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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교회사 속 여성 - 여명(정조 시기): 강완숙과 그 동료들의 숨죽인 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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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1-20 ㅣ No.1006

[한국 교회사 속 여성 - 여명(정조 시기)] 강완숙과 그 동료들의 숨죽인 함성

 

 

근대정신으로의 ‘댓돌’

 

우리나라 여학생의 대학 진학률은 2016년 73.5%였다. 남학생의 진학률보다 높다. 그리고 오늘날 본당 총회장 가운데 여성의 비율도 높다. 그런데 교회가 시작될 무렵 조선 사회는 달랐다. 남녀의 역할 규정이 매우 다른 사회였다.

 

그래서 조선 왕조 말에 우리나라에 왔던 외국인들은 한결같이 조선 여인의 처지에 주목했다. 그들은 ‘조선 여인은 소보다 더 유용한 존재’이며, ‘조선 남정네는 아내와 결혼하고 첩과 사랑을 나눈다.’라고 했다.

 

여성들이 제 주견과 고유한 사유 방법을 갖기 힘든 사회였다. 심지어 이름조차 없어서 여자가 심문받을 때는 수령이 공판의 편의상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 직권으로 그 여자에게 이름을 붙여 주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큰 변화의 정점을 향해 추적해 들어가면 그 중심에서 잡히는 인물들이 있다. 바로 조선 유교 사회에서 복음을 실천한 천주교인들이다. 곧 근대 사상의 씨앗은 천주교 신자들이 전통 사회와 부딪치면서부터 배태되었고, 여성 생활의 변화는 그때 이미 예고되었다. 그래서 여성들은 천주교에 열광했다.

 

 

강완숙, 시댁 연고로 천주교와 만나다

 

조선 사회에서 천주교는 여성에게 사회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했다. 조선에 교회가 처음 서던 정조 시절에 정순 왕후(1745-1805년), 김만덕(1739-1812년), 강완숙(1760-1801년) 등이 이름을 기록한 여성들이다.

 

정순 왕후는 열다섯 살에 예순이 된 영조의 계비가 되어 궁궐의 핵심이 되었다. 김만덕은 자신의 신분을 속량하고, 제주도에 가뭄이 들었을 때 사비를 털어 도민을 구제했다. 그리고 강완숙은 한국 사회 최초로 여성 신앙 공동체를 만들고 교회가 이 땅에 뿌리내리는 일에 동참했다. 세 사람 가운데 당대 가장 낯설고 새로운 의지를 보인 여성은 강완숙이다. 아울러 그녀의 뒤를 따르는 여성들이 줄을 이었다.

 

1784년 조선 왕조 내에 천주교회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조선에서 맨 처음 천주교를 받아들인 여성이 누구인지, 어떤 경로로 천주교를 접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여성은 남편이나 친척 등 남성을 통해 천주교를 알게 된 것 같다. 그러면서도 초기 교회 지도자들의 부인이 아닌 강완숙이 당시 여성들의 새 생활을 개척해 나갔다. 이벽의 부인 권씨의 「언행실록」이 언급되나 이는 그 진위가 분명하지 않다.

 

그물코 하나를 꿰어서 그물 전체를 들어 올린다는 말이 있는데, 강완숙은 1801년 신유박해 당시까지 조선 신자 전체를 꿰는 벼리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물론 영·정조 시대에는 이미 일부 양반 특권층 여성이 글을 짓고, 자신의 저술을 엮어 냈다. 또한 직접 상설 점포를 운영하는 여인, 과거를 준비하는 남편을 위해 경제를 담당한 여인이 적잖이 나타났다. 곧 정신적 전환의 계기만 주어진다면 커다란 변화가 일어날 수 있던 때였다. 강완숙은 이때 ‘말씀’과 접할 행운을 얻었다.

 

강완숙은 열여덟 살이 되던 해 충남 예산의 덕산 고을에 사는 홍지영의 후처로 시집갔다. 이때 그는 전처의 열 살 된 아들도 얻게 되었는데, 아들은 평생 그의 충실한 협조자가 되었다. 자신에게서는 딸을 한 명 두었다.

