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6일 (화)
(백) 부활 제3주간 화요일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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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해박해 180주년: 복되어라,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은 사람들 - 세 안드레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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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6-12 ㅣ No.1038

[특별기고 - 기해박해 180주년] 복되어라,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은 사람들 - 세 안드레아 이야기

 

 

180년 전 기해박해 때 복음 때문에 대구에서 치명한 세 명의 순교자가 있다. 복자 이재행(안드레아, 64세), 복자 박사의(안드레아, 48세), 복자 김사건(안드레아, 46세)으로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참수 치명했다.(아래부터 복자 호칭은 생략한다.) 그들은 1827년 체포되어 12년 간 대구 옥에 갇혀 있었는데, 이 세 안드레아가 대구로 오기 전의 이야기를 먼저 나누어보자.

 

이재행(안드레아)은 충청도 홍주 출신으로 20세가 넘어서 천주교에 입교했다. 이후 성실하게 신앙을 실천해오던 이재행은 보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산속에 은거해 살았다. 여러 차례의 이주생활을 통해 몹시 가난해졌지만 시련과 빈곤 속에서도 덕행을 쌓으며 가족이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이끌었고, 기도와 영적 독서를 꾸준히 실천하여 집안 식구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가족들에게 “우리는 저마다 죽음을 준비하여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계획하심을 알지 못하니까 피할 곳을 찾아야 한다.”고 격려했다. 경상도 순흥 곰직이에서 살고 있을 때 체포되어 안동으로 끌려 간 그는 안동 관장이 잔혹한 매질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했을 때 “하느님은 대왕(大王)이시요 어버이시고, 모든 창조물을 다스리고 먹이시며, 선을 상 주고 악을 벌하시니, 모든 인간의 의무는 그를 흠숭하는 것이므로 저는 그분을 공경하고 섬깁니다.”라고 말했다.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대구로 이송된 그는 또다시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형벌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의 굳은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결코 천주교 신앙에 대한 믿음을 바꾸지 않았다. 이후 그는 동료들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12년 동안 고통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박사의(안드레아)는 1827년 대구에서 옥사한 박경화(바오로)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천주교를 실천했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신앙심이 깊어져 갔고 특히 효성이 지극하여 이웃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부모가 병이 났을 때는 그 곁을 떠나지 않았고 부모가 식사를 들지 않는 한 자신도 식사를 하지 않았다. 신앙 때문에 자주 이주해 가난했지만 부모가 좋아하는 음식은 어떻게든 마련했고, 부모가 걱정하는 일이 없도록 귀가 시간을 넘기지 않으려 칠흑 같은 밤길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모든 일에 있어 그는 부모의 바람에 부응하려고 애썼다. 그의 가족은 충청도 단양의 가마기로 이주하여 살다가 다시 경상도 상주 멍에목으로 이주했다. 당시 그의 가족은 고향의 재산을 버리고 온 터라 가난했지만 교우들이 집으로 찾아오면 이를 마다하지 않고 정성껏 대접했다. 1827년 4월 그믐,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내던 그의 가족은 교우들과 함께 상주 포졸들에게 체포됐다. 상주로 끌려간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인내와 용기를 보여주며 어떠한 위협과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증언한 뒤 대구로 압송되었다. 당시 나라 법에 의하면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법정에서 동시에 신문 받을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잠시라도 연로한 아버지를 떠날 수 없었던 그는 영장에게 아버지와 함께 신문 받도록 요청했다. 그의 효심에 감동한 영장은 그들 부자를 함께 신문했고, 옥에서도 함께 있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 모진 형벌을 받은 후에도 그는 아버지 목의 칼을 받쳐 들기 위해 즉시 아버지 곁으로 갔다. 감옥에서 지낸 지 5개월 만에 아버지가 사망했고 박사의(안드레아)는 동료들과 함께 12년 동안 옥에서 살면서 사형 집행을 기다렸다.

