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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수도 ㅣ 봉헌생활

수녀원 창가에서: 고모는 왜 수녀가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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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2-15 ㅣ No.600

[수녀원 창가에서] 고모는 왜 수녀가 되었어

 

 

어느 날 조카 지수가 자기 아빠에게 물었단다. “아빠, 고모는 왜 수녀가 되었어?”

 

함께 식사하던 자리에서 동생은 조카의 이 질문을 내게 넌지시 건넨다. 나는 망설임 없이 웃으며 간결하게 답했다. “행복해지려고.”

 

성소와 같은 중대한 결정을 할 때 그 길이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확신이 없다면 어떻게 택할 수 있을까?

 

1985년 내가 수녀원에 들어올 때는 열두 명이 함께 입회했다. 당시 우리 수녀회의 역사상 지원자 수가 가장 많았던 때다. 그렇게 수도 성소가 성황을 이루던 전성기를 지나 이젠 일 년에 한두 명, 아니 아예 지원자가 없는 해도 있다.

 

이렇듯 성소자의 부재 현상은 현대 사회에서 그만큼 수도 성소가 매력을 잃어버렸다는 얘기다. 흥미로운 것이 차고 넘치는 세상,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살 수 있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청빈과 정결 그리고 순명이라는 수도 서원의 가치가 얼마나 현대 젊은이들에게 매력이 있어 보이겠는가?

 

그렇다면 나는 왜 수도원에 남아 있고, 무엇이 나를 아직도 이곳에서 살게 하는가? 수도 생활은 지금도 나에게 행복을 안겨다 주는가?

 

 

취약함의 신비

 

세상 사람들은 말한다. 강해져야 하고 많이 가져야 잘 살 수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대학가에서는 전에 볼 수 없던 진풍경이 벌어진다. 바로 대학생들 가운데 4년 만에 졸업하지 않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배우는 것에 심취해서 대학에 오래 몸담고 있으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나가기 전에 더 많은 자격증과 ‘스펙’을 쌓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남들보다 더 나은 상품 가치로 만들어야 비로소 세상에서 자신을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여긴다. 현대 젊은이들의 심리는 현대 자본주의가 지향하는 가치관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렇듯 더 강한 권력과 더 많은 소유를 지향하는 문화 속에서 수도 생활이 어떻게 매력적으로 보이겠는가?

 

그러나 수도자들이 지향하는 순명과 청빈의 가치는 궁극적으로 사랑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사랑은 세상이 말하는 강함과는 너무도 다르다. 사랑은 ‘취약함의 신비’를 안고 있다. 그 신비의 정수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 취약함의 신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취약함은 그분을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택해야 할 길이기도 하다. 머리로는 알지만 실제 삶에서 그것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게 결코 녹록지 않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특히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밖에서 기다리신다

 

수도 생활에서 가장 큰 도전으로 다가오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공동체 생활이다. 성격이나 살아온 환경이 다른 사람들끼리 한솥밥을 먹고 사니 그 안에서 온갖 부딪힘과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관계 안에서 힘을 빼지 못한 채 자기 합리화나 자기 정당화를 위해 목소리를 높일 때 우리의 관계는 틀어지고 만다. 힘을 뺀다는 건 그저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침묵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힘을 뺀다는 것은 사랑의 마음을 가질 때 가능하리라. 우리는 어머니에게서 이것을 경험하지 않았는가! 어머니는 늘 자식에게 진다. 바로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이리라.

 

요한 묵시록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3,20)고 말씀하신다. 당신이 스스로 문을 열지 않으시고, 우리 마음을 두드리시며 밖에서 서성거리신다. 그렇게 기다리신다. 왜 하느님께서는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실까?

 

장애인들과 함께 일생을 산 장 바니에 신부는 하느님이 얼마나 취약하신 분이신지에 대해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힘 있게 문을 걷어차고 들어오시지 않고 문 밖에 서서 똑똑 두드리시는 분이시라고 말이다.

 

‘만일 누가 듣고 문을 열면 그때 난 들어갈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믿는 하느님께서는 우리 밖에서 기다리시고 문을 두드리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여기서 하느님의 취약성을 발견한다.

 

 

사랑할 때 취약해지고

 

사랑은 취약하다. ‘취약하다’(vulnerable)는 어원상 ‘상처를 입히다.’라는 뜻의 라틴어 ‘vulnerare’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단어에는 ‘상처를 입기 쉬운’이나 ‘공격이나 피해에 노출되어 있는’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 취약함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것이 바로 사랑하는 상태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불확실하다. 그래서 위험이 따른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음을 전제한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내가 그를 사랑할지도 불확실하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건 취약함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사랑할 때 우리는 취약해지고 부드러워진다. 사랑을 경험한 이는 이 말에 공감하리라. 사랑할 때 우리는 상대에게 자신을 맞추려 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자신을 낮추고 부드러워지려 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신을 맞추려고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육화의 신비보다 더 명확히 보여 주는 게 있을까?

 

나는 오늘도 이 수도 성소를 택한다! 그리고 우리 수녀회의 창설자 엘리자벳 앤 씨튼의 말씀을 오늘의 양식으로 삼아 힘차게 또 하루를 시작해 본다.

 

“내 일상생활의 목표는 모든 사건을 온유하고 조용히 받아들이는 것이며, 모든 알력을 부드럽고 쾌활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 최현민 엘리사벳 - 사랑의 씨튼 수녀회 수녀. 종교대화씨튼연구원장이며 「영성생활」 편집인이다. 일본 난잔대학에서 종교문화원 연구원을, 벨기에 루뱅대학교에서 연구원을 지냈다.

 

[경향잡지, 2018년 2월호, 최현민 엘리사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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