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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3·1운동 100주년 기념 좌담: 그곳에 가톨릭교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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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2-18 ㅣ No.1008

3·1운동 100주년 기념 좌담 ‘그곳에 가톨릭교회도 있었다!’


독립운동에 투신한 평신도 활약상 재조명돼야

 

 

올해로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며 전 세계에 한국의 독립을 알린 3·1운동 100주년을 맞는다. 이에 본지는 주교회의 홍보국장 안봉환 신부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조광 교수를 초대해 3·1운동과 가톨릭교회의 관계를 조명하는 좌담을 마련했다. 이번 좌담을 통해 당시 조선교회가 3·1운동에 적극적이지 못했던 이유를 알리고, 이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교계의 반대에도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조선교회 신자들의 활약상, 향후 교회의 대사회 활동 방안을 들어봤다.

 

· 일시: 2019년 2월 9일 

· 장소: 서울 중곡동 주교회의 홍보국장 집무실

· 참석자: 안봉환 신부, 조광 교수 

· 사회: 최용택 취재2팀장

 

 

- 조광 교수(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 최용택 팀장(이하 최 팀장): 일제 강점기에 한국천주교회가 민족적 인식이 부족하고 독립운동에 소극적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입니다. 3·1운동 100 주년을 맞아서 이와 관련한 역사적인 평가를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과연 한국천주교회는 일제 강점기의 민족사 문제와 관련해서 어떻게 평가를 받아야 할지요?

 

▲ 조광 교수(이하 조 교수): 평가에 앞서 3·1운동이 무엇인지 개념을 짚고 가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3·1운동은 1919년 2~5월 한반도 거의 모든 곳과 당시 조선인이 살고 있던 외국의 거의 모든 곳에서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강점한 일에 대해 저항하며 일어난 독립운동이었습니다.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벌어진 독립운동을 당시 일어났던 일련의 운동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봤기 때문에 3·1운동이라고 불렀습니다.

 

일본의 공식통계에는 50만 명 정도가 3·1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최근 국사편찬위원회가 당시 일본 육군, 검찰, 각종 기관의 문서를 검토해보니 참여인원이 100여 만 명으로 종합됐습니다. 일본이 운동의 규모를 축소시켜 발표한 것입니다. 

100여 만 명이면 당시 조선 인구의 6% 이상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수만 명에 이르는 천주교 신자가 빠졌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 최 팀장: ‘소극적이었다’는 전제에 오류가 있었다는 것이군요. 그럼에도 한국교회의 지도층이 이 정당한 독립운동을 반대했던 일도 있어 안타깝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고, 어떻게 반성을 해야 할까요?

 

▲ 안봉환 신부(이하 안 신부): 한국교회는 창립 초기부터 거의 100년간 계속된 엄청난 박해를 겪어왔습니다. 거의 한 세기 동안 모진 박해를 체험한 조선교회는 1906년 정교분리원칙을 공표했습니다. 근본취지는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의 간섭을 배제한다는 것입니다만, 현실적인 민족의 아픔을 외면하게 됐습니다.

 

또 당시 조선교회에 온 선교사들은 프랑스, 독일, 미국, 아일랜드 등 제국주의 국가에서 왔습니다. 이런 영향으로(당시 외국 선교사로 이뤄진 조선교회) 주교들은 일본을 조선의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했습니다. 그렇기에 독립운동을 반정부운동으로 단정했던 것입니다.

 

한편으로 그들이 그런 정책을 편 것은 이 땅에 교회를 존속시키고 선교의 자유를 보존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을 것입니다. 민족의 운명보다는 교회의 운명이 더 중요했다고 판단했다고 봅니다.

 

사실 교회는 지난 삼천년기를 시작하면서 이에 대해 반성을 했습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발전하고 성장하면서도 한국사회 속에서 참된 삶과 복음의 표지가 되지 못했던 점을 반성했던 것입니다. 특히 박해를 받는 동안에 애국 애족을 위한 우리의 의식과 처신이 적절하지 못하였으며, 민족의 수난기에는 자주독립과 해방을 위한 노력에 크게 동참하지 못했음을 반성하는 문서를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더 이 부분에 대해 반성을 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 안봉환 신부(주교회의 홍보국장).

 

 

- 최 팀장: 이러한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가 독립운동에 나선 역사적인 기록이나 흔적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그리고 그러한 움직임들이 한국교회 모습의 일부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요?

 

▲ 안 신부: 교회 지도자들의 제재 속에서도 많은 평신도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모습, 민족애에 따라 활동했던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존재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여러 문건에서 많은 천주교인들이 독립운동에 나선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서상돈(아우구스티노)의 국채보상운동, 안중근(토마스)의 의거와 동양평화론, 안명근(야고보)과 105인 사건, 북간도의 교우촌 ‘용정촌’의 3·13 만세운동,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와 서울 예수성심신학교 신학생들의 만세운동 참여 등의 사례들이 그렇습니다.

 

▲ 조 교수: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도 기미독립운동에 당연히 참여했습니다. 

 

우리는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만을 독립선언서로 생각하는데, 독립운동은 3월 1일 서울에서 전국으로 번져나간 것이 아니라 전국과 외국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난 운동입니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독립선언서가 200여 개가 나옵니다. 민족대표 33인에 천주교 신자가 없다고 해서 천주교가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이해입니다.

