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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일치 순례기 붓다의 길, 예수의 길1: 붓다의 탄생지 룸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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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4-17 ㅣ No.1806

[김소일 위원의 일치 순례기 붓다의 길, 예수의 길] (1) 붓다의 탄생지 룸비니


붓다 탄생지에서 낮은 곳으로 임하신 예수님을 떠올리다

 

 

- 한국 종교 지도자들이 3월 8일 고타마 붓다 탄생지인 네팔 룸비니 마야데비 사원을 순례하고 종교 간 화합과 평화를 다짐했다.

 

 

한국 종교 지도자들이 이웃종교 체험을 위해 불교 성지순례에 나섰다. ‘2019 대한민국 종교지도자 이웃종교 체험 성지순례’는 3월 5~13일, 네팔과 인도에 있는 불교 4대 성지를 순례하는 일정으로 진행됐다. (사)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가 주관하고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했다.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를 비롯해 7대 종단의 지도자가 참가했다. 이 행사를 동행 취재한 순례기를 4회에 걸쳐 싣는다.

 

 

사순절에 순례를 떠나다

 

사순절은 특별하게 왔다. 이국땅에서 ‘재의 수요일’을 맞았다. 순례 둘째 날 네팔 카트만두였다. 머리에 재를 얹을 수 없었다. 홀로 전례의 한 구절을 몇 번 되뇌었다.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이튿날 뒤늦게 도착한 김희중 대주교님께 도움을 청했다. 당신 이마에 묻은 재를 옮겨 묻혀주셨다. 사순절에 불교 성지를 순례하며 그리스도의 죽음을 묵상하는 일은 특별한 체험이었다. 그윽한 은총으로 받아들였다.

 

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왼쪽)가 룸비니불교대학 틸락 아차르야 교무처장으로부터 불상을 선물 받고 있다.

 

 

불교는 한국인의 정신과 문화에 깊이 스며든 종교다. 우주와 인간에 관한 심오한 사유를 간직한다. 궁극의 깨달음을 강조할 뿐 유일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때문에 진리를 놓고 이웃 종교와 다투지 않는다. 과학의 발달과 새로운 지식 앞에 유연하다. 그 품은 넓고 깊다. 종교라 해도, 철학이라 해도 굳이 따지지 않는다.

 

한국 천주교와 한국 불교는 서로 존재와 가치를 존중하는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왔다. 이것은 종교다원주의나 상대주의와는 다르다. 언제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우리는 이를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한다. 한편으로 하느님의 섭리와 구원 계획은 종교와 민족을 뛰어넘는다. 동등한 피조물로서 보편적 형제애가 필요하다. 

 

불교의 4대 성지는 고타마 붓다의 탄생, 성불, 설법, 열반의 장소를 말한다. 그 현장을 순례하며 가톨릭과 불교의 만남을 생각했다. 가톨릭 신자의 시각으로 두 종교의 가르침을 묵상했다.

 

전승에 따르면 마야 부인은 무우수 가지를 잡고 붓다를 낳았다. 룸비니 마야데비 사원의 무우수 아래서 기도하는 불교 신도들.

 

 

붓다의 탄생지 룸비니에서 

 

히말라야 설산이 끝나는 곳에서 대평원이 펼쳐진다. 고타마 붓다의 탄생지 룸비니는 평원의 초입이다. 지금은 네팔 땅에 속한다. 어머니 마야 부인은 당시 풍습대로 해산을 위해 친정으로 가던 길이었다. 룸비니의 아름다움에 취해 잠시 쉬던 중 산기를 느꼈다. 전승에 따르면 나뭇가지를 잡고 선 채로 아기를 낳았다. 미래의 붓다는 길 위에서 태어난 셈이다.

 

붓다의 탄생지는 19세기에 아소카왕의 석주가 발견되면서 정확한 장소가 드러났다. 아소카왕은 인도 최초의 통일 제국을 건설한 마우리아 왕조(BC 322~BC 185)의 제3대 왕이다. 불교를 장려했던 왕은 붓다의 성지를 순례하고 석주를 남겼다. 인도의 불교 유적은 이슬람의 지배를 거치면서 파괴되거나 오랫동안 방치된 채 잊혔다. 룸비니 역시 현재 유적 발굴과 성지 조성 공사가 진행 중이다. 탄생지 위에 세워진 마야데비 사원도 최근 건축물이다.

 

구세주로 오신 아기 예수에게 가장 먼저 경배한 이들은 목동이었다. 유다 땅 베들레헴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구원자의 탄생을 알렸다. 그들은 서둘러 가서 구유에 누운 아기를 발견하고 경배했다. 가장 초라한 마구간으로 오신 분, 그분께 처음 절한 이들도 가난한 목동들이었다.

 

룸비니 마야데비 사원에 있는 조각. 마야 부인의 옆구리로 태어나는 붓다의 탄생 장면을 묘사한 출토품.

 

 

붓다는 부귀영화가 보장된 왕족의 신분으로 태어났다. 위대한 깨달음을 예고하는 전설이 따른다.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걷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쳤다. ‘독존’을 ‘홀로 고귀하다’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좁아진다. 원행 스님(조계종 총무원장)은 “근본적인 의미는 누구나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우주에서 가장 존귀하다는 선언”이라고 설명했다. 

 

실은 예수님도 임금으로 오셨다. 하느님의 아들, 만백성의 왕,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 오셨다. 그러나 그분의 나라는 이 땅에 없었다. 흥망성쇠하는 지상 왕국이 아니었다. 사랑과 정의, 진리와 생명, 은총과 평화가 넘치는 영원한 왕국이 그분의 나라였다.

 

하느님의 아들은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 영광이 아닌 핍박 속으로 오셨다. 수난과 고통 속에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다. 스스로 낮은 곳으로 임하신 그 모습을 교회는 케노시스, 즉 낮춤과 비움으로 설명한다.

 

그리스도교는 태생적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종교이다. 나라를 잃고 핍박받던 민족, 권력의 압제에 신음하는 백성들이 가장 먼저 그분을 섬겼다. 힘없고 못 배운 사람들이 그를 받아들였다. 고기 잡던 어부, 버림받은 여인들, 세리 같은 죄인들이 그분을 따랐다. 어느 작가는 ‘노예들의 종교’로 표현했다. 그렇다. 우리는 기꺼이 하느님의 종임을 선언한다. 

 

그분을 희구하며 따르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두려운 현실에 눈물짓고 슬픔과 고통으로 우는 사람들이 그분께 매달린다. 잘 나고 똑똑하고 가진 것 많은 사람은 애써 그분을 찾지 않는다. 그리스도교는 가장 낮은 곳에서 피어나는 종교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낮고 낮은 곳에서 서로 만난다. 붓다 또한 끝내는 왕궁의 화려함을 마다하고 출가를 택했다. 스스로 낮춤과 비움을 택했다. 모든 것을 버리고 홀로 길 위로 나섰다. 깨달음을 향한 고난의 길, 진리를 찾는 위대한 구도의 길이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4월 9일, 네팔=김소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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