문제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교 신앙인이 아니다.”라고 자주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타자로 계시며 내 안에서도 타자로 계신다고 말입니다. 따라서 타자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께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신앙은 이기성이 아니라 이타성을 향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병률 시인이 노래하는 인간의 이기성(혼자임, 외로움)과 삶의 멜랑콜리를 신학적 시선에서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고민은 모든 것을 신앙 윤리적 시선으로 판단하고 규정하려는 못된(?) 습성 탓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생은 때때로 쓸모없음의 쓸모를 용인할 때 더 풍요롭고 창조적이라는 것을 놓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과 삶은 다양하고, 하나의 시선으로 묶어둘 수는 없습니다. 전업적 종교인으로 살다 보니 열림과 다양성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좁아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들, 즉 창조된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과 이해가 부족했음을 느낍니다. 이병률 시인의 시를 읽으며, 엉뚱하게도 교회와 신앙 안에서의 열린 태도와 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 역시 인생이라는 여정의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이병률의 시를 읽으며 깨닫습니다.

 

[월간빛, 2019년 6월호, 정희완 요한 신부(안동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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