 

예를 들어 2·1 대한독립선언서에는 39명이 서명하는데 안정근(치릴로) 등도 대표로 서명하고 참여했습니다. 안중근의 형제·가족들도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방우룡을 비롯한 천주교 신자들은 ‘의민단’을 조직해 무장독립운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교회 지도층의 판단력과 식별력에 한계가 있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피라미드적 교회관에서 하느님 백성의 교회라는 개념으로 교회관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백성의 일원이었던 신자들이 그리스도교적 양심에 따라 억압에 저항하려한 독립운동 역시 교회사적인 의미를 인정받아야 합니다.

 

- 최 팀장: 한국 근현대사 안에서 한국 천주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지금까지 다양한 방향으로 연구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 겸허하고 솔직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와 앞으로의 과제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지요?

 

▲ 조 교수: 우리나라의 교회사는 박해시대의 교회사가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선지 일제강점기의 교회사연구는 상당히 저조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교회는 자신의 방조행위를 참회했습니다. 프랑스교회 고위성직자들도 독일의 침략에 협조했다고 호된 비판을 받았고, 이 비판이 현대 사회 안에서 독일·프랑스 교회가 바로설 수 있는 기반이 됐습니다. 우리도 지난 역사에 대해 더 철저히 분석하고 반성할 때 우리 미래사도 밝은 길을 걸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교회는 고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사회와의 관계 안에서 복음화를 진전시켜나갑니다. 앞으로의 교회사 연구자들이 바로 이런 시각에서 식민지시대 교회상을 검토해 주시길 바랍니다.

 

▲ 안 신부: 그동안 일제강점기 교회사에 관한 연구가 부족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번에 주교회의 평신도기금운영위원회(명도회 장학금)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한국교회가 개인적,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례들을 발굴해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 기반을 확대하고자 올해 10월까지 연구 논문을 공모하고 있습니다. 연구 결과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독립운동에 관련된 한국 천주교회의 공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연구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근현대사에 대한 연구도 매우 중요하게 보고 많은 학자들이 연구를 해야할 것으로 보입니다. 교회도 학자들이 연구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안을 찾아 지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조광 교수(왼쪽)와 주교회의 홍보국장 안봉환 신부(가운데)가 3·1운동 100주년 기념 ‘그곳에 가톨릭교회도 있었다’를 주제로 열린 좌담에 참여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좌담은 본지 최용택 취재2팀장이 진행했다. 사진 박원희 기자.

 

 

- 최 팀장: 한국교회는 해방 이후, 특히 1970~80년대 민주화운동 등 사회참여를 통해 사회의 신뢰를 확고히 구축하고 교세를 확장시켰습니다. 이는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워 3·1운동 등 독립운동에 소극적이고 오히려 일제에 동조해 복음화율이 저조했던 지난 일제 강점기와는 대조됩니다. 공동선을 위한 사회참여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세계관과도 맞닿고 있는데요, 향후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에서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떤 활동을 해야 할까요? 

 

▲ 안 신부: 정치와 종교는 따로 떼어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선은 정치 공동체 안에서 가장 완전하게 실현됩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910항) 신앙인은 불의에 항거를 해야 하고 그것이 부당한 정치권력일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도 정치적으로 고발당한 것입니다. 교회는 그 임무와 권한으로 보아 어느 모로도 정치 공동체와 혼동될 수 없으며, 결코 어떠한 정치 체제에도 얽매이지 않습니다.

 

▲ 조 교수: 정치와 종교는 지향하는 바에 있어 서로 중첩되고 있는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신자들에게 정교분리가 아니라 정교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강화시켜줘야 합니다.

 

다행히도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은 우리나라 교회와 사회에서 사회와 문화를 복음화시켜 나가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사회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은 신자수의 증가에도 있지만, 그것 못지않게 사회나 문화에 복음적 가치를 투영해 사람들이 복음 정신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 최 팀장: 마지막으로 3·1운동 관련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며, 한국교회에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 안 신부: 교회는 교회 지도자들의 침묵과 제재 속에서도 개인의 양심과 정의에 따라 독립운동에 참여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역할을 다했던 많은 신앙인들을 기억합니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는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민족의 평화와 통일입니다. 해방과 더불어 닥쳐온 한반도의 분단, 뒤이은 동족 간의 전쟁과 오랜 갈등 속에서도 우리는 대화와 만남을 위한 오랜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서로의 다름이 차별과 배척이 아니라 대화의 출발점이 되는 세상, 전쟁의 부재를 넘어 진정한 참회와 용서로써 화해를 이루는 세상을 이룩하고자 노력할 때, 우리는 참으로 3·1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조 교수: 그리스도교적 가치, 가톨릭적 가치가 올바르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면 민족의 복음화뿐만 아니라 인류의 복음화 문제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하는 교회가 돼야합니다. 한국은 식민지의 고통을 딛고 일어선 나라이며, 민주화와 산업화를 성취한 국가입니다. 한국교회는 선진국으로 성장해 이제 제3세계뿐만 아니라 제1세계도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런 경험을 살려 해외의 비복음적 질서를 바로잡는 데에 일정한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9년 2월 17일, 정리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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