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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심리학이 만난 영화: 학습된 무기력 - 내 깡패 같은 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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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5-22 ㅣ No.836

[심리학이 만난 영화] 학습된 무기력, 내 깡패 같은 애인

 

 

“그래도 우리나라 백수 애들은 착혀. 거 테레비에서 보니까 그 프랑스 백수 애들은 일자리 달라고 다 때려 부수고 개지랄을 떨던데. 우리나라 백수들은 다 지 탓인 줄 알아요. 응? 지가 못나서 그런 줄 알고. 아유, 새끼들 착한 건지 멍청한 건지. 다 정부가 잘못해서 그런 건데. 야, 너도 너 욕하고 그러지 마. 취직 안 된다고. 응? 니 탓이 아니니까. 당당하게 살어. 힘내!”

 

김광식 감독의 2010년 작 ‘내 깡패 같은 애인’의 삼류 깡패 동철(박중훈). 그는 업계에서는 퇴물이 된 지 오래다. 깡패인데도 일반인과 싸워서 터지기 일쑤다. 그의 삶에서는 ‘열심’이나 ‘성실’을 찾아보기도 힘들다. 그런 그가, 노력하면 결국에는 이루어진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인생을 살지만 아직 취직하지 못한 ‘옆집 여자’ 세진(정유미)에게 위로랍시고 건넨 말이다.

 

 

내부 귀인 대 외부 귀인

 

과연 세진이 취직하지 못한 이유는 그가 못났기 때문일까, 아니면 정부가 잘못했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그 사건의 원인은 무엇인지 추론한다. 이를 ‘귀인’(歸因)이라고 한다. 원인을 어디로 돌릴지 판단하는 과정이다.

 

사람들이 귀인을 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능력이나 노력과 같은 개인의 내적 요인에서 원인을 찾는 것이다(내부 귀인). 다른 하나는 상황이나 환경과 같은 개인 외부의 요인에서 원인을 찾는 것이다(외부 귀인).

 

이를테면, 축구 대표 팀이 경기에서 패한 이유를 선수들의 실력 부족으로 생각하는 것은 대표 팀의 실패를 내부 귀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심판의 불공정한 판정 때문에 경기에서 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심판이라는 외부 요인에 실패를 귀인하는 것이다.

 

 

문화와 귀인 양식

 

귀인에 대한 연구 결과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바로 동철이의 주장처럼 귀인 방식이 국가나 문화에 따라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다. 한국과 중국, 일본처럼 집단주의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일어난 긍정적 사건을 외부 귀인하는 경향이 강하다. 미용실 원장님 덕분에 미스 코리아 ‘진’에 뽑힐 수 있었다고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은 집단주의 문화에서 전형적으로 관찰되는 외부 귀인이다.

 

반대로 자신에게 일어난 부정적 사건은 자기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내부 귀인하는 경향이 강하다. 동철이의 말처럼 취직하지 못하는 것이 자신의 능력 또는 노력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 등 개인주의 문화권의 귀인 방식은 집단주의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과는 정반대다. 자신에게 일어난 긍정적 사건은 내부 귀인하는 경향이 강하다. 서양의 올림픽 메달 수령자들의 인터뷰를 들어 보면 주로 자신이 올림픽을 위해서 얼마나 강도 높은 훈련을 소화했는지를 설명한다.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노력과 실력이 메달 획득의 주된 요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패의 원인은 외부에서 찾는 경향이 강하다. 자신의 삶이 곤경에 빠진 이유가 정부 정책의 실패나 세계의 경기불황과 같은 상황적 요인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나라는 집단주의 문화권에 속하기에 자신의 성공은 외부 귀인하고, 실패는 내부 귀인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데 부정적 결과를 지속적으로 내부 귀인하도록 요구하는 문화는 치명적 결과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학습된 무기력

 

우리에 갇힌 강아지 한 마리를 생각해 보자. 우리의 한가운데를 칸막이로 막아서 둘로 나누었지만 마음만 먹으면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쉽게 뛰어넘어 갈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그 바닥에는 전기 충격장치가 설치되어 있어서 둘 중 어느 한쪽에 강한 전류를 흐르게 할 수 있다.

