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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시 읽어주는 신부: 단정한 공명(共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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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4-19 ㅣ No.369

[시(詩) 읽어주는 신부] 단정한 공명(共鳴)

 

 

오랜만에 교구로 돌아와서 살고 있습니다. 사제 생활의 대부분을 교구 밖에서 살아왔음을 확인합니다. 귀향의 느낌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세월이 흘렀음을 절감합니다. 신학생 시절을 함께한 선후배 동료들 역시 늙어있음을 발견합니다. 그 시간만큼이나 아득한 정서적 거리를 또한 생각합니다. 친숙함, 반가움, 낯섦이 혼재해있습니다. 사실 동료의 얼굴에서 세월의 흔적을 읽어내는 일은 조금 슬픈 감정으로 다가옵니다. 늙어있는 나를 본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그 얼굴들에서 책임과 헌신과 성숙의 시간들보다 타성과 관성과 퇴행의 기미를 발견할 때는 좀 더 쓸쓸하고 씁쓸해지는 기분입니다. 젊은 시절의 우리의 모습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자신을 봅니다. 종교적 헌신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했던 그 시절의 모습이 아득한 추억으로 다가옵니다. 아마도 당분간은 귀향의 감상(感傷)에 젖어있을 것 같다는 예감입니다.

 

적지 않은 시간을 신부로 살면서 드는 느낌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점점 공감과 공명(共鳴)의 방식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7)는 성경 말씀이 가끔은 서늘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솔직하게 고백하면, 동료 사제들과 대화하는 일이 쉽지가 않습니다. 주장과 일방적인 이야기 방식에 우리들이 익숙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는 일에 많이 서툴다는 느낌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들의 내용과 형식이 공감과 대화의 방식이 아니어서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늘 교회의 이름으로 교리와 신앙윤리와 교회법적 규범을 말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방식은 주로 가르침의 형식입니다. 교리와 윤리와 법은 타협과 절충이 어려운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교회의 교리와 윤리와 법을 준수하며 살아야 하는 종교인으로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를 공감과 공명으로 잘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내용보다는 형식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자주 생각합니다. 선포와 가르침은 일방적 주장과 지시와는 다르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실 가르침(teaching)은 듣기(listening)와 배움(learning)에서 시작됩니다. 어쩌면 듣기와 배움이 곧 가르침 그 자체입니다. 경청하고 배우지 않는 사람은 가르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의 사정과 이야기를 듣고 배우는 태도가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가 점점 고집스러워지고 원칙과 주장만을 고수하는 판관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하느님만이 판관이시고 우리 모두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건 아닌지 저어하는 마음이 들 때가 많습니다.

 

나희덕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서 공감과 공명의 삶을 다시 생각합니다. 나희덕(1966년생) 시인은 199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시인의 한 사람입니다. 여덟 권의 시집과 시론, 시 감상에 대한 두 권의 책을 낸 성실한 시인입니다. 「오 분 간」, 「푸른 밤」이라는 절창이 보여주듯이, 정서적이고 따뜻한 내면의 성찰을 담고 있는 초기의 시는 나희덕 시인을 탁월한 서정시인으로 알려지게 했습니다. 저에게 시인의 인상은 슬픔과 아픔의 정서를, 시를 쓰는 행위를 통해 조용히 견뎌내는 “절제와 단정함”(황현산)의 모습이었습니다. 나희덕 시인은 일곱 번째 시집(『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문학과지성사, 2014)에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2015년에 발간한 자신의 시선집 『그녀에게』(도서출판 예경)에서는 문단에서 여성시인으로 살아가면서 여성의 정체성에 대한 점점 더 강한 느낌을 갖게 된 시인의 모습이 보입니다. 작년에 출간한 『파일명 서정시』(창비)에서는 개인의 기억과 경험에서 출발하는 시보다 사회적 삶을 성찰하는 시가 더 집중되어 있습니다. 시인은 한 인터뷰에서 “사회 어둠이나 그림자에 주목하고 그것들과 싸우려다 보니까 내가 가진 언어의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게 된 것 같아요.”라고 고백합니다. 적어도 제 눈에는 시인의 응대 방식은 늘 같았습니다. 나희덕 시인은 세상의 소리를 잘 듣기 위해서 시를 쓴다고 말합니다. “내 시의 팔 할은 슬픔이나 연민의 공명에서 시작된 게 아닌가 싶다.”, “시인이 가장 충실하게 살아 있는 순간은 만물의 울음소리를 자신의 몸으로 온전하게 실어낼 수 있을 때이다.”(『그곳이 멀지 않다』, 문학동네, 2004) 시인의 이 말은 종교인으로 살고 있는 저에게 서늘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어쩌면 십자가의 신학을 정확히 문학적으로 표현한 말 같습니다. 시인의 시적 궤적은 자신의 고백을 성실히 수행한 것 같아 보입니다.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과 울음을 시인은 자신의 말과 글로 대신 표현해주는 필경사 같은 존재임을 고백합니다. “글을 쓰고 싶어하셨지만/ 글자만을 한 자 한 자 철필로 새겨 넣던 아버지,/ 그러나 고치 속에서 뽑아낸 실로/ 세상을 향해 긴 글을 쓰고 계셨다는 걸 깨달은 것은/ 그 후로도 오랜 뒤였다// ……// 아버지가 뽑아내던 실끝이 어느새 내 입에 물려 있어/ 내 속의 아버지가 나 대신 글을 쓰는 밤/ 나는 아버지라는 생을 옮겨 쓰는 필경사가 되어/ 뜨거운 고치 속에 돌아와 앉는다.”(「누에의 방」)

