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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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일치 순례기 붓다의 길, 예수의 길4: 붓다의 입멸지 쿠시나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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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4-28 ㅣ No.1815

[김소일 위원의 일치 순례기 붓다의 길, 예수의 길] (4 · 끝) 붓다의 입멸지 쿠시나가르


예수와 붓다가 통하다 사랑과 자비

 

 

쿠시나가르 열반당에 있는 붓다의 열반상은 길이 6.1m의 금박 와불이다. 전 세계 불자들의 순례와 기도가 끊이지 않는 곳이다. 한국의 종교지도자들은 사원 측의 배려로 별도의 기도시간을 배정받고 종교간 화합과 한반도 평화를 기원했다.

 

 

길 위에서 마친 붓다의 삶

 

붓다는 길 위에서 태어나 길 위를 떠돌다가 길 위에서 삶을 마쳤다. 당시 인도 북부에는 16개 작은 나라가 있었다. 붓다의 설법 여행은 주로 마가다국을 중심으로 국경을 넘나든다.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은 그 여정을 “동서 삼천 리, 남북 이천 리”로 표현했다.

 

붓다의 마지막 여행은 마가다국 수도 왕사성에서 쿠시나가르로 가는 북행이었다. 북서쪽으로 300㎞쯤 되는 곳이다. 이미 여든에 이른 붓다에게는 힘겨운 길이었다. 머물고 설법하며 몇 달에 걸쳐 걸었을 것이다. 붓다는 이 길에서 곧 다가올 열반을 몇 차례 예고한다. 

 

마지막 공양을 바친 사람은 대장장이 춘다였다. 일종의 버섯 요리였다고 전한다. 붓다는 쿠시나가르에 이르러 몸을 눕혔다.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댔다. 제자들에게 마지막 설법을 하고 열반에 들었다. 사방에 두 그루씩 사라쌍수가 그 열반을 지켜보았다.

 

- 붓다의 열반상을 모신 열반당과 열반탑. 모든 순례자는 신발을 벗고 입장한다.

 

 

순례와 기도의 열기 넘치는 열반당

 

쿠시나가르의 열반당에 들어서면 숙연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붓다는 길이 6.1m의 대형 금박 와불로 누워 있다. 불심 깊은 순례자들이 끊임없이 참배하고 꽃을 바친다. 준비해온 비단으로 불신을 덮고 나직한 소리로 경을 왼다. 그 신심과 기도의 열기가 공간을 채우고 흘러넘친다. 위대한 구도자의 가르침은 2500년의 세월을 넘어 수많은 사람의 가슴에 꿈틀거리며 살아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리스 비극처럼 잘 짜인 서사적 구조로 흐른다. 슬프고 아름답고 장엄하다. 그분은 나귀를 타고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군중은 길바닥에 겉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외친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그러나 그분은 다가올 수난을 알고 있다.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고 제자들의 발을 씻긴다. 한 제자의 배신을 예고하고 동산으로 물러나 홀로 기도한다. 군사들에게 붙잡혀 재판을 받을 때 군중은 소리친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그들은 바로 며칠 전 ‘호산나!’를 외쳤던 군중이었다.

 

제자들은 열반한 붓다를 7일 동안 이곳에 모셨다가 다비식 장소로 옮겼다.

 

 

가장 큰 계명,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경전은 붓다의 마지막 가르침을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 자귀의(自歸依) 법귀의(法歸依)’로 전한다.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으며, 자신을 귀의처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정진하라는 뜻이다. 팔리어 원전에는 등불이 아닌 섬이라고 한다. 진리를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섬처럼 여기고 오직 그에 귀의하라는 뜻일 터다.

 

성경에도 비슷한 가르침이 있다. 역시 수난과 죽음을 앞둔 시기다. 율법 교사 한 사람이 물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그분이 답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5-40)

 

과연 그렇다. 그리스도의 모든 가르침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가지로 요약된다. 붓다가 강조한 ‘법을 등불 삼고, 법에 귀의하라’는 가르침은 아마도 ‘하느님 사랑’과 통할 것이다. 다만 ‘자신을 등불 삼고, 자신에게 귀의하라’는 가르침은 ‘이웃 사랑’과 미묘하게 엇갈린다. 서로 방향이 다르다. 한쪽은 내면을 향하고, 다른 쪽은 바깥을 본다. 깨우침을 강조하는 불교와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그리스도교의 특성이 드러난다.

 

- 열반한 붓다의 다비식을 치른 장소. 그 재 위에 벽돌을 쌓아 탑을 세웠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수행문화

 

가톨릭과 불교 사이에는 다름과 같음이 공존한다. 두 종교는 비슷하면서도 색다른 수행문화를 갖고 있다. 선불교에 참선 문화가 있다면, 가톨릭에는 사막의 은수자로부터 이어져 온 치열한 수도 문화가 있다. 기도와 노동으로 이뤄진 단순한 삶의 전통은 오늘날 남녀 수도원에 면면히 흐른다.

 

물론 그 수행에는 본질적인 차이도 있다. 불교적 수행이 해탈과 성불을 목표로 한다면, 가톨릭은 신비적 합일과 구원의 은총을 갈구한다. 깨달음은 철저하게 고독한 수행을 요구한다. 가족도, 이웃도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야 한다. 가톨릭 수도 문화는 공동체적 사랑을 중시한다. 미운 이를 용서하고 괴로운 이에게도 순명한다. 저 천덕꾸러기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 은총도, 구원도 얻지 못한다. 잘나고 못난 이웃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이웃 사랑이 부족하면 하느님도 사랑할 수 없다.

 

 

대자대비와 사랑 

 

붓다는 지혜와 더불어 대자대비의 상징이다. 자비는 지혜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아마도 사랑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출가와 수행이 개인의 해탈만을 목표로 한다면 그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것일 수 있다. 대승불교는 이타행(利他行)을 강조한다.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 보살의 덕목이다.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에게 다가가야 한다. 홀로 깨달아 성불하는 길은 외롭고 불확실하다. 매일의 삶 속에 실천하는 연민과 자비에도 성불의 길은 열려 있을 것이다.

 

결국, 두 종교는 사랑과 자비로 서로 만난다. 관용과 존경으로 서로를 긍정한다. 쿠시나가르의 열반당을 물러나며 프란치스코 교황을 떠올렸다. “삶이라는 것은 길입니다.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우리는 형제들입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함께 걸어가도록 합시다.”

 

감사한 마음으로 순례를 마쳤다. 짧지만 강렬한 체험이었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함께 생각해보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순례의 끝이 어디 있을까. 인생이 곧 순례이니 삶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순례자다. 허락된 시간만큼 걸어가는 나그네일 뿐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4월 28일, 인도=김소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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