 

충청도 서산에서 태어난 김사건(안드레아)은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교리를 배웠다. 1815년 유배형을 받은 김창귀(타대오)가 그의 아버지, 그해 강원도 원주에서 옥사한 김강이(시몬)는 그의 큰아버지다. 그의 집안은 부유했지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부터 재산을 버리고 전라도 고산, 경상도 진보, 강원도 울진 등지로 이주해 다닌 탓에 가난하게 되었다. 1815년 을해박해 때 김사건은 아버지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어린 나이를 이유로 풀려났다. 그는 “참 좋은 기회를 놓쳤다.”며 한탄하곤 했다. 아버지가 유배를 간 뒤 경상도로 옮겨온 그는 기도와 전교, 영적 독서에 많은 시간을 바치며 신앙을 실천하는데 열중했다. 또 신자 가정을 찾아 교회 서적과 성물을 전해주거나 교리를 가르쳐 주었고, 죽을 고비에 있는 비신자 자녀들에게는 대세를 주었다. 그러면서 다시 순교의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도처에서 천주교인들을 가르쳤던 나로서는 이를 피할 수 없다.”고 말하며 천주의 섭리에 응답하기 위해 묵상에 전념했다. 실제로 얼마 안 있어 포졸들이 그를 체포하러 왔고 상주로 끌려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교우들을 고발하라.’는 관장의 명을 거부하고, 오히려 천주교의 주요 교리와 십계명을 설명했다. 그러자 관장은 화가 나서 혹독한 형벌을 가했다. 줄 톱질을 당한 그는 다리뼈가 허옇게 드러났지만 마음이 약해지기는 커녕 기쁜 마음으로 이를 참아냈다. 며칠 뒤 그는 경상도의 수부인 대구로 압송되어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 했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이렇게 세 안드레아는 대구 감옥에서 12년 동안 함께 옥에 갇혀 생활했다. 다블뤼 주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자. 감옥에 있을 때 그들은 먹을 것을 마련하기 위해 짚신을 삼기 시작했다. 이재행은 매일 단 한 차례만 먹었고, 그 나머지를 가장 굶주리는 자들에게 주었다. 그 사이 이재행은 그의 처와 자녀들의 사망 소식을 함께 전해 들었다. 고통과 슬픔에 못 이겨 그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의 가까이에 있던 박사의가 “욥 성인을 생각해 보게.”라고 위로했다. 그러자 그는 하느님 섭리의 모든 준비하심에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옥 안에서 박사의가 선택한 자리는 대단히 습하고 낮아 몸을 바로 펼 수 없었다. 그의 자식들이 적어도 허리는 구부리지 않아도 되는 자리로 바꿀 것을 간청하자, 그는 “이 자리는 내 아버지의 자리였으며, 또 암브로시오 스승의 자리였다. 나는 이 자리를 구세주께서 지정해 주신 자리로 여기고 있다. 어떻게 내가 그것을 바꿀 수 있겠느냐.”하고 대답했다.

 

김사건은 대구 감영에서 배교를 강요당하고 고문을 받았을 때 “제가 배교하고자 했다면 여기까지 올 필요가 있었겠습니까?”하고 말했다. 얼마 후 그는 전주 감영으로 가서 포졸들이 교우들에게서 빼앗은 책과 성물에 대해 답변을 한 다음, 다시 대구 감영 옥으로 돌아왔다. 형벌로 찢어진 몸으로 말을 타고 고통의 기나긴 천릿길을 다녀왔던 것이다. 천주교인 수감자 중 가장 나이가 적은 그는 종종 잔일들을 해야 했는데 항상 기쁘게 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 배교 여부를 묻는 문초가 다시 있었는데 이때 형조에서 임금에게 올린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재행은 여러 해 동안 천주교 교리를 외우고 익혔으며, 죽기로 맹세하고 뉘우치지 않으므로 법에 따라 처단하려고 합니다.”, “박사의는 천주교 교리를 배워 익혔으며, 마음을 다하여 이를 깊이 믿어 왔으므로 법에 따라 처단하려고 합니다.”, “김사건은 천주를 공경하여 받들었고 ‘그 교리를 깊이 깨달아 비록 죽을지라도 한스러울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법에 따라 처단하려고 합니다.”