 

시인에게 생의 아픔과 슬픔은 저녁과 어둠으로 표상됩니다. 그 슬픔과 아픔에 공명하는 방식은 저녁과 어둠 속으로 들어가 그 한가운데 가만히 서 있는 일입니다. 어두워진다는 것은 “몸을 비추던 햇살이/ 불현듯 그 온기를 거두어가는 것”이고 그래서 “그토록 오래 서 있었던 뼈와 살/ 비로소 아프기 시작하”는 것입니다.(「어두워진다는 것」) 저녁은 “너무 밝은 자유는 허락받지 못한 영혼들이/ 파닥거리며 모여드는”(「무언가 부족한 저녁」) 시간입니다. 세상은 “반음씩 어두워져”(「음계와 계단」) 갑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어둠 속에 함께 머무는 일입니다. 시인은 해미읍성에 있는 회화나무와 느티나무를 대조하면서 어둠 속에서 함께 서 있는 일의 역설적 아름다움을 노래합니다. 형틀의 운명을 타고난 회화나무와 여름날 서늘한 그늘을 제공하는 느티나무는 같은 공간에서 서로를 공명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늘과 형틀이 이리도 멀고 가까운데/ 당신께 제가 드릴 것은 그 어둠뿐이라는 것을요/ 언젠가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사이를 걸어보실 일입니다.”(「해미읍성에 가시거든」) 사실 “사랑하는 것들은 어두워져야/ 이부자리에 팔과 다리를 섞을 수 있”(「저녁을 위하여」) 습니다. “너무 맑게만 살아온 삶은/ 흐린 날 속을 오래오래 걸어야”(「흐린 날에는」) 합니다. 시인은 고백합니다. “교차로에서, 시장에서, 골목길에서, 도서관에서, 동물원에서/ 오래 오래 서 있고 싶은 저녁”(「무언가 부족한 저녁」)이 되면, “어둠이 빛을 지우며 내게로 오는 동안/ 나무의 나이테를/ 내 속에도 둥글게 새겨 넣으며/ 가만 가만히 거기 서 있으려 한다”(「그런 저녁이 있다」)고 말입니다.

 

타자의 아픔과 슬픔에 함께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음을 읽어내기 위해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상대방을 살피고 배려할 수 있는 노력도 요청됩니다. “우리가 후끈 피워냈던 꽃송이들이/ 어젯밤 찬비에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아프지도 못합니다/ ……/ 저는 마음껏 향기로울 수도 없습니다.”(「찬비 내리고 . 편지 1」) 함께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나란히 걷는 것은/ 아주 섬세한 행위랍니다/ 너무 앞서지도 너무 뒤서지도 않게/ 거리와 보폭을 조절해야 하지요.”(「산책은 길어지고」) 그리고 위안과 위로의 말은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한다는 것을 시인은 발견합니다.

 

사실 말이 살아있기 위해서는 오랜 소통과 신뢰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말의 상황은 비관적입니다. “내 말이 네게로 흐르지 못한지 오래 되었”고, “말은/ 입에서 나오는 순간 공중에서 얼어붙고”, “허공에 닿자 굳어버리는 거미줄처럼” 되어 있습니다.(「이따금 봄이 찾아와」) 우리의 대화는 상처를 입었고 그래서 불가능합니다. 시인은 상처 입은 말에 대해 노래합니다. “얼마나 수많은 어리석음을 지나야/ 얼마나 뼈저린 비참을 지나야/ 우리는 서로의 혀에 대해 이해하게 될까// 혀의 뿌리와 맞닿은 목젖에서는/ 작고 검고 둥글고 고요한 목구멍에서는/ 이제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말이 말이 아니다// 독백도 대화도 될 수 없는 것/ 비명이나 신음, 또는 주문이나 기도에 가까운 것// 혀와 입술 대신/ 눈이 젖은 말을 흘려 보내는 밤/ 손이 마른 말을 만지며 부스럭 거리는 밤”(「상처 입은 혀」)이라고 말입니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침묵에 기대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기에”(「마지막 산책」) 함께한다는 것, 공명한다는 것은 결국 따뜻한 시선과 손을 잡는 행위(동작)라는 것을 시인은 암시합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몇 시간째 서 있으면/ 어떤 움직임이 손끝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동작은 그렇게 발견된다는 것을”(「동작의 발견」) 알 수 있고, 손의 맞닿음은 섬모와 섬모의 감촉을 의미하며 그 안에서 저녁의 온기를 기억해낼 수 있다고 시인은 노래합니다.(「한 아메바가 다른 아메바를」)