 

강완숙은 홍낙민이라는 시가 친척에게서 천주교를 알게 되었다. 강완숙은 어려서부터 삶의 진리에 대해 갈망했다. 그는 남장을 하고 사찰로 출가하러 가기도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천주’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바로 이것이 진리라고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깨달은 말씀을 곧바로 시모와 가족을 비롯하여 이웃에게 전파했다. 강완숙이 갔던 절은 나중에 남연군의 묘가 된 덕산의 가야사이다.

 

 

교회와 신자의 중간 역할로 서다

 

교회 여성사에서 충청도 덕산은 요람과 같은 곳이다. 1791년 윤지충과 권상연의 제사 거부로 일어난 신해박해 무렵 충청도 관찰사는 박종악이었다. 그는 정조의 고모인 화녕 옹주의 시댁 조카였다.

 

관찰사는 충청도 일대에 천주교가 만연했다며, 이를테면 예산과 천안에 걸친 호동리의 경우 100여 호 가운데 물들지 않은 가정은 20여 호 뿐이라고 정조 임금에게 보고했다. 이곳에서는 마을 공동 제사를 폐지한 지가 여섯 해나 되었다고도 했다. 교회가 선 지 겨우 일곱 해에 접어든 때였다. 이 지역이 급속하게 복음화되는 데는 홍낙민과 이존창의 공이 컸다.

 

강완숙의 집안을 세심히 살핀 관찰사는 이렇게 밝혔다. “이 무리들은 서로 ‘교중’이라 부르며 노비와 주인, 존비, 친소의 구분이 없다. 남자만 그런 것이 아니다. 양반가의 규수는 언문으로 풀이하여 읽고, 상천의 어리석은 부녀자는 입으로 전해 외운다. 가령 길가는 사람이 제 입으로 그 학문을 하는 자라고 하면 주소, 성명도 묻지 않고, 양반인지 상한인지 따지지 않고 모두 안방에서 만나 보기를 허락하며 중요한 손님처럼 공경하고 가까운 친척처럼 아낀다. 거처와 음식도 달건 쓰건 함께하는데, 떠날 때는 반드시 노자를 준다.”

 

이 보고는 칭찬이 아니라 이상한 현상에 대한 지적이다. 그러나 이는 조선의 철저한 신분 사회에서 관습을 뛰어넘은 형제애에 대한 증언이다.

 

한편, 홍지영은 공초(조선 시대에 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하던 일 - 편집자 주)에서 자기는 당초 서양학에 뜻을 두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므로 당대 파격적인 이 생활은 강완숙의 주도였다. 단 한 번도 선교사나 실제 교회의 존재를 본 적이 없는 시골 여성이 교회 창설 직후 줄곧 금지되던 가르침을 철저히 실천했다.

 

1791년을 앞뒤로 충청도에서는 많은 신자가 색출되어 체포당했다. 관찰사는 입으로만 배교하는 자를 금방 구별해낼 수 있다고 했다. “사학을 하는 자는 무당이나 박수를 쓰지도 않고 기도나 축원을 하지도 않으며 투전과 윷놀이도 하지 않고, 또 농담이나 욕설도 하지 않는다.”

 

이런 모범적인 마을에서 당시 엄청난 양의 책이 소각되었다. 그야말로 책으로 배우는 교회의 수난이었다. 강완숙은 이때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갔다. 그의 시어머니와 자녀도 그의 뒤를 따랐다.

 

강완숙은 서울에 도착한 뒤 십 년 간 교회가 조선에 뿌리를 내리는 데 필요한 봉사와 전교 생활에 전념한다. 강완숙이 강론으로 다른 이들을 분발시키는 것은 마치 종을 치면 종소리가 잇따르는 것 같았고, 사랑으로 남을 이끌면 마치 땔나무에 불을 지피는 것과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모든 일을 혼자서 하지 않고 여성들을 동지로 모아 여성공동체를 형성하고 함께 일했다. 동시에 그는 남성들과도 동료로서 의지했고, 나아가 교회의 중요한 업무를 남녀의 적성에 맞추어 나누고 도왔다. 조선사회에서 함께 일하는 ‘남녀 관계’를 이룩했다. 실제로 함께 일한 남녀 동료는 각각 20여 명에 이른다. 교회는 1만 명 시대에 도달한다.

 

*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 영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이며 대구 문화재 위원과 경북여성개발정책연구원 인사위원을 맡고 있다. 수원교구 시복시성위원회 위원이며 안동교회사연구소 객임 연구원이다. 한국가톨릭아카데미 겸임 교수를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9년 1월호,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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