 

이제 이 세 순교자의 마지막 모습을 다블뤼 주교의 《조선순교사비망기》를 통해 재구성해보자. 박해받는 천주교를 옹호하는 이 세 명의 안드레아는 사형에 처하라는 명이 조정으로부터 내려졌을 때 기뻐하며 “우리가 그 수많은 세월의 결실을 드디어 수확하게 되었으니 이 은총을 무엇으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까요?” 했다. 정해진 날이 되자 그들은 그들의 옷과 매일 사용하던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불쌍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것들을 받은 이들과 옥에 갇혀 있던 다른 이들 모두가 예외 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감동했다. 포졸들마저도 그들이 떠나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크게 슬퍼했다. 저마다 작별의 표시로 그들에게 술이나 마실 것을 주었고, 그들이 막상 나갈 때는 마치 부모나 벗을 잃는 것처럼 사방에서 탄식 소리가 들려왔다. 형장으로 간 그들은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에 참수됐다. 포졸들이 그들의 시신을 거두어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렀는데 이는 일찍이 없었던 일로 그만큼 우리의 증거자들은 그들을 가까이하는 모든 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얻을 줄 알았던 까닭이다. 그들의 주보성인을 충실히 따랐던 이 세 명의 안드레아는 우리 교우들의 존경하는 마음속에 남아 있고, 더불어 불굴의 용기와 덕성의 향기는 아직도 사방에 퍼져있다.

 

세 안드레아에 대한 이야기는 다블뤼 주교의 《조선주요순교자약전》, 《조선순교사비망기》에 전해진 이야기다. 기해박해 때 순교한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기해일기》에는 세 안드레아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기해일기》는 서울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해일기》에서 대구와 연관된 순교자가 한 분 있다. 1840년에 순교한 김 데레사이다. 김 데레사는 1816년 대구 관덕당에서 참수 치명한 김종한(안드레아)의 딸이다. 17세 때 교우 손연욱(요셉)과 혼인했고, 1824년 남편이 해미에서 옥사하자 줄곧 혼자 살면서 열심히 수계했다. 가난으로 당하는 고통 외에 매주 두 차례 대재(大齋)를 지켰고, 중국인 유방제 신부가 입국한 후 상경하여 정정혜(엘리사벳)와 함께 신부의 처소를 돌보았으며 앵베르 주교의 입국 후에는 주교의 처소를 돌보았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7월 11일 정하상(바오로) 일가와 함께 체포되었고 1840년 1월 9일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또 기해년에 순교한 복자 중에 대구와 연관이 있는 순교자는 김대권(베드로)이다. 김대권은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화춘(야고보)의 형이다. 그는 마음속 깊이 순교의 열망을 품고 있었고, 1816년 동생이 참수를 당할 때 동생 턱 밑을 받쳤던 나무토막을 가져와, 잠잘 때면 종종 그 나무토막을 자신의 턱 밑에 놓고 참수에 대한 생각을 더욱 절실하게 했다고 한다. 김대권과 함께 1839년에 전라도에서 순교한 정태봉(바오로), 이일언(욥), 이태권(베드로)은 내포지역 출신으로 세 안드레아와 마찬가지로 1827년 정해박해 때 체포되어 12년간 옥살이를 했다. 이들 중 정태봉에 대해서 샤스탕 신부가 전주를 지나던 때에 고해하는 행복을 얻었다고 다블뤼 주교는 전한다.

