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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해박해 공개강좌: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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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4-17 ㅣ No.1019

[기해박해 180주년 한국교회사연구소 '사료로 보는 기해박해' 공개강좌] 제3강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


“하느님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김대전 부제의 기해박해 보고서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는 1845년 1월 조선에 입국한 김대건 부제가 「기해일기」 편찬자에게 기해박해 전체 상황을 직접 듣고 확인한 후 그 경과를 스승 리브와 신부에게 보고한 장문의 서한이다. 김대건 부제는 이 보고서에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세 선교사의 모습과 신자들에게 가해진 대표적인 6가지 형벌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소개하기도 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는 1845년 1월 조선에 입국한 김대건 부제가 「기해일기」 편찬자인 현석문과 이재의 등에게 기해박해 전체 상황을 직접 듣고 확인한 후 그 경과를 스승 리브와 신부에게 1845년 4월 6일과 7일 두 번에 걸쳐 보고한 장문의 서한이다. 

 

김대건 신부의 11ㆍ12번째 서한인 이 보고서는 제1장 조선 순교사와 제2장 조선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 등 두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제1장 조선 순교사에 관한 보고에는 조선 교회 설립부터 1839년 기해박해까지 조선 교회 순교사를 서술하고 있다. 또 제2장 조선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에는 기해박해 때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 그리고 서울에서 순교한 조선인 30명의 행적을 정리해 놓았다.

 

 

보고서 작성 배경

 

김대건은 1842년 10월 마카오에서 요동지방 백가점에 도착해 국내 박해 소식을 접했다. 그는 자신이 들은 부정확한 정보임에도 참혹한 박해로 수백 명의 교우가 끔찍한 죽임을 당했다는 조선 교회 사정을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와 리브와 신부에게 편지로 보고한다. 그 편지에는 최양업 신학생의 부모도 순교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러면서 지금 조선 교회는 박해가 멎어서 신자들의 사정이 조금 안정됐지만, 성직자들이 순교해 목자 없는 양 떼처럼 탄식하며 방황하고 있다고 알린다. 

 

1844년 12월 소팔가자에서 부제품을 받은 김대건은 1845년 1월 중순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요동에서 전해 듣기만 했던 기해박해의 진상을 파악하고 그 내용이 상세히 적어 스승을 통해 파리외방전교회에 보고한다.

 

 

제1장 조선 순교사에 관한 보고

 

김대건 부제는 조선 순교사에 관해 △ 조선 교회 설립에 관한 개요 △ 1839년 기해박해의 진상 두 부분으로 구성해 적고 있다. 그는 초기 교회 설립사와 함께 1791년 신해박해 때 윤지충(바오로)이 조선의 첫 번째 순교자가 됐다고 밝혔다. 또 1795년 을묘박해로 주문모 신부의 입국을 주동한 윤유일(바오로) 등이 순교했다고 보고한다. 

 

김대건 부제는 그러면서 1801년 신유박해가 노론 벽파 사람들이 남인에 대한 반기로 일어난 것이며 이후 1845년까지 800명이 넘는 순교자가 탄생했다고 기록한다. 

 

김대건 부제는 아울러 ‘배반자 유다스’ 김여상이라는 거짓 신자가 기해박해 중 신자들에게 최대의 재난을 초래했다고 지적하면서 그의 밀고로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가 순교하게 됐다고 설명한다.

 

 

제2장 조선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

 

제2장도 1839년에 순교한 몇몇 주요 순교자들의 행적과 1839년에 서울에서 순교한 주요한 순교자들의 행적 두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제2장의 특이점은 「기해일기」의 편집 체제에 따라 서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김 부제의 이 보고서가 「기해일기」를 토대로 작성됐음을 알려준다.

 

김대건 부제는 제1절에서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 등 프랑스 선교사들의 순교 행적을 작성했다. 그는 조선의 박해 상황과 형벌을 잘 모르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이해를 돕고자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세 선교사의 모습과 신자들에게 가해진 대표적인 6가지 형벌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소개한다. 

 

제2절에서는 30명의 순교자를 소개하면서 교우들이 최소한의 인도적 배려를 받지 못하고 극악 죄인으로 취급 받아 조선의 최고 극형인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고 보고한다. 또 참혹한 고문 실태도 증언한다. 김대건 부제는 보고서에서 18살 이 아가타는 300대 태형과 90대 치도곤을 맞아 순교했고, 14살 유대철은 600대 이상의 태형과 40대의 치도곤을 맞았으며, 다른 순교자들도 매를 맞아 뼈가 부러지고 골수가 튀어나오기가 일쑤였다고 적었다.

 

 

미완성 보고서

 

김대건 부제는 보고서 마지막 부분에 “이번에는 여기까지 적습니다”라고 마무리했다. 미처 작성하지 못한 순교자들의 행적을 계속 정리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는 1845년 사제품을 받고 재입국해 다음 해인 1846년 병오박해로 순교해 순교자들에 대한 약전을 이어가지 못했다. 따라서 이 보고서는 33명의 기해박해 일부 순교자 행적만이 기록된 미완성 형태로 머무르게 됐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4월 14일, 이민석 연구원(한국교회사연구소), 정리=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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