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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 평신도 교회사: 유래 없는 시작, 평신도 신앙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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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4-14 ㅣ No.962

한국 평신도 교회사 (1) 유래 없는 시작, ‘평신도 신앙공동체’

 

 

‘명례방 신앙집회’, 김태, 1984, 명동대성당.

 

 

올 한 해 ‘평신도 희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의 평신도 역사를 간략하게 돌아보고자 한다. 흔히 한국교회사의 자랑으로 ‘평신도 공동체로 출발한 한국천주교회’를 이야기한다. 정말로 한국천주교회의 역사는 그렇게 특별한 방식으로, 선교사 없이 스스로 공부하고 깨달으며 받아들인 평신도들에게서 출발하였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였고, 어떻게 신앙의 공동체로 발전하였을까?  

 

평신도(平信徒, laity)라는 말은 ‘군중’을 뜻하는 그리스어 ‘라이코스’(λαικος)에 유래했다고 보며, 이것이 ‘속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면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 어원인 ‘라오스’(λάος, 백성)는 신약성경에서 ‘교역자’와 구분되는 “일반신도”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고, “그리스도인” 전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러한 성경의 개념 속에서 “하느님 백성”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현대적 교회론이 등장한 것이다. 교회법전에는 ‘평신도’에 대한 정의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교회헌장』을 통해서 평신도는 ‘성직자와 수도자가 아닌’ 모든 신자라는 방식의 정의가 나타난다.(『교회헌장』 31항a : “성품의 구성원과 교회가 인정한 수도 신분의 구성원이 아닌 모든 그리스도인”)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을 채택하여, 평신도들이 “그리스도의 사제직, 예언직, 왕직”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하였다. 어쩌면 이러한 현대적인 평신도 개념의 발전 이전부터 한국교회의 평신도들은 더 적극적으로 신앙실천 운동을 삶으로 보여준 것이 아닌가 한다. 이제 세계교회사에서 유래가 없던 한국천주교회의 특별한 기원에 대해서 살펴보자. 

 

한국천주교회의 기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의견이 있다.  

 

첫째, “임진왜란 기원설”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제1군 지휘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요청으로 그 이듬해에 일본군을 위한 군종신부 자격으로 스페인 출신의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에 들어왔다. 그는 경상도 곰개(웅포熊浦)에 들어와서 일본군 및 전쟁의 위험에 처해 있는 조선인 아기들에게 유아세례를 주기도 하였다. 심지어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 가운데 세례를 받고 순교까지 한 기록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시작이라면, 참된 신앙의 공동체가 바로 이 땅, 한반도에 지속적으로 생겨났을 때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단순히 세례받은 사람이 한 명 있었다고 그것을 교회의 탄생이라고 하지 않는다.  

 

둘째, “주어사-천진암 강학설”이 있다. 다산 정약용이 남겨놓은 묘지명 가운데, 정약전 묘지명, 이벽 묘지명에 천진암과 천진암-주어사에서 강학 모임을 한 사실이 밝혀져 있다. 1779년 겨울 권철신, 권일신, 정약전, 정약용, 이승훈, 이벽 등이 모여서 유교경전 등을 연구하였다. 묘지명 안에는 이른바 서학西學 곧 천주교에 대한 연구를 했다고는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당대의 여러 상황을 고려해볼 때, 천주교의 일부 주제도 함께 연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모임을 천주교 신앙공동체의 탄생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학문적인 호기심과 탐구, 교리에 대한 심오한 연구를 했다고 그것을 신앙공동체라고 부를 수 없다. 그 안에 믿음과 기도, 성령과 그리스도의 나눔이 있어야 그것을 믿는 이들의 공동체, 교회라고 부를 수 있다. 따라서 이 강학 모임은 신앙공동체가 생겨나는 밑바탕, 한국교회의 전사前史 곧 준비기로 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셋째, “이벽의 집에서의 세례식”이 있다. 1784년 이승훈이 베드로라는 본명으로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서 수표교 인근 이벽의 집에서 이벽(세례자 요한),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세례를 주었다. 만일 이승훈이 돌아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신앙생활도 하지 않았다면 한국교회의 시작은 더욱 늦춰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승훈은 천주교 서적에 대해 더욱 연구하였고, 세례식을 거행하였으며, 이후 이벽의 집에서 지속적인 집회를 열었다. 아마 이벽의 집이 포화 상태가 되었을 때 명례방 김범우 토마스의 큰 집으로 집회장소를 옮겨 갔을 것이다.  

