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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 공소 이야기: 의정부교구 갈곡리공소(갈곡리준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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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6-02 ㅣ No.1161

[공소 이야기] 네 번째 - 의정부교구 갈곡리공소(갈곡리준본당)


한국전쟁 순교자 시복 기도하며 매일 미사 드려요

 

 

1956년 갈곡리공소 모습.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매일미사를 드릴 때마다 공소를 유지하기 위해 고생하신 어르신들 생각에 눈물이 납니다.”

 

지난해 8월 의정부교구는 갈곡리공소를 법원리본당에서 분리해 준본당으로 신설하고, 하느님의 종 김치호(베네딕토) 신부(1914~1950)와 김정숙(마리안나) 수녀(1903~1950) 순교자 기념 순교사적지로 지정했다. 1898년 약현본당 칠울공소가 설립되고 120년 만이다. 

 

네 번째 ‘공소이야기’는 120년의 역사를 이어온 경기북부 지역 신앙의 요람, 갈곡리공소(현 갈곡리준본당)를 다룬다.

 

 

칠울공소에서 갈곡리준본당까지

 

의정부교구 파주 갈곡리준본당(주임 김민철 신부)은 처음에 순 우리말로 ‘칡의 마을’이라는 뜻의 칠울공소라고 불렸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정식 행정구역 명칭이 갈곡리로 변경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준본당으로 승격 후 매일미사가 거행되고 있는 갈곡리준본당에는 20명 남짓의 신자들이 참례한다. 주일미사에는 40여 명이 참례한다. 교적에 등록된 실 거주자가 50여 명이고 몸이 불편한 노인들과 사정이 있어 못 나오는 신자들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거의 대부분 참례하는 것이다.

 

1970년에 이곳으로 시집 온 정남옥(필로메나·70)씨는 “준본당으로 승격돼 매일미사를 드릴 때마다 옛날 고생하신 어르신들 생각에 눈물이 난다”며 “그저 감사할 뿐”이라고 말했다.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된 공소 건물을 다시 짓도록 도움을 준 미국 군종사제 에드워드 마 신부와 한국 군종사제 김창석 신부에게 감사를 전하며 세운 사은비.

 

 

오랜 역사를 간직한 여느 공소나 본당과 마찬가지로 갈곡리준본당 역시 많은 역경을 이겨내며 신앙을 이어 왔다. 갈곡리 교우촌은 1890년대 형성된 후 100여 년 동안 중림동약현본당부터 법원리본당까지 6개 관할 본당을 거치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산업화 시기 등 교우촌 붕괴 조건들을 이겨냈고 옹기촌에서 농촌으로, 직장인 거주지역으로 적응해 왔다.

 

갈곡리가 고향인 최양자(루갈다·80)씨는 “우리 부모세대가 참 많이 고생했다”며 “옹기를 굽고 산에서 나물 캐서 번 돈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했지만 공소 일이라면 내 일처럼 나섰다”고 회상했다. 공소는 신자들의 삶 전부였다. 지금은 생계를 위해 많은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났지만, 농사를 지으며 마을과 성당을 지키는 교우들이 여전히 남아 있고 나이가 들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들도 적지 않다.

 

 

역경을 딛고

 

1936년 마련한 공소 강당이 한국전쟁 중인 1951년 폭격으로 소실되자 옛 강당을 대신할 새 성당을 짓고자 했다. 당시 한국 해병대 군종사제였던 김창석 신부와 미국 해병대 에드워드 마 신부(Edward Martineau)의 도움을 받아 1955년 1월 현재의 성당을 건립했다. 에드워드 마 신부는 주변 밭을 사들여 교우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나눴다.

 

- 지난해 12월 8일 교구장 이기헌 주교(왼쪽에서 세 번째)와 최창무 대주교(이 주교 오른쪽) 등이 갈곡리공소 설립 120주년 기념 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의정부교구 홍보국 제공.

 

 

공소 건물을 건립할 당시 교우들은 흙, 돌 등을 모두 손수 날랐다. 고생도 했지만 에드워드 마 신부에 대한 감사함은 교우들 가슴 깊이 새겨져 있다. “마 신부님이 우리 교우들 밥 벌어먹고 살라고 성당 주변을 사들여 밭을 나눠줬어. 참 고마운 분이야. 그분 없었으면 지금 우리 성당도 없었어.”