 

‘쓰다’라는 동사의 맛이 항상 쓴 것은 아닙니다

‘보다’라는 동사는 때로 조사나 부사가 되기도 합니다

‘너무’라는 부사를 너무 좋아하지는 마세요

‘빨리’라는 부사도 조심하세요

‘항상’이라는 부사야말로 항상 주의해야 할 물건이지요

하느님이 부사를 좋아하시는 건 사실이지만요

 

양치기가 사제보다 더 숭고할 수 있는 건

바로 부사 때문이에요

양치기가 어떻게 양들을 불러 모았는지

그때 눈빛은 어땠는지

목소리는 얼마나 다정했는지

해질 무렵 어둠은 얼마나 천천히 걸어왔는지

양들이 한 마리도 빠짐없이 돌아왔는지

돌아오는 길에 데이지가 얼마나 많이 피어있었는지

부사로 이루어진 그런 순간들 말이에요

 

부사는 희미한 그림자 같아서

부사 곁에서는 마음도 발소리를 낮춘답니다

 

‘천천히’라는 부사는 얼마나 천천히 어두워지는지요

‘처음’이나 ‘그저’라는 부사 뒤에서 망설이는 동사들을

보세요

동사들이 침묵하는 건 부사들 때문이에요

그러니 어떤 부사를 발음하기 전에는 오래오래 생각하세요

 

그런데 하느님, 부사를 좋아하시는 당신은 정작

내 속에서 길을 잃으셨군요

 

「하느님은 부사를 좋아하신다」라는 시의 전문입니다.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가톨릭 철학자 찰스 테일러의 『자아의 원천들』(새물결, 2015)에 나오는 한 장(章)의 제목을 빌려온 시에서 시인은 양치기와 사제를 비교하면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람과 삶의 아름다움과 거룩함은 어떤 특정한 형식(명사와 동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부사) 수행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입니다. 사제의 거룩함과 아름다움은 ‘사제’라는 명사, 성사를 ‘거행한다’는 동사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제직을 수행하는지, 어떻게 성사에 참여하는지에 달려 있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특정한 종교적 삶의 형식이 더 우월하고 거룩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삶, 즉 일상의 삶을 어떻게 신앙적으로 살아내는가에 거룩함과 아름다움이 달려있다는 뜻입니다. (찰스 테일러 책을 보면, ‘일상적 삶의 긍정’이라는 항목 안에 ‘하느님은 부사를 좋아하신다’는 장이 부속되어 있습니다.)

 

『파일명 서정시』에는 ‘세월호’라는 사회적 비극에 대한 탄식과 ‘블랙리스트 사태’라는 사회적 폭력에 관한 시인의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그 가운데 신앙적 관점에서 저를 사로잡은 시는 「하느님은 부사를 좋아하신다」와 표제시인 「파일명 서정시」입니다. “이 사랑의 나날 중에 대체 무엇이 불온하단 말인가//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그가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말을 가졌다는 것/ 마음의 뿌리를 돌보며 살았다는 것/ 자물쇠를 고치는 노역에도/ 시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 ……// 그의 생애를 견뎌온 문장들 사이로/ 한 사람이 걸어나온다, 맨발로, 그림자조차 걸치지 않고.” 「파일명 서정시」에 나오는 이 구절을 저는 몇 번이나 마음으로 낭송했습니다. 2007년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받은 독일 영화 ‘타인의 삶’에서 받았던 느낌과 맞물려서 그 구절은 저에게 참 묘한 감응과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념적 소신과 고집에 의한 충실함이 아니라 자기의 삶에 정직하고 자신의 삶의 자리에 충실하다는 것은 자신을 성찰하는 힘을 놓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할 것입니다. 자기를 성찰하는 사람은 타인의 삶에 대해서도 열린 자세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에서 유명 극작가의 삶을 도청했던 동독 비밀경찰의 변화는 비록 도청이라는 불의한 방식이지만 타인의 삶을 듣고 배우는 과정에서 이루어집니다. 타인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열린 마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성찰의 자세, 끈기 있게 자신의 일상을 수행하는 것만이 사람의 진정한 변화를 가능케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마도 말과 글과 삶이 일치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나희덕 시인의 시를 읽으며, 생의 여정에서 사람들과 공명할 줄 아는 사람은 슬픔(저녁과 어둠)의 자리에 함께 서 있는 사람이며, 타인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그들과 온 마음과 몸으로 같이 울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은 그의 글에서 그를 읽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또한 합니다. 사순시기입니다. 십자가는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일입니다. 누군가를 대신해서 슬픔과 아픔과 고통을 지는(표현하는) 일입니다. 우리 사제의 삶이 그런 공명(共鳴)의 삶인지 다시 한 번 돌아봅니다.

 

[월간빛, 2019년 4월호, 정희완 요한 신부(안동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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