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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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협ㅣ사목회

평신도 영성, 나는 평신도다17-19: 한국 교회 평신도 사도직의 현주소 (5-7) 신앙을 통해 현실 안에서 세속적 가치 극복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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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4-17 ㅣ No.97

[평신도 영성, 나는 평신도다] (17) 한국 교회 평신도 사도직의 현주소 신앙을 통해 현실 안에서 세속적 가치 극복하기 (상)


삶의 순간마다 손을 뻗어 주님의 손을 잡자

 

 

하느님을 바라보며 사는 것은 성당에서 온종일 살라는 말이 아니다.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하느님은 늘 함께하시기에 우리는 간단히 손을 뻗어 그 손을 잡기만 하면 된다. CNS 자료 사진.

 

 

많은 분이 영적인 삶을 살아가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늘 하느님과 함께 현존하는 그 삶이 어렵다고 합니다. 그 삶을 어렵게 만드는 장애물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많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갑자기 찾아온 병으로 고통받을 수 있습니다. 성당에 다니자마자 갑자기 집안에 우환이 생겨서 성당에 나오기 힘든 경우도 있습니다. 사업이 어려워지거나 실직을 당해 신앙생활에 소홀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고통은 평신도들의 신앙을 흔들리게 합니다.

 

그런데 고통이 근본적으로 안고 가야 하는 것이라면 거기엔 고통보다 더 높은 그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왜 고통을 허락하실까요? 고통보다 더 높은 가치가 있기 때문에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 분이 왜 고통을 받았겠습니까? 예수님이 받으실 만한 고통의 높은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왜 고통을 받아야 하나

 

의인이 왜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예수님 탄생 이전까지 구약성경의 가장 큰 주제였습니다. 그 해답이 예수님에 이르러 주어집니다. 고통보다 높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완성된 모범을 보이십니다.

 

의인이 왜 고통을 받아야 할까요? 의인은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해답입니다. 악인은 고통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지막까지 손해 안 보려고 극악하게 발버둥 치며 자신을 합리화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통을 덜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그 고통을 전가합니다. 자연히 고통을 받을 확률이 낮아집니다. 의인이니까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고통은 젊은이와 늙은이 사이의 구별이 없습니다. 가난한 자뿐 아니라 부자에게도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여러분은 부자가 행복할 것 같은가요? 고통이 전혀 없어 보이는가요? 권력자가 행복할 것 같은가요? 오히려 권력 있는 자가 권력 없는 사람보다 더 심각한 내면의 병을 앓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행복은 외적인 것에서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고통과 관련해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입니다. 계시를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고통은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일치하도록 돕는다는 점입니다. 어떤 고통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두통이든 교통사고로 인한 부상이든, 빈정거림을 받든, 그 고통은 모두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돕습니다.

 

또 신앙적 차원에서 고통은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보여주는 속죄의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와서 고통을 받으신 이유는, 하느님과 일치하는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리고 수많은 인간이 저지른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켜주셨습니다. 평신도는 이러한 진리를 믿고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평신도는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바라보며 산다는 말은 성당에 와서 온종일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산속에 들어가서 평생 하느님만 바라보며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계시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직장에도 계시고, 학교에도 계시고, 이웃의 표정 속에서도 살아 계십니다. 버스 정류장에 혼자 앉아 있는데 옆에 어떤 사람이 와서 길을 물어본다면 그 사람의 눈빛 속에도 하느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들에 핀 꽃 한 송이에도, 기름 잔뜩 묻은 차량 정비공의 손에도 하느님이 계십니다. 세상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항상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늘 우리 옆에 계시는 분 

 

하느님 빼고 학교에 가고, 하느님 빼고 직장 일을 하고, 하느님 빼고 이웃과 대화하는 데서 모든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느님은 사막에 가야 찾을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지에만 존재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늘 우리 옆에 서 계십니다. 평신도는 간단히 손만 뻗어서 그 손을 잡기만 하면 됩니다. 성경을 읽다가 아름다운 시 한 편을 발견했습니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창공은 그분 손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네.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그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는 온 땅으로, 그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가네.(시편 19,1-4)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4월 7일, 정치우(안드레아, 새천년복음화학교 교장)]

