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8일 (목)
(백)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성경자료

[신약] 예수님 이야기42: 기도(루카 1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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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2-10 ㅣ No.3916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 루카복음 중심으로] (42) 기도(루카 11,1-13)


예수님이 전한 기도의 왕도(王道) “끊임 없이 청하고 두드려라”

 

 

- 예루살렘 근교 올리브산에 있는 주님의 기도 성당 전경.

 

 

이번 호에서는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펴봅니다.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달라는 제자의 요청에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알려 주십니다. 이어서 끊임없이 청하라고,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기도(11,1-4)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계실 때에 어떤 제자가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요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시며 기도를 알려 주십니다. 바로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석 성경」의 주해를 기본적으로 참고하면서 살펴봅니다. 

 

주님의 기도 전반부는 아버지에 관한 내용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와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입니다. 

 

첫째 부분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에서 “이름”은 그 인물의 존재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이름”은 하느님 아버지의 존재를 가리키는 표현이 됩니다. 또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다’는 표현은 성경과 유다교 문학의 고전적인 표현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라고 기도하지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거룩하신 분 자체이시기에 사실 우리가 그분의 거룩하심(聖性)에 뭔가를 더 보탤 수는 없지요. 그래서 이 표현은 아버지의 거룩하심을 받아들이고 널리 알리며 그분의 영광을 칭송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성경과 유다교에서는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드러나는 방식을 두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신자들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언한 것처럼 하느님께서 친히 당신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시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근교 울리브산에 있는 주님의 기도 성당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셨다는 곳에 세워졌다. 주님의 기념 성당에는 세계 각국 나라 말로 된 주님의 기도문들이 회랑과 벽면에 적혀 있다. 다양한 언어의 주님의 기도 문이 적혀 있는 주님의 기도 성당 회랑. 가톨릭평화방송여행사 제공.

 

 

전반부의 둘째 부분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에서 “아버지의 나라” 곧 하느님의 나라는 특정한 장소의 개념이라기보다는 하느님 아버지의 주권, 그분의 통치와 관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느님 아버지의 주권이, 그분의 다스림이 완전히 펼쳐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라는 청원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그분의 다스림이 하루빨리 이 세상에 충만히 펼쳐지도록 해 달라는 청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뜻은 이미 예수님을 통해서 펼쳐지고 실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은 바로 하느님 나라가 예수님과 함께 와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루카 4,21 참조) 하지만 하느님 나라가 아직 완전히 다 실현되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함께 시작되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하는 청원은 아버지의 나라가 도래해 아버지의 다스림이 완전히 펼쳐지도록 해 달라는 청원입니다. 그럴 때 아버지의 이름 또한 온 땅에서 거룩하게 빛나게 될 것입니다.

 

루카가 전하는 주님의 기도 후반부는 세 가지 청원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첫째 청원은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것입니다. 참고로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오늘”이라고 하는데(마태 6,11), 루카 복음서에서는 “오늘”이 “날마다”로 바뀌어 있습니다. ‘오늘’이라는 표현에는 절박함이 묻어난다면 ‘날마다’에는 일상성이 부각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만이 아니라 매일매일의 양식을 달라는 청원입니다. 

 

둘째 청원은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는 것이 우리의 죄를 용서받는 전제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우리의 잘못을 용서받으려면 우리가 먼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그것도 모든 사람을 예외 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의 “날마다”와 결부시키면 이 용서는 날마다 계속돼야 합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이 용서를 청하면 예외 없이 모두 용서하는 것,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기도 합니다.(루카 17,4 참조)

 

셋째 청원은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입니다. 이 기도는 유혹을 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 아니라 유혹을 당할 때 그 유혹에 떨어지지 않도록 해 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유혹을 당하지 않고 살아갈 재간이 없습니다. 갖가지 시련과 유혹을 겪게 마련입니다. 그럴 때마다 시련에 굴복하거나 유혹에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유혹에 쉽게 빠집니다.

 

 

끊임 없이 청하라(11,5-13)

 

이렇게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우리가 어떻게 청해야 하며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우선 구체적인 예화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한밤중에 잠자리에 든 벗을 찾아가 빵을 꿔 달라고 청하면 잠자리에 든 그 친구는 벗이라는 이유로는 빵을 꿔주지 않겠지만 끈덕지게 졸라대면 귀찮아서라도 필요한 만큼 다 주리라는 것입니다.(11,5-8) 이어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11,9-10) 

 

그런데 무엇을 청하고 무엇을 찾고 또 무엇을 위해 문을 두드려야 할까요? 이와 관련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11,11-13)

 

 

생각해 봅시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청하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좋은 것’을 평가하는 기준은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내가 청하는 것이 내게 필요하고 좋은 것이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실 때에는 오히려 좋지 않은 것, 예를 들면 전갈이나 뱀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좋다고 여기는 것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내게 좋은 것을 주십사고 청해야 합니다. 그분은 절대로 우리에게 나쁜 것을 주실 분이 아니시니까요. 

 

그런데 우리에게 정말로 가장 좋은 것은 무엇일까요? 성령입니다. 성령은 좋은 것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 그 자체이십니다. 사실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삶은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는 최상의 삶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그리스도 신자라고 고백하는 우리는 성령을 바라는지요? 아니면 지금 당장 내게 필요한 뭔가를 바라는지요?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삶은 어떤 삶일까요?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는 삶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찾지 마라. 염려하지 마라. … 오히려 너희는 그분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이것들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루카 12,29-31)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대로 먼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12월 10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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