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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해박해 공개강좌: 앵베르 주교의 1839년 조선의 서울 박해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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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3-31 ㅣ No.1014

[기해박해 180주년 한국교회사연구소 '사료로 보는 기해박해' 공개강좌] 제1강 앵베르 주교의 「1839년 조선의 서울 박해 보고서」


180년 전 조선에서 일어난 ‘피의 순교사’ 일지로 기록

 

 

한국교회사연구소 공개대학에서 이석원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이 앵베르 주교의 「1839년 조선의 서울 박해 보고서」를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은 기해박해 180주년을 기념해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조한건 신부) ‘사료로 보는 기해박해’ 공개대학 강좌를 지상 중계한다. 한국교회사연구소는 21일부터 매주 목요일 오후 7시 서울 가톨릭평화방송 10층 성당에서 공개대학을 열고 있다. 이번 호에는 제1강으로 이석원(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이 발표한 ‘앵베르 주교의 「1839년 조선의 서울 박해 보고서」’를 소개한다.

 

 

작성 과정

 

1839년 4월 7일 부활 제2주일인 이날 해 질 무렵 서울에 대대적인 박해가 터져 공소 회장들을 비롯한 수십 명의 신자가 체포됐다. 1838년 말부터 몇 명의 신자가 잡혔지만 박해가 났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그런데 4월 18일 조정은 공식적으로 천주교 금압 명령을 내리고 신자들을 체포했으며 5월 24일 처음으로 신자 9명을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처형했다.

 

제2대 조선대목구장으로 1837년 12월 18일 조선에 입국해 그달 31일 서울에 도착한 앵베르 주교는 1838년 말부터 박해의 조짐이 보이자 박해의 사정과 순교자의 치명 과정을 일지 형식으로 기록했다. 이는 나중에 순교자 현양과 시복시성을 위한 기본 자료로 삼으려는 것으로 「1839년 조선의 서울 박해 보고서」라는 제목으로 작성됐다.

 

앵베르 주교가 1839년 8월 7일까지 쓴 이 보고서는 충청도에 피신해 있던 모방과 샤스탕 두 신부에게 전달됐고, 이들 두 신부는 앵베르 주교의 지시에 따라 자수하러 갈 때 조선 신자들에게 맡겼다. 조선 밀사 김프란치스코는 1842년 12월 북경으로 가다 압록강 변문에서 당시 신학생이던 김대건 신부를 만나 이를 넘겼고, 만주대목구장 베롤 주교를 거쳐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보내졌다. 

 

앵베르 주교는 1839년 8월 11일 자수를 하기 전 조선 신자들에게 순교자에 대한 기록 작성을 부탁했고, 현경련, 최영수, 현석문 등에 의해 「기해일기」로 완성됐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기해박해 순교자 70위가 시성될 수 있었다.

 

- 앵베르 주교.

 

 

기해박해에 관한 앵베르 주교의 이해 

 

앵베르 주교의 「1839년 조선의 서울 박해 보고서」는 박해가 끝난 후 순교자별로 수집 정리된 다른 자료들과 달리 그가 직접 보고 들은 박해의 현장을 매일 기록한 일지이다. 보고서에는 앵베르 주교의 눈에 비친 조선 신자들의 모습이 가감 없이 그려지고 있다. 주교는 감탄할 만큼 굳은 신심을 보여주는 신자가 있지만 혹독한 박해 속에서 배교를 선택해 마음을 아프게 한 신자들도 있다고 했다. 

 

앵베르 주교는 박해 시기에 신자들이 대거 검거되는 사태의 원인을 신자들의 ‘부주의한 행동’과 배교자들의 ‘밀고’가 한몫했다고 진단한다. 선교사의 숙소였던 주막집에 포졸이 닥친 1839년 4월 7일 사건 경우는 성실하지 못한 예비신자가 포졸들에게 교회에 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폭로하고 53명의 신자 명단을 건네주면서 더욱 커졌다. 또, 남명혁 집에 많은 신자가 한꺼번에 몰려 포졸들에게 발각될 수밖에 없었고, 앵베르 주교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제의와 주교관을 숨기지 않아 외국인 선교 사제의 존재를 드러내게 됐다.

 

앵베르 주교는 박해를 주도하는 조정의 입장이 처형보다 ‘배교’에 치중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앵베르 주교의 판단대로 당시 집권자들은 처형이 오히려 신자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라며 공식적인 심문 과정에서 가해지는 형벌 외에 다양한 방법으로 배교를 강요했다. 그 결과 감옥에 갇힌 신자들은 더욱 큰 고통을 당했다. 

 

이에 앵베르 주교는 서울에서 빠져나온 6월 3일까지 포도청에 갇힌 신자들을 직접 도왔다. 감옥에 갇힌 신자들은 매일 600냥을 원조금으로 받았다. 이 돈은 조신철의 집에 숨겨둔 조선대목구 소유의 용품을 팔아서 장만한 것이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3월 31일, 리길재 기자]

 

 

기해일기를 아십니까


순교자 시복시성에 없어선 안 될 사료

 

 

한국교회사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활판 「기해일기」초간본.

 

 

“「기해일기」를 아십니까?”

 

「기해일기」는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 증언록이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치명한 순교자 78명의 이야기를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기술해 놓았다. 그중 70명이 1925년 복자품에 올랐고, 1984년 시성됐다. 이처럼 「기해일기」는 재판에 가장 중요한 기초 사료가 됐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만큼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의의와 가치를 지닌다.

 

「기해일기」는 1846년 병오박해 때 순교한 현석문(가롤로)이 편찬했다. 하지만 그 작업은 이미 조선에 들어와 활동하던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에 의해 시작됐다. 1838년 말부터 박해의 조짐이 보이자 앵베르 주교는 순교자들의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일지 형태로 기록해 「1839년 조선의 서울 박해 보고서」라 이름 붙였다. 

 

앵베르 주교는 자신도 체포될 것을 예상하고 순교자들의 행적을 자세히 조사해 계속 작성하도록 당부했다. 이에 현석문은 이승훈(베드로)의 손자 이재의(토마스) 등의 도움을 받아 3년에 걸쳐 「기해일기」를 완성했다. 「기해일기」는 대체로 서두에 순교자의 내력을 간단히 밝힌 다음 입교 동기와 신앙생활, 박해를 당한 뒤 붙잡혀 모진 형벌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증거하다 순교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조선에 입국한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는 기해박해 순교자 73명의 행적과 김대건 신부 등 병오박해 순교자 9명의 행적을 보완해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작성했고, 이를 최양업 부제와 매스트르 신부가 1847년 라틴말로 번역해 파리외방전교회를 거쳐 교황청 예부성성(현 시성성)에 제출했다.

 

현석문이 수집 정리한 「기해일기」 원본은 박해가 지속되면서 사라지고 만다. 다행히 그 사본이 전해져오다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가 1904년 전후로 우연히 한글로 된 「기해일기」 한 권을 입수한다. 뮈텔 주교는 이듬해인 1905년 이를 활판으로 출간했다. 

 

「기해일기」는 믿는 이들의 언어로 쓰인 믿는 이들의 책이다. 그렇기에 「기해일기」는 후대의 신앙인들에게 믿음의 마음, 믿음의 눈을 열어주는 길잡이가 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3월 31일, 윤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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