 

이로써 한국천주교회의 시작은 평신도들로 이루어진 신앙공동체로 출발하였다. 이들 첫 제자들의 세례명이 이렇게 선택된 것은 한국교회의 시작에서 그들의 평신도 사도직이 어떻게 발휘되었는지 보여주는 듯하다.  

 

북경에서 세례를 준 그라몽 신부는 ‘조선교회의 반석이 되라’는 뜻에서 이승훈에게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주었고, 이 베드로는 조선에서 들어와서 다른 평신도들에게 세례를 주면서 한국교회의 반석을 다지게 되었다. 이벽은 조선교회의 선구자로 길을 닦기 위해 세례자 요한을 선택하였다. 그렇게 이승훈을 준비시키고, 권철신 등의 유학자들에게 천주교 학문의 길을 열어 예비시킨 이도 이벽이었다. 권일신은 동방선교의 주보성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선택하여 향후 선교의 의지를 불태웠다. 이처럼 이들 평신도로 이루어진 신앙공동체는 베드로 사도를 반석으로 하여,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 세례자 요한의 준비, 동방 선교의 모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로 이루어져 이 땅에 복음이 울려퍼지는 새로운 시대를 기약하였다.

 

이들은 일종의 기도모임인 집회를 계속해서 이어 갔다. 그리고 새로운 세례자들, 정약용, 정약전, 홍낙민 등 양반 이외에도 최창현, 최인길, 지황, 김범우 등 중인들이 함께 이 세례 공동체에 참여하였다. 이들 평신도들은 당시 견고한 사회적 구조인 신분적 차등이라는 장벽을 쉽게 뛰어넘은 것 같다. 차별 없이 함께 모임에 참여하고, 세례받은 이들이 많아지자 큰 집을 소유했던 김범우는 기꺼이 자신의 집을 집회장소로 제공했다. 여기서 이른바 명례방 공동체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공동체는 그 시작과 함께 곧바로 시련이 찾아왔다. 1785년 봄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집회를 하던 중 형조의 사령使令들이 집 안으로 들이닥쳐 천주교 서적과 성물들을 압수하고 집주인인 김범우를 심문하였다. 김범우 토마스는 마침내 단양으로 유배를 갔고, 그곳에서 선종하고 말았다. 이 사건을 교회사에서는 “을사추조적발사건”이라고 부른다. 곧 ‘을사년(1785)에 형조(형조刑曹=추조秋曹)가 천주교 모임을 적발한 사건’을 지칭한다. 남인 중심의 뛰어난 인재들이 모인 이 공동체는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해 모임을 열지 않고 조심하였던 것 같다. 이승훈, 정약용, 정약전, 홍낙민 등 모두 뛰어난 양반 가문에 과거를 준비하던 이들이고, 후에 진사시 합격 이후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던 인물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년 후 1786년 봄 그들은 천주교의 전례와 성사聖事의 이로움을 알기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들 스스로 교계제도를 세워 성사를 거행하기 시작하였다. 역사는 이를 “가성직제도”라는 용어로 부르는데, 그 내용상 “평신도로 구성된 교계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들 스스로 성직자를 임명하여, 세례 이외에 성체, 고해, 견진성사까지 모두 실천하였다. 물론 무지에 의한 신앙실천이었고, 그것이 ‘독성죄’라는 큰 죄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그렇게 볼 때 이 초기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직무를 통한 평신도와 성직자의 구분을 알지 못했고, 신앙의 열정으로 교리와 성사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후에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기 전까지 그들에게 특별한 용법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세례를 집전한 이는 “신부神父”, 교리를 가르쳐준 이는 “대부代父”라고 부르는 것이다. 아마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았을 때, 세례를 준 이들을 신부神父로, 교리를 가르쳐주고 도움을 준 이들을 대부代父로 불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성사 실천이 ‘독성죄’임을 지적한 이는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이었는데, 그는 『성교절요』라는 교리서에서 성품성사의 인호印號를 읽고, 성사가 사제들에게 유보되어 있음을 발견한 것 같다. 결국 그들은 윤유일 바오로를 밀사로 북경에 파견하기로 하였다.  

 

이처럼 평신도들만의 공동체로 시작한 한국천주교회의 첫 5년간은 교리적 지식은 부족했지만, 신앙 실천을 위한 가장 순수한 모임과 성사가 이루어지고, 양반과 중인 위주의 집회에서 점차 하층민을 위한 한글서적의 번역 등으로 이어진 것이 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승훈은 북경주교에게 보내는 편지에 대략 1,000여 명의 신자가 있음을 밝히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 조한건 서울교구 소속 사제, 한국교회사연구소 부소장으로 한국천주교회사를 연구하고 있다.

 

[월간 생활성서, 2018년 2월호, 조한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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