 

한쪽에서 평화로이 있는 강아지 쪽에 강한 전기 충격을 주면, 놀란 강아지는 바로 칸막이를 뛰어넘어 다른 쪽으로 이동한다. 문제는 강아지가 칸막이를 뛰어넘을 수 없도록 줄로 묶어 놓을 때 발생한다. 줄에 묶인 상태에서 전기 충격을 주면, 처음에는 줄 때문에 칸막이를 뛰어넘을 수 없는 데도 칸막이를 뛰어넘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칸막이를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더 이상 이를 넘으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비극은 바로 이 순간부터 시작된다. 장애물을 뛰어넘으려는 노력이 헛수고라는 것이 뚜렷해지면, 더 이상 전기 충격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 마치 모든 것을 체념하고 전기 충격을 담담히 견디겠다고 결심한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배를 깔고 엎드린 채로 전기 충격이 주어질 때마다 가끔 움찔거릴 뿐 일어서려고도 하지 않는다.

 

만일 이때 줄을 풀어 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놀라운 것은,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칸막이를 뛰어넘어 전기 충격이 없는 안전한 곳으로 탈출할 수 있는 데도 그런 시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강아지는 지속적인 좌절을 통해서 자신이 칸막이를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 자기 때문이라고 믿게 된 것이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서 전기 충격으로부터 탈출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줄이 풀어져도 탈출을 시도하지 않는다. 지속적인 좌절을 통해 무기력을 학습하게 된 것이다. 

 

긍정 심리학의 창시자 마틴 셀리그만은 학습된 무기력에 관한 연구에서 사람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삶을 포기하게 되는지를 보여 준다. 사람도 자신의 삶을 제 뜻과 노력에 따라서 통제할 수 없다는 무기력을 학습하게 되면, 우울에 빠지게 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우울은 청년 자살의 가장 주요한 원인으로 꼽히는 심리적 증상이다.

 

 

청년 자살

 

우리나라에서 한 해 동안 자살하는 사람은 1만 5천 명이 넘는다. 2003년 이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자살 사망률 부문에서 계속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자살은 20대의 사망 원인 가운데 40% 이상을 차지하고, 30대도 가장 많은 사망 원인이다. 이들의 주요 자살 동기는 염세나 비관이다. 도대체 무엇이 20-30대의 청년들을 염세와 비관으로 몰아가는 것일까?

 

‘내 깡패 같은 애인’의 세진은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공정한 사회’에 대한 믿음을 가진 청년이다. 실제로 그녀는 능력과 노력 면에서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녀에게 면접을 제대로 볼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그녀가 여성이라는 것과 이력서에 적힌 출신 대학이 서울 이외의 지역에 위치한다는 것 때문에 면접관들은 그녀에게 직무와 관련된 질문을 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수 손담비의 ‘토요일 밤에를 춤추며 불러 보라고 해 놓고 키득거린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취업 원서를 낸다는 것은 한 번 더 좌절을 맛보기로 결심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상황은 개선의 여지없이 번번이 거듭되기만 한다.

 

이런 조건에서 실패를 외부 요인이 아닌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 부족과 같은 내적 요인에 귀인하는 것은 자존감을 고갈시키고 수치심을 증가시킨다. 수치심은 우울과 자살을 증가시키는 주요 감정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세진과 같은 상황에서 실패에 대한 내부 귀인은 자기 파괴의 안내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청년 자살의 원인은 매우 다양하지만, 청년들이 자신의 실패를 개인의 무능과 노력 부족에 내적 귀인하도록 유도하는 문화도 청년 자살이 급증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내 탓이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태도는 존경할 만하지만, 가끔은 스스로에게 “너는 잘못이 없다.”고 다독여 줄 필요도 있다. 개인의 노력이 너무나도 쉽게 좌절되는 시절에는 삼류 깡패 동철의 귀인 방식이 삶의 끈을 놓지 않는 힘을 주기도 한다.

 

* 전우영 - 충남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무료 온라인 공개강좌 서비스인 케이무크(K-MOOC)에서 일반인들을 위해 쉽게 디자인한 ‘심리학 START’를 강의하고 있다. 「나를 움직이는 무의식 프라이밍」, 「내 마음도 몰라주는 당신, 이유는 내 행동에 있다」 등을 펴냈다.

 

[경향잡지, 2018년 5월호, 전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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