 

성당을 새로 짓기에 앞서 지금은 사제관과 카페로 쓰이고 있는 공소 강당 역시 폭격으로 소실 돼 마을 교우들이 직접 나섰다. 자발적으로 나무를 나르고 초가지붕을 만들어 1954년 ‘칠울 강당’ 낙성식을 가졌다. 그렇게 지어진 강당은 마을 사람들의 기도공간인 동시에 안식처이며, 축제의 장소였다. “생일이나 돌잔치가 있는 날이면 전부 강당으로 모였어. 큰 아궁이 세 개를 사용해야 할 정도였으니까. 그야말로 축제였지.”

 

또한 갈곡리는 마을 전체가 교우촌인 동시에 가족이다. “여기는 다 가족이야. 사돈이고 팔촌이고 그래. 그때는 문도 다 열어 놓고 살았어. 도둑도 없고 필요한 물건이나 음식은 서로 다 나눴어. 그때가 좋았지.”

 

그 당시 마을에는 70여 가구 정도 있었고 모두 모이면 300명이 넘었다. 김옥순(데레사·86)씨는 “매일 저녁 8시면 성로신공을 바치러 여기로 모였다”면서 “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한 사람도 안 빠져 공소가 꽉 찼다”고 기억했다.

 

1998년 8월 여름 갈곡리공소는 홍수로 인해 또 한 번의 큰 위기를 겪는다. 다행히 공소까지는 물이 올라오지 않았지만, 급박한 상황에 어른들이 목숨을 걸고 아이들을 구했다. 공소 주변과 마을을 복구하기까지 마을 사람 모두 나서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갈곡리 교우들에게는 공소를 지키는 것이 곧 마을을 지키기는 것이고 가족을 지키는 것이었다.

 

옛 공소 강당이 있던 자리에 생긴 ‘카페 칠울’. 미사 후 본당 주임 김민철 신부와 교우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성소의 못자리

 

공소에 대한 사랑과 열심한 기도 덕분일까. 갈곡리준본당은 한국전쟁 중 순교한 하느님의 종 김치호 신부와 김정숙 수녀, 그리고 최창무 대주교(전 광주대교구장) 등 지금까지 총 21명의 성직자, 수도자들을 배출한 성소의 못자리다. 

 

주임 김민철 신부는 “1950년대부터 성직자, 수도자들이 계속 배출됐다”며 “하느님의 섭리라고 밖에 설명이 안 된다”고 말했다. 또 “하느님의 종이 두 분이나 이곳 출신”이라며 “준본당으로 승격된 이유가 사제를 상주시켜 두 분 순교자가 탄생하신 곳을 성역화하고 시복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고 설명했다. 

 

갈곡리공소의 구교우 가정에서 태어난 김치호 신부는 1942년 덕원수도원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1950년 10월 5일 평양 인민교화소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김치호 신부의 누나인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소속 김정숙 수녀는 1950년 10월 17일 황해도 매화동성당에서 사목을 하던 중 피살돼 순교했다. 현재 갈곡리준본당은 순교자 기념 순교사적지로 지정됐으며 미사 시작 전 신자들은 김치호 신부와 김정숙 수녀를 위한 묵주기도를, 미사 말미에는 하느님의 종들의 시복을 위해 매일 기도를 바친다.

 

신앙과 성소의 못자리인 만큼 갈곡리준본당 교우들은 성직자들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하다. 정남옥씨는 “옛날 공소시절에는 미사를 드리기 위해 법원리, 덕정리 등에서 신부님이 오셨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며 “그날은 전 신자들이 마당부터 길가까지 도열해 사제를 맞이했다”고 밝혔다. 또 “그때 생각하면 지금 이렇게 신부님이 상주해 미사를 매일 드릴 수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꿈만 같다”며 “미사 시간을 맞추기 위해 더 일찍 일어나 농사일을 한다”고 말했다.

 

한편 신앙 공동체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또 하나의 매개체는 ‘애향회’다. 고향을 사랑하는 모임인 애향회는 매년 5월이면 갈곡리 출신 성직자, 수도자를 비롯해 객지로 흩어진 교우들이 갈곡리에 모여 함께 기도하고 잔치를 벌인다. 

 

갈곡리준본당 교우들에게 성당은 삶 그 자체다. 시대가 변하면서 젊은이들이 도심으로 빠져나가 미래를 걱정하기도 하지만, 오늘도 미사 후 ‘카페 칠울’(‘칠울 다방’)에 모여 각자의 삶을 나눈다.

 

[가톨릭신문, 2019년 6월 2일, 박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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