 

 

[평신도 영성, 나는 평신도다] (18) 한국 교회 평신도 사도직의 현주소 신앙을 통해 현실 안에서 세속적 가치 극복하기 (중)


복음화, 우리 사회를 아름답게 하는 길

 

 

많은 이들이 삶을 전쟁터로 본다. 하지만 평신도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전쟁터가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가 넘쳐나는 아름다운 곳이고, 그렇게 만들도록 노력해야 한다. 사제서품식에서 기도하는 신자들. 가톨릭평화신문 DB.

 

 

우리의 일상은 고통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두통, 치통, 감기, 남편 또는 아내의 나쁜 성향, 찌푸린 얼굴을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 잃어버린 휴대전화기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평신도로서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정말 힘든 일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불편함이 사랑으로 표현되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아기를 위한 어머니의 희생은 불편함이 아닙니다. 아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어도 그것은 고통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불편함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인간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동물의 새끼 사랑은 본능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자녀 사랑은 본능적인 것에 더해 위대한 사랑의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사랑 위해선 불편함 감수해야 

 

이 사랑을 위해서는 조금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합니다. 세속적으로 돈을 많이 벌려고 해도 우리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합니다. 세속의 부자가 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새벽에 좀 더 일찍 일어나야 합니다. 장사하기 위해, 회사에 출근하기 위해, 학교에 가기 위해 일찍 일어나야 합니다.

 

영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더 많이 움직여야 합니다. 부지런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평일 미사에 참여하고, 각종 단체에 가입해 활동도 해야 하고, 어려운 이웃도 도와야 합니다. 이러한 불편함이 싫다면? 육신과 정신과 영이 서서히 죽어갑니다. 동물은 싫은 것을 하지 않습니다. 불편함을 이겨나갈 때 영적인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현재 한국 천주교회의 가장 큰 과제는 ‘영성화’ 그리고 ‘복음화’라고 생각합니다. 정신적으로 똑똑한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는 똑똑한 사람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영의 깊은 차원, 영의 핵심까지 들어간 평신도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물론 8살 먹은 아이가 천재의 재능을 발휘해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이제 막 영적 초보 단계를 걸어가는 이에게 깊은 영적인 차원을 느끼라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각자 신앙인의 처지에 맞게 하느님을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8살 꼬마는 그 나이에 맞게, 20대 청년은 그 나이에 맞게, 70대 노인은 그 나이에 맞게 하느님을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렇게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모든 피조물 안에서 계시지만 동시에 무한히 그것을 초월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1, 2, 3, 4, 5차원으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무한대의 차원으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배 속의 태아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지만 신비로운 방법으로 어머니의 사랑을 체험합니다. 외국으로 떠난 자녀가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거리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 자녀에 대한 생각은 거리와 관계없이 지금 여기서 매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일반적인 인간적 방식을 조금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인간적 방식이란 육신적이고 정신적인 방식을 말합니다. 정신에 의존하는 기억, 지식, 벗어나지 못하는 죄의식, 편견, 이기주의, 야망, 욕심을 비우면 비울수록 하느님을 바라보는 통찰력은 더욱 명확해집니다. 이를 가로막는 것이 우리들의 일상 생활방식입니다.

 

 

세상은 전쟁터가 아냐

 

안타까운 점은 아직도 많은 이들이 삶을 전쟁터로 본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전쟁터로 보니까 진짜 우리 삶이 전쟁터가 되는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승리해 교사가 된 사람이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치겠습니까. 전쟁터에서 승리해 판사가 된 사람이 어떤 판결을 내리겠습니까. 전쟁터에서 승리해 돈을 많이 번 사장님이 어떻게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겠습니까.