 

옥에서 어떻게 고해성사를 보았을까? 앵베르 주교가 1838년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 추기경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렇게 묻고 있다. “고(故) 클레멘스 8세 교황 성하의 ‘서신을 통한 고백’과 ‘부재자 사죄’에 관한 금령을 고수하나 감옥에 갇힌 신앙의 증거자들이 자기 죄를 편지로 신부에게 밝히고 같은 날이나 다음날 감옥 문 앞으로 지나가는 그 신부에게 그가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신부의 신호로 통회하는 마음을 발한다면, 사죄를 받을 수 있는지요? 실제로 남부지역에서 그해에 12년간 감옥에 갇혀있던 증거자 7명(1838년 당시 전주와 대구에서 12년간 감옥에 갇혀 있었던 신자들은 모두 8명)이 큰 기쁨으로 사죄를 받았습니다.”(앵베르 주교 22번 서한 중에서) 1838년 12월 서울에서 이 서한을 보냈으니 남부 지역에서 12년간 옥에 갇혀있던 순교자들은 1838년에 고해성사를 보았을 가능성도 추측해 볼 수 있다.

 

기해박해는 헌종(憲宗) 5년에 일어난 박해로 1839년 3월 대왕대비 김씨의 사학토치령에 의해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겉으로는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보아 배척한다는 데 있었으나, 내면적으로는 시파(時派)인 안동(安東) 김씨의 세도를 빼앗기 위한 벽파(僻派) 풍양(豊壤) 조씨가 일으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838년 12월 성물을 만드는 권득인(베드로)을 잡아들임으로 박해의 실마리를 열게 되어 1839년 3월부터 서울 각지에서 교우들을 체포하고 6월과 7월에는 정하상(바오로)과 세 성직자를 체포함으로 신유박해 이후 재건된 조선교회가 흔들리게 되었다. 이때 정하상은 자신이 체포될 것을 미리 짐작하고 〈상재상서〉라는 글을 준비해 우의정 이지연에게 올리게 했다. 그는 이 글에서 천주교 교리를 밝혀 천주교에 대한 박해의 비합리성과 부당성을 지적하고 천주교를 변호했다. 기해박해로 순교한 교우는 200여 명에 달하였는데 103위 성인 중 70위가 기해박해 순교자이고 주로 서울에서 순교했다. 이들은 1925년 7월 5일 병오박해 순교자 9명과 함께 로마에서 시복됐다. 124위 복자 중 기해박해 순교자들은 대부분 지방에서 순교한 이들로 18위가 기해년 순교자이다. 124위 순교자들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됐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 강론에서 “이 땅에 믿음의 첫 씨앗들이 뿌려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순교자들과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따를 것인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당신 때문에 세상이 그들을 미워할 것이라는 주님의 경고(요한 17,14 참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됨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이것은 박해를 의미했고, 또 나중에는 산속으로 들어가 교우촌을 이루게 됨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서 그들을 멀어지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즉 재산과 땅, 특권과 명예 등 모든 것을 포기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그들의 진정한 보화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1839년 대구에서 순교한 세 안드레아는 모든 것 위에 복음을 선택했다. 그리고 복음 말씀은 그들의 선택이 옳았음을 보여준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35)

 

다블뤼 주교는 《조선순교사비망기》에서 1839년 순교한 신태보(베드로)가 서울에 있는 신부를 만나려고 지방에서 서울까지 여러 차례 왕복했던 노력에 감동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 당시에 진리에 굶주려 있던 수많은 영혼들이 이러한 발걸음들을 했을 것을 생각한다면, 수천의 은총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매일 그것을 남용하는 수많은 교우들은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이 글은 지금 우리 모습을 비춰보게 한다. 우리야말로 지난날 신앙 선조들 덕분에 수천의 은총에 둘러싸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1839년 기해년, 그리고 180년이 지났다. 지금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월간빛, 2019년 6월호, 이찬우 다두(관덕정순교기념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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