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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주님의 기도와 교부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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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5-22 ㅣ No.1166

[주님의 기도와 교부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주님의 기도 첫째 청원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염원은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게 되는 것’이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가장 소중한 하느님의 이름을 알려 주셨다.

 

“이름은 다만 신뢰하고 절친한 사람에게만 알려 주는 법이다. ‘하느님의 이름은 거룩하시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한다. 인간은 사랑이 넘치는 흠숭의 정으로 침묵 가운데 하느님의 이름을 상기해야 한다. 인간은 오직 하느님을 찬미하고, 찬양하고, 찬송하기 위해서가 아니면, 자신이 하는 말 중에 하느님의 이름이 오르내리게 하지 말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143항).

 

그리스도를 믿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 바르지 못한 생활로 교회의 이름에 욕을 먹이거나, 하느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경우는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다. 에제키엘 예언서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이스라엘 집안이 자기 땅에 살 때, 그들은 자기들이 걸어온 길과 행실로 그 땅을 부정하게 만들었다. … 이렇게 그들은 가는 곳마다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다. 그래서 나는 이스라엘 집안이 민족들 사이로 흩어져 가 거기에서 더럽힌 나의 이름을 걱정하게 되었다. … 나는 민족들 사이에서 더럽혀진, 곧 너희가 그들 사이에서 더럽힌 내 큰 이름의 거룩함을 드러내겠다”(36,17-23).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는 신자들의 합당한 생활을 통하여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드러나게 되는 사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이사 6,3; 묵시 4,8)하며 세라핌 천사들도 찬미했듯이,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기를 바라는 기도는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고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통합니다. 그러므로 ‘거룩히 드러내시며’는 ‘찬미 받으시며’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말하자면, ‘우리가 순수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시어, 모든 사람이 우리를 보고 당신을 찬미하게 하십시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우리를 보는 모든 이가 주님께 찬미를 바치게 할 만큼 우리가 흠 없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성숙함과 자제를 새삼 지시하는 말씀입니다”(「마태오 복음 강해」, 19,4).

 

하느님께서 친히 당신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니, 엄밀히 말해서 인간의 동참 없이도 하느님의 이름 현양은 이루어진다. 이 사실을 「미사 경본」 네 번째 감사송 안에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한다.

 

“저희 찬미가 아버지께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으나, 저희에게는 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도움이 되나이다”(연중 평일 감사송). 오히려 하느님은 당신 이름을 인간에게 드러내 주신 것이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의 이름을 대할 때 조심스럽게 임할 것을 가르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로 거룩해지시는 분이 아니다. 치프리아노 교부의 가르침을 들어 보자.

 

“우리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하고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로 거룩해지시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이름이 우리 안에서 거룩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비할 데 없이 거룩한 분이신데, 그분께서 누구에 의해 거룩해지시겠습니까?

 

세례로 거룩하게 된 우리가, 그렇게 내디딘 길을 계속 갈 수 있도록 청하고 간청하는 까닭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1베드 1,16; 참조: 레위 20,7)고 이르시기 때문입니다”(「주님의 기도 해설」, 12).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특권을 받은 우리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받은 사실을 바오로 사도가 전한 것에 대해 오리게네스 교부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오시면,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기 바라는 사람들이 그 자격을 얻습니다. 바오로는 그것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기도론」, 22,2).

 

우리는 이 특권을 소중히 보존해야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 이전에는 성당 밖 공공장소에서는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자녀 사이의 관계가 함부로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강조하였다. 예컨대 외인이 많은 장소, 상가에서나 장례식장에서 세상을 떠난 이를 위한 연도를 바칠 때 신자들이 주님의 기도 첫 마디와 마지막 마디만을 소리 내어 바치고 그 외 부분은 비밀 규칙으로 묶어 조용히 침묵 속에 기도드리게끔 한 지침이 그런 이유에서였다.

 

주님의 이름이 그 자리에 모인 많은 외인으로 말미암아 속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에 따른 것이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이 비밀 규칙이 풀려서 누구나 주님의 기도 내용을 알고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나, 주님의 이름에 대한 존중심은 늘 우리가 보존해야 할 보물이다.

 

 

아버지 이름의 남용

 

예전에 ‘아버지’라는 낱말은 신자들이 교회에서 자신들을 가르치고 영적으로 키워 준 주교들과 사제들을 사랑과 존경하는 마음으로 부르던 용어이기도 하다. 특히 동방 지역에서는 스승을 가리켜 존경하는 마음으로 ‘아버지!’[師父]라고 즐겨 불렀다. 제자와 스승은 아들과 아버지처럼, 그래서 스승을 부모처럼 여기고 존경하면서 아버지로 불렀다.

 

구약 성경의 잠언과 코헬렛에서도 스승은 제자를 일컬어 아들이라고 하였다(「디다케」, 3,1; 4,1 참조). 제자들은 랍비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바오로 사도 또한 친히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에게 자신이 아버지라고 말한다.

 

“여러분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끌어 주는 인도자가 수없이 많다 하여도 아버지는 많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내가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1코린 4,15-16).

 

이레네오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가르쳐 준 분의 아들로 불리며, 그분을 아버지로 부른다”(「이단 반박」, 4,41). 예루살렘의 알렉산데르 주교는 오리게네스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자신의 스승이었던 판테누스와 클레멘스를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들의 찬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에우세비우스, 「교회사」, 6,14,9).

 

오늘날까지 자신에게 세례를 준 사제에게, 또는 신학교에 입학할 때나 수녀원에 입회할 때 추천장을 써 준 사제에게 ‘아버지 신부님’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전통을 남용하여 교만한 마음으로 아버지 또는 스승으로 불리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엄하게 훈계하신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마태 23,6-10).

 

테르툴리아누스 교부는 다음과 같이 우리가 받은 특권을 강조한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말씀하신 적이 무척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그분 말고는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고(마태 23,9 참조) 하십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기도할 때, 우리는 이 명령을 따릅니다.

 

아버지를 알아보는 이들은 복됩니다! 성령께서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부르시고는 이스라엘을 꾸짖으시며, ‘내가 아들들을 기르고 키웠더니, 그들은 도리어 나를 거역하였다.’(이사 1,2)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느님이라고도 하니, 하느님 아버지라는 하나의 호칭에는 자식의 사랑과 그분의 권능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를 부르는 말은 아들을 부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머니 교회에 대한 언급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말의 뜻을 교회에서 배우는 만큼, 아버지와 아들 안에서 어머니를 알아보기 때문입니다”(「기도론」, 2,2-6).

 

* 장인산 베르나르도 - 청주교구 신부. 2016년에 은퇴한 원로 사목자로 현재 강화꽃동네 성녀 헬레나 성당에서 통일을 기원하며 지낸다. 독일 본대학교에서 교부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대구가톨릭대학교와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경향잡지, 2018년 5월호, 장인산 베르나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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