 

평신도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은 전쟁터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섭리가 넘쳐나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하느님의 은혜를 느끼며 살아가는 평신도, 그런 평신도가 복음화시키는 세상. 바로 제가 꿈꾸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복 받은 평신도들이 됩시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4월 14일, 정치우(안드레아, 새천년복음화학교 교장)]

 

 

[평신도 영성, 나는 평신도다] (19) 한국 교회 평신도 사도직의 현주소 신앙을 통해 현실 안에서 세속적 가치 극복하기 (하)


귀에 못이 박이게 들어 무감각해진 건가

 

 

“주님은 사랑이시다.” “주님은 거룩하시다.” “주님은 늘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고 계시다.”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신다.”

 

많이 들어본 말일 것입니다. 신앙인이라면 예비신자 단계에서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을 말일 것입니다. 이런 말을 교회에서 많이 하는 것은 그 말이 참으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좋은 말도 여러 번 들으면 무감각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2000년이 지나도 힘을 잃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을 듣는 인간이 나약합니다. 그러다 보니 좋은 말씀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평범하고 나약한 일상 속에서 

 

미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레지오 마리애 회합도 늘 반복됩니다. 소공동체 모임도, 교리교육도, 강연도 반복됩니다. 이 모든 것들은 깊은 차원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평범하고 나약한 일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면 아무리 좋은 진리의 말씀이나 전례, 각종 회합이 의미가 없습니다.

 

밥을 먹는 것으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는 늘 밥을 먹습니다. 하지만 깊은 차원의 신앙에 머무는 사람에게 밥은 생명의 빵이 됩니다. 밥을 먹을 때마다 하느님 안에 머물며 감사를 체험합니다. 하지만 밥 속에 담긴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연적 차원, 본능적 차원의 삶을 사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 그리고 하느님은 늘 은총을 베풀고 우리와 함께 머무신다는 말씀이 너무 많이 들어서 식상하게 들리십니까. 그리고 의미 없게 스쳐 지나가는 말씀에 불과합니까. 그럼에도 이 말씀들은 참으로 힘이 있어서 우리가 조금만 깨어 있는다면 참 빛을 만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줄 것입니다. 이러한 거룩하고 신성한 표현들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러한 표현들이 주는 새로운 의미로의 초대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구두를 수선하는 사람은 구두를 수선하는 과정에서 성경의 의미를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꽃가게를 하는 사람은 꽃꽂이 하나를 통해 세상에 하느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이발소 주인도 마찬가지이고, 공무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 부인,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인, 기업인, 교수 등 사회의 책임을 지닌 이들은 더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같이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선, 하느님을 갈망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평신도가 주님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갈망하지 않고 자신보다 돈이 많은 사람, 권세가 높은 사람을 갈망합니다. 나 자신의 문제는 주님이 아니면 그 누구도 해결해 주지 못하십니다. 

 

뉴스를 볼 때, 또 세상의 어떤 정보를 접할 때 그것이 주님보다 더 나를 강하게 사로잡으면 안 됩니다. 내 안에 주님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으면, 세상의 그 어떤 것이 들어와도 주님의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온통 세상의 것이 지배하고 있으니까 삶에 대해 공포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사로잡고 있으면 세상살이가 전혀 힘들지 않게 됩니다.

 

 

주님의 현존이 더 중요 

 

주님보다 현실의 사건이 나를 더 사로잡고 있습니다. 현실의 삶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현실이 중요하지만, 주님의 현존은 더 중요합니다. 주님 없는 가운데 벌어지는 황당무계한 사건들에 잡혀 있으니까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삶이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많은 평신도가 지금도 자신 안에 계시는 주님을 잊고 삽니다. 안타깝습니다. 세상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건 말건, 나는 내 삶을 결정짓는 주님과 함께 살면 됩니다.

 

침묵 속에서 참기도를 한번 해 보십시오. “주님 당신은 길입니다.”“주님 당신은 평화이니다.”“주님 당신은 진리입니다.” 그러면 내가 어떤 길로 가야 할지, 어떤 평화로 가야 할지, 세상 뉴스와 사건들을 접할 때 무엇이 진리인지 알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현존을 살아갈 때, 우리 삶 안에 주님이 생생하게 살아 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복음을 세상에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이 틀 때 떠오르는 태양은 놀라운 도구가 되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한다.”(집회 43,2)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4월 21일, 정치우(안드레아, 새천년복음화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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